능엄경 제4권의 핵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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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근의 형성과 작용:
- 부처님께서는 눈, 귀, 코, 혀, 몸, 뜻 등 감각 기관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셨습니다.
- 각 감각 기관은 포도송이와 같은 눈, 말린 잎과 같은 귀 등 특정한 기능과 비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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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본질:
- 감각은 본래 청정하고 물들지 않았으나 외적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가려져 있습니다.
- 감각의 한계를 초월하면 더 높은 자각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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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방법:
- 움직임과 고요함, 결합과 분리, 변화와 불변, 막힘과 통함, 생겨남과 사라짐, 밝음과 어둠 등 상대적인 개념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 하나의 감각 기관을 청정하게 하면 다른 감각 기관들도 청정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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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과 자각의 관계:
- 종소리 실험을 통해 듣는 능력의 본질은 소리의 유무에 따라 변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 감각적 인식(예: 소리를 듣는 것)은 감각의 본성(듣는 능력)과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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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의 영원성:
- 수면 중이나 육신이 소멸한 후에도 자각의 본성은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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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목표:
- 생멸하는 현상에 대한 집착을 놓고, 진실하고 상주하는 본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 마음의 명료함을 얻어 궁극적으로 무상의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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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의 교정:
- 중생이 종종 외적 현상에 현혹되어 본래 청정한 본성을 잊어버리고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 감각적인 겉모습을 초월하여 진정한 본성을 인식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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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열쇠:
- 외적 현상에 현혹되지 말고 청정한 자각의 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 감각적 경험과 감각 본성의 구별을 이해함으로써 감각의 한계를 초월해야 합니다.
이러한 점들은 인간의 지각, 의식의 본질, 그리고 수행의 길에 대한 부처님의 깊은 통찰을 드러내며 수행자들에게 길을 제시합니다.
능엄경 제4권 전문
그때 부루나미다라니자(Purna Maitrayaniputra)가 대중 가운데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으며 합장하고 공경히 부처님께 여쭈었다.
“대덕이신 세존이시여, 당신께서는 중생을 위해 여래의 제일의제를 유창하게 설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저를 설법제일이라 자주 칭찬하셨습니다. 오늘 여래의 미묘한 법음을 듣는 것은 마치 귀머거리가 백 보 밖의 모기 소리를 들으려는 것과 같아서, 본래 보지도 못하는데 하물며 들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명백한 선포는 저에게 미혹을 떨쳐버리라고 명하시지만, 저는 아직 궁극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여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 등과 같이 비록 약간의 깨달음을 얻었다 해도 습기와 유루가 제거되지 않은 이들도 있습니다. 저와 같이 무루의 단계에 이르러 모든 번뇌를 다한 이들도 여래의 법음을 들으면 여전히 의심과 후회를 품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의 세간의 근, 진, 음, 처, 계가 본래 청정한 여래장이라면, 어찌하여 산과 강과 대지가 갑자기 생겨나고 모든 유위법이 차례로 유전하며 끝났다가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까? 또한 여래께서는 지, 수, 화, 풍의 성품이 원만하게 융통하여 법계에 두루하며 담연히 상주한다고 설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지(地)의 성품이 두루하다면 어떻게 물을 담을 수 있습니까? 만약 수(水)의 성품이 두루하다면 불이 생겨나지 않아야 할 텐데,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만약 물과 불의 성품이 모두 허공에 두루하다면 서로 멸해야 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지의 성품은 막는 것이고 공의 성품은 통하는 것인데, 어떻게 둘 다 법계에 두루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 이치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직 바라옵건대 여래께서는 대자비를 베푸시어 저와 대중을 위해 미혹의 구름을 걷어 주옵소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오체투지하여 여래의 무상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간절히 기다렸다.
그때 세존께서 부루나와 회상에 있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무학이 된 아라한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이 회상을 위해 여래는 승의(勝義) 가운데 참된 승의를 선설하리라. 너희 정성성문(定性聲聞)들과 두 가지 공(空)을 얻지 못했으나 최상승으로 향하려는 이들, 그리고 아라한들로 하여금 모두 일승(一乘)의 적멸한 곳, 진정한 아란야(Aranya), 바른 수행처를 얻게 하리라. 이제 잘 듣거라. 너희를 위해 설명하리라.”
부루나 등은 공경히 받들어 부처님의 법음을 기다리며 잠자코 들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루나야, 네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이 청정하고 본래적인데, 어찌하여 산과 강과 대지가 갑자기 생겨나는가? 너는 여래가 ‘각(覺)의 성품은 묘명(妙明)하고, 본각(本覺)은 명묘(明妙)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예, 세존이시여. 저는 자주 부처님께서 이 이치를 선설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각과 명에 대해 말하는데, 본성이 밝아서 각이라 부르는가, 아니면 각은 본래 밝지 않으나 명각이라 부르는가?”
부루나가 말했다. “만약 이 밝음이 없는 것을 각이라 부른다면 무명(無明)이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밝음이 없다면 명각은 없다. 만약 엄밀히 각이 아닌 것이 있다면 밝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나 무명은 명각의 본성이 아니다. 각의 성품은 필연적으로 밝지만, 잘못되어 명각이 된다. 각은 이해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밝음 때문에 대상이 확립된다. 대상이 거짓으로 확립되면 너의 거짓된 주관이 생긴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 속에 격렬한 차이가 확립된다. 다른 것과 달라서 차이 때문에 동일성이 확립된다. 동일성과 차이가 분명히 확립되면, 뒤이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이 확립된다. 그러한 혼란이 서로 피로를 낳는다. 피로가 오래되면 먼지를 일으켜 스스로 가리고 스스로 탁하게 한다. 이로 인해 진로(塵勞)의 번뇌가 일어난다. 일어나면 세계가 되고, 고요하면 허공이 된다. 허공은 같음이고 세계는 다름이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이 진정한 유위법이다.”
“각은 공을 어둡게 하고 상호 작용하여 흔들림이 된다. 그러므로 세계를 지탱하는 풍륜(風輪)이 있다. 공 때문에 흔들림이 생기고, 견고한 밝음이 장애를 확립한다. 금속적이고 귀중한 것은 밝은 앎(明覺)에 의해 견고한 것으로 확립된다. 그러므로 국토를 받치는 금륜(金輪)이 있다. 견고한 각은 귀금속이 되고, 흔들리는 명은 바람을 낳는다. 바람과 금속이 서로 마찰하여 변화의 성질로서 불빛(火光)이 있다. 귀중한 밝음은 습기를 낳고 불빛은 위로 증발한다. 그러므로 시방세계를 포함하는 수륜(水輪)이 있다. 불은 오르고 물은 내려가 그 상호 작용이 견고함을 확립한다. 젖은 것은 큰 바다가 되고 마른 것은 대륙과 섬이 된다. 이 뜻으로 인해 불빛은 항상 큰 바다로 오르고 강물은 항상 대륙으로 쏟아진다. 물의 힘이 불보다 약한 곳에서는 맺혀서 높은 산이 된다. 그러므로 산의 바위가 부딪치면 불꽃을 내고 녹으면 액체가 된다. 흙의 힘이 물보다 약한 곳에서는 초목으로 추출된다. 그러므로 숲이 타면 재가 되고 짜내면 물을 낸다. 서로 작용하는 허망한 생기(生起)가 서로 씨앗이 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 세계는 계속된다.”
“또한 부루나야, 밝음의 허물은 각이 대상이 되는 허물에 다름 아니다. 일단 허망한 대상이 확립되면 밝음의 이치는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 듣는 것은 소리를 넘지 못하고 보는 것은 색을 넘지 못한다. 색, 성, 향, 미, 촉, 법의 육진(六塵)이 성취된다. 이로부터 견, 문, 각, 지가 나뉜다. 동류의 업은 결합하고 합과 이가 변화를 가져온다. 봄이 밝음을 만나면 색이 생기고, 밝은 봄이 생각을 낳는다. 다른 견해는 미움을 낳고 같은 견해는 사랑을 낳는다. 흐르는 사랑은 씨앗이 되고 받아들이는 생각은 태(胎)가 된다. 교접이 일어나 동류의 업을 끌어당긴다. 그리하여 인연이 갈라람(Kalala), 알부담(Arbuda) 등을 낳는다. 태생, 난생, 습생, 화생은 각각의 대응을 따른다. 알은 생각에서 태어나고 태는정(情)에서 생긴다. 습생은 합하여 감응하고 화생은 떠나서 응한다. 정, 상, 합, 리는 서로 변용한다. 모든 받은 업은 그 뜨고 잠김을 따른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 중생은 계속된다.”
“부루나야, 생각과 사랑은 맺어져 사랑은 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세간의 부모와 자식은 끊임없이 서로 낳는다. 이들은 욕망과 탐욕에 근거한다. 탐욕과 사랑은 서로 기르며 탐욕은 멈출 수 없다. 그러므로 세간의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의 생물들은 그 힘에 따라 서로 잡아먹는다. 이들은 살생과 탐욕에 근거한다. 사람이 양을 먹고 양이 죽어 사람이 되며 사람이 죽어 양이 된다. 이와 같이 십종(十種) 중생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죽고 태어나며 서로 잡아먹는다. 악업은 함께 태어나 미래의 끝을 다한다. 이들은 도둑질과 탐욕에 근거한다. 너는 나에게 목숨의 빚이 있고 나는 너에게 빚을 갚는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 백천 겁을 지나도 항상 생사 속에 있다. 너는 내 마음을 사랑하고 나는 너의 색(色)을 가엾게 여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 백천 겁을 지나도 항상 속박 속에 있다. 살생, 도둑질, 음욕은 세 가지 근본 뿌리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 업보는 계속된다.”
“부루나야, 이 세 가지 전도된 모습의 계속은 모두 명각, 즉 밝은 앎의 성질 때문이다. 앎이 있기 때문에 모습이 일어나고, 그것들은 상호 작용하여 허망한 봄(見)에서 생긴다. 산과 강과 대지, 모든 유위법은 차례로 유전한다. 이 허망함 때문에 그것들은 끝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부루나가 말했다. “만약 이 묘각이 본래 묘명각이고 여래의 마음과 더불어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면, 어찌하여 갑자기 산과 강과 대지, 이 모든 유위법을 생겨나게 합니까? 지금 여래께서는 묘공명각을 증득하셨는데, 언제 다시 산과 강과 대지, 유위의 습루가 생겨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예를 들어, 어떤 마을 사람이 남쪽과 북쪽에 대해 헷갈려 한다면, 이 헷갈림은 헷갈림 때문인가 아니면 깨달음 때문인가?”
부루나가 말했다. “그러한 헷갈린 사람은 헷갈림 때문도 아니고 깨달음 때문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헷갈림에는 기본적으로 뿌리가 없는데 어찌 원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은 헷갈림을 낳지 않는데 어찌 원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그 헷갈린 사람이 헷갈림 속에 있을 때, 갑자기 깨달은 사람을 만나 길을 가르쳐 주어 깨닫게 되었다고 하자. 부루나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록 이 사람이 헷갈렸다 하더라도 이 마을에서 다시 헷갈림을 일으키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루나야, 시방의 여래들도 또한 이와 같다. 이 헷갈림은 뿌리가 없고 그 성품은 필경 공(空)이다. 전에는 기본적으로 헷갈림이 없었고 헷갈림과 깨달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헷갈림의 자각이 헷갈림을 끝낼 때, 자각은 헷갈림을 낳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백내장이 있는 사람이 허공에 꽃을 보는 것과 같다. 만약 백내장이 제거되면 꽃은 허공으로 사라진다. 만약 어리석은 사람이 허공의 꽃이 사라진 자리에서 다시 꽃이 생겨나기를 기다린다면, 너는 이 사람을 어리석다고 보겠느냐 지혜롭다고 보겠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고 허망한 봄(見)이 생멸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꽃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은 이미 전도된 것입니다. 다시 나타나라고 명하는 것은 순전히 광기입니다. 그러한 광인을 어찌 어리석다거나 지혜롭다고 정의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이해하는 바와 같다. 어찌하여 제불 여래의 청정하고 밝은 묘공이 언제 다시 산과 강과 대지를 낳는지 묻느냐? 또한 그것은 금광석이 순금과 섞여 있는 것과 같아서, 일단 금이 순수해지면 다시 섞이지 않는 것과 같다. 나무가 재가 되면 다시 나무로 돌아가지 않는 것과 같다. 제불 여래의 보리와 열반도 또한 이와 같다.”
“부루나야, 너는 또한 지수화풍의 성품이 원만하게 융통하고 법계에 두루하는 것에 대해 묻고, 물과 불이 서로 멸하지 않을까 의심했다. 또한 허공과 대지가 둘 다 법계에 두루한데 어찌하여 적합하지 않은지 물었다. 부루나야, 예를 들어 허공의 몸은 제상(諸相)의 모임이 아니지만, 제상의 나타남을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루나야, 그 대허공은 해가 비치면 밝고, 구름이 모이면 어둡고, 바람이 불면 움직이고, 하늘이 개면 맑고, 기상이 응결하면 탁하고, 먼지가 쌓이면 뿌옇고, 물이 맑으면 비춘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러한 다양한 유위의 상은 그러한 조건들에 의해 생기는가, 아니면 공 속에 존재하는가? 만약 그러한 조건들로부터 생긴다면, 부루나야, 해가 비칠 때 밝은 것은 해이기 때문에 시방은 해의 색이어야 한다. 어찌하여 하늘에서 둥근 해를 볼 수 있는가? 만약 그것이 공의 밝음이라면 공은 스스로 빛나야 한다. 왜 구름과 안개가 있는 한밤중에는 빛이 없는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밝음은 해도 아니고 공도 아니지만, 공이나 해와 다르지 않다. 상을 관찰하면 그것들은 본래 허망하여 가리킬 것이 없다. 마치 허공의 꽃을 불러 허공의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과 같다. 어찌 그것들이 서로 멸하는 의미를 규명하려 하는가? 성품을 관찰하면 그것은 본래 진실하며 오직 묘명각뿐이다. 묘각명심은 본래 물도 아니고 불도 아니다. 어찌 그것들의 부적합에 대해 묻느냐? 진정한 묘명각도 또한 이와 같다. 만약 공을 써서 그것을 밝히면 공이 나타난다. 만약 지수화풍이 각각 그것을 검증하면 각각 나타난다. 만약 모두가 그것을 검증하면 모두가 나타난다. 어떻게 모두 나타나는가?”
“부루나야, 그것은 마치 태양의 그림자가 하나의 물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만약 두 사람이 물속의 태양을 함께 보고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가면, 각각 태양이 그들을 따라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갈 것이다. 기준은 없다. ‘이 태양은 하나인데 왜 각각의 길로 가는가?‘라고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 태양은 둘이 되었는데, 왜 하나로 나타나는가? 그것은 뒤얽혀 있고 허망하여 근거가 없다.”
“부루나야, 너는 색과 공을 사용하여 여래장과 다투고 여래장을 잡으려 하므로, 여래장은 법계에 두루하여 색과 공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바람은 움직이고, 공은 고요하며, 해는 밝고, 구름은 어둡다. 중생은 미혹하고 어리석어 깨달음(覺)을 등지고 티끌(塵)과 합한다. 그리하여 진로(塵勞)가 생겨나 세간의 모습을 가져온다. 나는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는 묘명(妙明)으로 여래장과 합하므로, 여래장은 오직 묘각과 밝음만이 법계를 완전히 비춘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하나가 무량이고 무량이 하나이다. 작은 것이 큰 것 속에 나타나고, 큰 것이 작은 것 속에 나타난다. 움직이지 않는 도량(道場)이 시방세계에 두루하다. 나의 몸은 시방의 다 함 없는 허공을 포함한다. 터럭 하나 끝에 보왕(寶王)의 국토가 나타난다. 티끌 하나 속에 앉아 대법륜을 굴린다. 티끌을 멸하고 깨달음과 합하면, 진여의 성품과 묘각과 밝음이 드러난다. 여래장, 본래 묘하고 원만한 마음은 마음도 아니고, 공도 아니고, 땅도 아니고, 물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불도 아니다. 눈, 귀, 코, 혀, 몸, 뜻도 아니다. 색, 성, 향, 미, 촉, 법도 아니다. 안식계에서 의식계에 이르기까지의 것도 아니다. 밝음도 아니고, 무명도 아니고, 밝음과 무명이 다하는 것도 아니다. 노사에 이르기까지의 것도 아니고, 노사가 다하는 것도 아니다. 고, 집, 멸, 도도 아니다. 지혜도 아니고, 얻음도 아니다. 보시도 아니고, 지계도 아니고, 정진도 아니고, 인욕도 아니고, 선정도 아니고, 반야도 아니고, 바라밀도 아니다. 여래에 이르기까지의 것도 아니고, 아라한도 아니고, 삼먁삼보리도 아니고, 대열반도 아니다. 상(常)도 아니고, 낙(樂)도 아니고, 아(我)도 아니고, 정(淨)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간적인 것도 출세간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래장, 본래 밝은 마음이자 묘함이다. 그것은 마음이고, 그것은 공이고, 그것은 땅이고, 그것은 물이고, 그것은 바람이고, 그것은 불이다. 그것은 눈이고, 그것은 귀, 코, 혀, 몸, 뜻이다. 그것은 색이고, 그것은 성, 향, 미, 촉, 법이다. 그것은 안식계이고, 의식계에 이르기까지의 것이다. 그것은 밝음이고, 무명이고, 밝음과 무명이 다하는 것이다. 노사에 이르기까지의 것이고, 노사가 다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 집, 멸, 도이다. 그것은 지혜이고, 얻음이다. 그것은 보시이고, 지계이고, 정진이고, 인욕이고, 선정이고, 반야이고, 바라밀이다. 여래에 이르기까지의 것이고, 그것은 아라한이고, 그것은 삼먁삼보리이고, 그것은 대열반이다. 그것은 상이고, 그것은 낙이고, 그것은 아이고, 그것은 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간적인 것이면서 출세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래장, 묘명심의 본원이다. 그것은 ‘있음’과 ‘없음’을 여의었고, ‘있음’이자 ‘없음’이다. 삼계에 존재하는 중생과 세간을 벗어난 성문과 연각이 어떻게 그들이 아는 마음으로 여래의 무상보리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세간의 언어를 사용하여 부처님의 지견(知見)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거문고, 비파와 같다. 비록 묘한 음색을 가지고 있지만, 교묘한 손가락이 없으면 연주될 수 없다. 너와 모든 중생도 또한 이와 같다. 보배로운 깨달음(寶覺)과 참된 마음(眞心)은 각자에게 원만하게 차 있다. 내가 손가락을 누르면 해인(海印)이 빛을 발하는 것처럼, 네가 마음을 일으키면 진로가 먼저 생긴다. 왜냐하면 너는 무상의 깨달음의 도를 부지런히 구하지 않고, 소승을 좋아하며 적은 것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부루나가 말했다. “저와 여래는 보배로운 깨달음, 원만한 밝음, 그리고 둘이 없는 참되고 묘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완전히 차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래전부터 시작 없는 망상을 만나 오랫동안 윤회에 머물렀습니다. 지금 성인의 수레를 얻었으나 아직 궁극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허망함은 완전히 소멸되었고, 오직 묘한 것은 진정한 상(常) 뿐입니다. 감히 여래께 묻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일체 중생은 허망함을 가지고 있어 스스로의 묘명을 가리고 이 빠지는 괴로움을 겪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비록 네가 의심을 제거했지만, 남은 미혹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 이제 세간에서 현재 눈앞에 있는 일들을 사용하여 다시 너에게 묻겠다. 너는 사위성(Shravasti)의 연야달다(Yajnadatta)에 대해 듣지 못했느냐?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거울을 보고 눈썹과 눈이 보이는 거울 속의 머리를 사랑했다. 그는 화가 나서 자신의 머리가 얼굴과 눈을 보지 못한다고 비난했다. 그것이 도깨비라고 생각하여 이유 없이 미친 듯이 달렸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슨 까닭으로 이 사람은 이유 없이 미친 듯이 달렸는가?”
부루나가 말했다. “이 사람의 마음이 미친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묘각은 밝고 원만하며, 본래의 원만함은 밝고 묘하다. 그것을 허망함이라 부르는데, 어찌 원인이 있을 수 있겠느냐? 만약 원인이 있다면, 어찌 허망함이라 부를 수 있겠느냐? 모든 망상(妄想)은 서로를 잇따라 일어나며, 미혹 위에 미혹을 쌓아 티끌 같은 겁(kalpas)을 지난다. 부처님이 그것을 밝혀 주어도 너는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한 미혹의 원인은 미혹 때문에 존재한다. 미혹에는 원인이 없고 허망함에는 근거가 없음을 깨달아라. 그것은 생겨나지도 않았는데 무엇을 멸한다는 말이냐? 보리를 얻은 자는 깨어나서 꿈속의 일을 말하는 사람과 같다. 비록 마음이 맑고 밝더라도, 무슨 인연을 사용하여 꿈속의 대상을 잡을 수 있겠느냐? 하물며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에 어찌 원인이 있겠느냐! 저 도시의 연야달다처럼, 자신의 머리를 두려워하고 달리는 것에 어찌 인연이 있을 수 있겠느냐? 만약 그의 광기가 갑자기 멈춘다면, 그의 머리는 밖에서 얻은 것이 아니다. 설사 그의 광기가 멈추지 않더라도, 그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냐? 부루나야, 허망함의 성품은 이와 같다.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느냐? 너는 단지 세간의 분별, 즉 업(業), 과(果), 중생이라는 세 가지 상속을 따르지 않으면 된다. 이 세 가지 연(緣)이 끊어지면, 세 가지 인(因)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면 네 마음속의 연야달다, 광기의 성품은 스스로 그친다. 그치는 것이 곧 보리이다. 무상의 청정하고 밝은 마음은 본래 법계에 두루하다. 그것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다. 왜 힘들고 뼈를 깎는 수행에 의지하여 그것을 검증하려 하느냐?”
그것은 마치 자신의 옷에 여의주가 매여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과 같다. 빈궁하여 타향을 떠돌며 음식을 구걸하고 뛰어다닌다. 비록 그는 참으로 가난하지만, 보주는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다. 갑자기 지혜로운 사람이 보주를 가리켜 준다. 그의 모든 소원은 마음으로부터 이루어지고, 그는 큰 부를 얻는다. 그때 그는 신성한 보주가 밖에서 얻은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즉시 대중 속에 있던 아난이 부처님의 발에 절하고 일어서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는 지금 살생, 도둑질, 음욕의 세 가지 인이 끊어지면 세 가지 연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속의 달다의 광기의 성품은 스스로 그치고, 그치는 것이 보리이며,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분명히 인연의 문제입니다. 왜 여래께서는 갑자기 인연을 버리십니까? 제 마음은 인연을 통해 열리고 깨어났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이치는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저희 젊은 성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회상에는 대목건련, 사리불, 수보리 등이 있으며, 그들은 늙은 바라문을 따르다가 부처님의 인연을 듣고 마음을 일으켜 깨닫고 무루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지금 보리가 인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면, 왕사성(Rajgriha)의 마스카리 고살리푸트라(Maskari Goshaliputra) 등이 말하는 자연(spontaneity)설이 제일의제가 될 것입니다. 오직 당신의 대자비를 얻어 저의 미혹과 둔함을 열어 주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도성의 연야달다의 경우와 똑같이, 만약 그의 광기의 성품의 인연이 멸하면, 그의 미치지 않은 성질이 자연히 나온다. 인연과 자연의 이치는 바로 여기서 끝난다. 아난아, 연야달다의 머리는 자연히 그랬고, 근본적으로 자연히 그와 같았다. 그가 아니었던 때는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인연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머리를 두려워하고 미친 듯이 달리게 했느냐? 만약 그의 자연적인 머리가 인연 때문에 미쳤다면, 왜 자연적인 인연 때문에 그것을 잃지 않았느냐? 그의 본래 머리는 잃어버리지 않았고, 광기와 두려움이 허망하게 생겼을 뿐이다. 변화란 있은 적이 없는데, 무슨 인연이 필요하겠느냐? 본래의 광기는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근본적으로 광기와 두려움이 있었다. 그가 미치기 전, 광기는 어디에 숨어 있었느냐? 만약 완전한 비광기가 자연스럽고, 머리에는 근본적으로 허망함이 없었다면, 왜 그는 미친 듯이 달렸느냐? 만약 그가 자신의 본래 머리를 깨달으면, 그는 달리는 것의 광기를 인식한다. 인연과 자연은 둘 다 부질없는 이론(희론)이다.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세 가지 연이 끊어질 때, 그것이 보리심이라고. 보리심이 일어날 때, 생멸하는 마음은 멸한다. 이것은 단지 생멸일 뿐이다. 멸과 생이 모두 다하면, 그것은 공용이 없는 도이다. 만약 자연이 있다면, 자연의 마음이 생기고 생멸하는 마음이 멸하는 것이 분명해야 한다. 이것 또한 생멸이다. 생하고 멸함이 없는 것을 자연이라 이름한다. 그것은 마치 세상의 여러 현상을 섞는 것과 같아서, 그것들을 하나의 몸으로 만드는 것을 화합의 성질이라 부른다. 화합하지 않는 것을 본성이라 부른다. 본성은 성(性)이 아니요, 화합은 합(合)이 아니다. 합과 성은 모두 떠났고, 떠남과 합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구를 희론 없는 법이라 이름한다. 보리와 열반은 아직 멀다. 그것은 겁을 거치며 뼈를 깎는 정진을 통해 검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시방의 항하사 같은 여래들이 설한 십이부경의 청정하고 묘한 이치를 기억하고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너의 부질없는 이론을 도울 뿐이다. 너는 인연과 자연에 대해 논하고 그것들을 명확히 이해하여 세간은 너를 다문제일이라 부르지만, 겁을 넘어 축적된 이 모든 학문과 훈습으로도 너는 마등가(Matangi)의 어려움을 면할 수 없었다. 왜 불정(佛頂)에서 나오는 나의 능엄주를 기다려야 했느냐? 마등가의 마음속 애욕의 불은 갑자기 멈추었고, 그녀는 아나함(Anagamin)의 과위를 얻었다. 나의 법 안에서 그녀는 정진의 숲이 되었고, 사랑의 강은 말라버려 그녀의 해탈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비록 다겁 동안 여래의 비밀하고 묘한 장엄을 기억하고 지녀왔지만, 그것은 하루 동안 무루의 업을 닦아 세간의 미움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 고통에서 멀리 떠나는 것만 못하다. 전직 기녀였던 마등가처럼, 주문의 힘에 의해 그녀의 음욕은 가두어졌다. 법 안에서 그녀의 이름은 이제 비구니 성(Bhikshuni Nature)이다. 그녀와 라후라(Rahula)의 어머니 야수다라(Yashodhara)는 모두 과거의 인을 깨닫고, 여러 생을 통한 탐욕과 사랑이 고통임을 알았다. 한 생각의 무루를 닦는 선근으로 인해, 한 명은 속박으로부터의 해탈을 얻었고, 다른 한 명은 수기를 받았다.”
“어찌 스스로를 속이고 여전히 보고 듣는 것 속에 머물 수 있겠느냐?”
아난과 대중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의심과 당혹감은 사라지고 마음은 실상에 깨어났다. 몸과 마음은 전례 없이 가볍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다시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의 발에 절했다. 합장하고 무릎 꿇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무상의 대자비 청정 보왕께서는 교묘하게 저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당신은 어둠 속에 있는 모든 이를 고통의 바다에서 이끌어내기 위해 그러한 다양한 인연과 방편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이러한 법음을 받고 여래장, 묘각명심이 법계에 두루하여 시방 여래의 국토와 청정하고 보배롭고 엄숙한 각왕의 국토를 포함하고 기르는 것을 알았지만, 여래께서는 다시 학문에는 공덕이 없고 실천에 미치지 못한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저는 이제 천왕으로부터 웅장한 집을 선물로 갑자기 받은 떠돌이 여행자와 같습니다. 대저택을 얻었지만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합니다. 오직 바라옵건대 여래께서는 대자비를 버리지 마시고, 어둠에 덮여 있는 저희 회상의 사람들에게 소승을 버리고 과거의 유위의 심작용을 포착하고 항복받아 다라니를 얻어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가, 저희가 반드시 여래의 무여열반, 본원의 도를 얻는 방법을 보여 주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그는 오체투지했다. 대중은 일심으로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기다렸다.
그때 세존께서는 회상에 있으면서 아직 보리심에 안주하지 못한 연각과 성문들, 그리고 부처님 멸도 뒤 말법 세상에 있으면서 보살도에 마음을 정할 중생들을 불쌍히 여겨, 상승의 묘한 수행의 길을 여셨다. 부처님께서는 아난과 대중에게 선포하셨다. “만약 너희가 결정코 보리를 얻어 부처님 여래의 묘한 삼마지에 피로해하지 않기로 결심한다면, 먼저 깨달음을 향한 초발심에 관한 두 가지 결정적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초발심의 두 가지 결정적인 의미란 무엇인가? 아난아, 첫 번째 의미는 이것이다. 만약 네가 성문의 지위를 버리고 보살승을 닦아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인위(인)의 단계에서의 발심과 과위(과)의 단계에서의 깨달음이 같은지 다른지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아난아, 만약 인위에서 생멸하는 마음을 수행의 기초로 삼아 불생불멸의 불승을 구한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의미 때문에, 너는 세간의 모든 물질적 대상이 변화와 파괴에 종속됨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아난아, 세간을 관찰해라. 어떤 유위법이 썩지 않더냐? 그러나 허공이 썩거나 부패한다는 말은 결코 듣지 못한다. 왜냐? 공은 유위의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파괴나 소멸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너의 몸 안에서 견고한 것은 땅이고, 촉촉한 것은 물이고, 따뜻한 것은 불이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이다. 이 네 가지 속박 때문에, 너의 고요하고 원만하고 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은 견, 문, 각, 지로 나뉜다. 시종 오중의 부정(不浄)이 있다. 부정은 무엇인가? 아난아, 예를 들어 맑은 물은 본래 깨끗하다. 만약 티끌, 흙, 재, 모래가 그 속에 던져지면—그 물질들은 방해물이 되고, 두 물체의 성질은 본래 양립할 수 없다—그리고 만약 세간 사람이 그 흙과 티끌을 집어 맑은 물에 던지면, 흙은 그 막힘을 잃고 물은 그 청정함을 잃는다. 겉모습은 탁한 것이 된다. 이것을 탁함(오탁)이라 부른다. 너의 오중의 탁함도 또한 이와 같다.”
“아난아, 너는 허공이 시방에 두루함을 본다. 공(空)과 견(見)은 나뉘지 않는다. 공은 실체가 없고, 견은 깨달음(覺)이 없다. 그들은 서로 얽혀서 거짓되게 형성된다. 이것이 첫 번째 겹이며, 겁탁(劫濁, Kalpa Turbidity)이라 이름한다. 너의 몸은 지수화풍 사대를 그 실체로 인식하여 나타난다.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이 막혀서 머물게 된다. 물, 불, 바람, 흙이 회전하여 깨달음과 앎을 일으킨다. 그들은 서로 얽혀서 거짓되게 형성된다. 이것이 두 번째 겹이며, 견탁(見濁, Views Turbidity)이라 이름한다. 또한, 너의 마음속에서 기억, 인식, 암송이 자연스럽게 지식과 견해를 내어 육진(六塵)을 받아들인다. 티끌(塵)을 떠나서는 상(相)이 없고, 깨달음을 떠나서는 성품이 없다. 그들은 서로 얽혀서 거짓되게 형성된다. 이것이 세 번째 겹이며, 번뇌탁(煩惱濁, Afflictions Turbidity)이라 이름한다. 또한, 밤낮으로 너의 생멸은 멈추지 않는다. 지식과 견해는 끊임없이 세간에 머물기를 원한다. 업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이주하여 국토에 몸을 받는다. 그들은 서로 얽혀서 거짓되게 형성된다. 이것이 네 번째 겹이며, 중생탁(衆生濁, Living Beings Turbidity)이라 이름한다. 너의 봄(見)과 들음(聞)은 본래 다른 성품이 아니다. 수많은 티끌이 격차를 만들어 설명할 수 없는 차이를 낳는다. 그 성품에서는 서로 알지만, 그 작용에서는 서로 반대된다. 같음과 다름이 그 기준을 잃는다. 그들은 서로 얽혀서 거짓되게 형성된다. 이것이 다섯 번째 겹이며, 명탁(命濁, Life Turbidity)이라 이름한다.”
“아난아, 만약 네가 지금 너의 견, 문, 각, 지를 돌이켜 여래의 상(常), 낙(樂), 아(我), 정(淨)에 계합하고자 한다면, 먼저 생사의 근본을 가려내어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는 원담(圓湛)한 성품을 의지해야 한다. 이 고요함을 사용하여 허망한 생멸을 돌리고, 그것들을 항복받아 본래의 깨달음으로 돌아가, 본래의 밝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불생불멸의 성품을 인지(因地)의 마음으로 삼음으로써 수행의 열매를 검증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깨끗한 그릇에 담긴 흙탕물을 맑게 하는 것과 같다. 고요하고 깊숙이 두어 움직이지 않으면, 모래와 흙이 저절로 가라앉고 더 맑은 물이 나타난다. 이것을 객진번뇌를 처음 항복받았다고 한다. 진흙을 제거하여 오직 맑은 물만 남는 것을 근본무명을 영원히 끊었다고 한다. 밝음의 상(相)이 순수하고 정밀하면, 모든 나타남은 번뇌를 수반하지 않는다. 모두가 열반의 청정하고 묘한 덕에 계합한다.”
“두 번째 결정적인 의미는 이것이다. 만약 네가 확실히 보리심을 내어 보살승에서 큰 용기를 일으키고, 모든 유위의 상을 결정코 버리고자 한다면, 번뇌의 근본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누가 이 시작 없는 업의 창조와 생의 양육을 만들고 누가 견디고 있는가? 아난아, 만약 보리를 닦으면서 번뇌의 근본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허망한 근(根)과 진(塵)의 위치를 알 수 없다. 만약 전도(뒤바뀜)된 위치조차 모른다면, 어떻게 그것을 항복받아 여래의 지위를 얻을 수 있겠느냐? 아난아, 세간에서 매듭을 푸는 사람을 보아라. 만약 그가 매듭이 어디에 있는지 보지 못하면, 어떻게 푸는 법을 알 수 있겠느냐? 그러나 허공이 너에 의해 부서졌다는 말은 결코 듣지 못한다. 왜냐하면 공은 형상이나 모양이 없고, 따라서 맺거나 푸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너의 현재 눈, 귀, 코, 혀, 몸, 뜻은 매개체로 활동하는 여섯 도둑이며, 네 집안의 보물을 훔치고 있다. 이 때문에, 무시이래로 중생은 세계에 묶여 물질세계를 초월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난아, 무엇을 중생세계라 이름하느냐? ‘세(世)‘는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고, ‘계(界)‘는 공간적 위치를 가리킨다. 동, 서, 남, 북, 동남, 서남, 동북, 서북, 상, 하가 계(界)가 됨을 알아야 한다. 과거, 미래, 현재가 세(世)가 된다. 열 가지 공간적 방향과 세 가지 시간의 흐름이 있다. 일체 중생은 허망함이 얽혀서 형성된다. 몸 안에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 작용하고 서로 연루된다. 이 계의 성품은 시방을 고정된 위치로 가지고 있지만, 세간은 오직 동, 서, 남, 북만을 인식한다. 위와 아래는 고정된 위치가 없고, 중간은 고정된 방향이 없다. 4는 그 수를 나타내며, 그것들이 세, 즉 시간과 연루됨은 필연적이다. 3 곱하기 4, 혹은 4 곱하기 3은 회전하여 12가 된다. 흐름은 세 겹으로 변한다: 일, 십, 백, 천이다. 깊이 합계하면, 육근 각각 안에 1,200의 공덕이 있다.”
“아난아, 너는 그들 중의 우열을 검증해야 한다. 예를 들어, 눈은 본다: 뒤는 어둡고 앞은 밝음을 본다. 앞은 완전히 밝지만 뒤는 완전히 어둡다. 옆을 보면 3분의 2가 보인다. 그 작용을 종합적으로 논하면, 그 공덕은 완전하지 않다. 공덕의 3분의 1 안에서, 1분은 덕이 부족하다. 눈은 단지 800 공덕만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귀는 시방을 빠짐없이 듣는다; 움직임이 가깝든 멀든, 듣는 것은 한계가 없다. 이근(귀)은 완전한 1,200 공덕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코는 호흡의 들숨과 날숨을 통해 향기를 맡는다. 나감과 들어옴은 있지만 교차점에서는 부족하다. 이근과 대조해보면 3분의 1이 빠져 있다. 코는 단지 800 공덕만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혀는 모든 세간적 및 출세간적 지혜를 선설한다; 말에는 한계가 있지만 이치는 다함이 없다. 설근(혀)은 완전한 1,200 공덕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몸은 감촉을 느끼며, 순하고 거슬리는 것을 인식한다. 접촉이 있을 때는 느끼지만, 떨어져 있을 때는 아무것도 모른다. 떨어짐은 하나요, 합침은 두 겹이다; 설근과 대조해보면 3분의 1이 빠져 있다. 몸은 단지 800 공덕만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의(뜻)는 잠잠히 시방과 삼세, 모든 세간적 및 출세간적 법을 포함한다. 성인이든 범부든, 그 한계까지 포용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의근(뜻)은 완전한 1,200 공덕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만약 네가 지금 생사의 욕망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흐름의 근원에 돌아가 불생불멸의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면, 이 여섯 가지 수용하는 근(根)을 검증해야 한다. 어느 것이 합(合)이고 어느 것이 이(離)인가? 어느 것이 깊고 어느 것이 얕은가? 어느 것이 원통(완벽하게 통함)하고 어느 것이 원만하지 않은가? 만약 여기서 원통한 근을 깨닫고, 시작 없는 흐름인 얽힌 허망한 업을 뒤집어 원통을 구한다면, 그것과 원만하지 않은 근과의 차이는 수일부터 수 겁의 배수만큼이다. 나는 이제 여섯 가지 청정하고 원만 명(明)을 완전히 드러낸다; 그것들의 본래 공덕의 수는 이와 같다. 너는 어느 것으로 들어갈지 자세히 선택해야 한다; 나는 너를 나아가게 하기 위해 그것을 설명하겠다. 시방의 여래들은 18계 각각을 통해 수행하여 원만한 무상보리를 얻었다; 그들 안에는 우열이 없었다. 그러나 너의 근기는 하열하여 그들 중에서 완전한 자재와 지혜를 얻을 수 없으므로, 나는 네가 한 문을 통해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이것을 선포한다. 만약 허망함 없이 하나로 들어가면, 육근은 단박에 청정해질 것이다.”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흐름을 거슬러 한 문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육근을 단박에 청정하게 합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제 수다원(Srota-apanna)의 과를 얻었다. 너는 삼계 중생의 견혹(견해의 미혹)을 멸했다. 그러나 너는 아직 다생에 걸쳐 근(根)에 축적된 시작 없는 허습(빈 습관)을 모른다. 이 습관들은 수행을 통해 끊어야 한다. 하물며 이 안에 있는 생, 주, 이, 멸의 다양한 분파의 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제 잠정적으로 너의 현재 육근을 관찰해 보라: 그것들은 하나인가 아니면 여섯인가? 아난아, 만약 하나라고 한다면, 왜 귀는 보지 못하는가? 왜 눈은 듣지 못하는가? 왜 머리는 걷지 못하는가? 왜 발은 말하지 못하는가? 만약 이 육근이 결정코 여섯이라면, 내가 지금 이 회상에서 너에게 이 미묘하고 훌륭한 법문을 설할 때, 너의 육근 중 어느 것이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난이 말했다. “저는 귀로 듣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너의 귀가 스스로 듣는다면, 너의 몸과 입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러나 너의 입은 뜻을 묻고, 너의 몸은 공경을 표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하나가 아니지만 마침내 여섯이고, 여섯이 아니지만 마침내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너의 근은 본질적으로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니다. 아난아, 너는 이 근들이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시작 없는 전도와 침몰 때문에, 하나와 여섯의 의미가 원담(완전한 고요함) 안에 생겼다. 비록 네가 수다원으로서 육해(여섯 가지 풀림)를 얻었지만, 아직 하나를 잊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허공이 여러 그릇에 담기는 것과 같다. 그릇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공은 다르게 이름 붙여진다. 만약 그릇을 치우고 공을 관찰하면, 공은 하나라고 말한다. 어찌 그 대허공이 너를 위해 같게 되거나 다르게 되겠느냐? 하물며 그것을 하나라거나 하나가 아니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 여섯 가지 수용하는 근도 또한 이와 같음을 이해해야 한다.”
“명과 암, 두 가지 상이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견(보는 것)은 고요함에 점착하여 묘원(묘한 원만함) 안에 나타난다. 견의 정수는 색을 비추고 색을 맺어 근이 된다. 이 근은 근본적으로 청정 사대라 이름한다. 그리하여 안신(눈)이라 이름하며, 포도송이처럼 보인다. 부근과 사진은 밖으로 흘러나가 색을 쫓는다. 동과 정, 두 가지 상이 부딪치기 때문에, 문(듣는 것)은 고요함에 점착하여 묘원 안에 나타난다. 문의 정수는 소리를 비추고 소리를 말아서 근이 된다. 이 근은 근본적으로 청정 사대라 이름한다. 그리하여 이신(귀)이라 이름하며, 신선한 말린 잎처럼 보인다. 부근과 사진은 밖으로 흘러나가 소리를 쫓는다. 통과 색, 두 가지 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후(냄새 맡는 것)는 고요함에 점착하여 묘원 안에 나타난다. 후의 정수는 향기를 비추고 향기를 받아들여 근이 된다. 이 근은 근본적으로 청정 사대라 이름한다. 그리하여 비신(코)이라 이름하며, 이중으로 늘어진 발톱처럼 보인다. 부근과 사진은 밖으로 흘러나가 향기를 쫓는다. 담과 변(다양함), 두 가지 상이 섞이기 때문에, 미(맛보다)는 고요함에 점착하여 묘원 안에 나타난다. 미의 정수는 맛을 비추고 맛을 비틀어 근이 된다. 이 근은 근본적으로 청정 사대라 이름한다. 그리하여 설신(혀)이라 이름하며, 초승달처럼 보인다. 부근과 사진은 밖으로 흘러나가 맛을 쫓는다. 이와 합, 두 가지 상이 마찰하기 때문에, 각(느끼다)은 고요함에 점착하여 묘원 안에 나타난다. 각의 정수는 촉을 비추고 촉을 모아 근이 된다. 이 근은 근본적으로 청정 사대라 이름한다. 그리하여 신(몸)이라 이름하며, 북의 소리를 흡수하는 부분처럼 보인다. 부근과 사진은 밖으로 흘러나가 촉을 쫓는다. 생과 멸, 두 가지 상이 계속되기 때문에, 지(알다)는 고요함에 점착하여 묘원 안에 나타난다. 지의 정수는 법을 비추고 법을 붙잡아 근이 된다. 이 근은 근본적으로 청정 사대라 이름한다. 그리하여 의사(뜻)라 이름하며, 어두운 방에서 보는 것과 같이 보인다. 부근과 사진은 밖으로 흘러나가 법을 쫓는다.”
“아난아, 육근은 이와 같다. 그 깨닫는 밝음 때문에 밝음과 깨닫는 앎이 있다. 그 본질적인 이해를 잃으면, 그것은 허망함에 점착하여 빛을 발한다. 그러므로 어둠과 밝음을 떠나서는, 너는 지금 보는 실체가 없다. 움직임과 고요함을 떠나서는, 근본적으로 듣는 성질이 없다. 통함과 막힘이 없으면, 냄새 맡는 성품은 생기지 않는다. 다양함과 담백함이 없으면, 맛보는 것은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 떨어짐과 합침이 없으면, 닿는 느낌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멸함과 생함이 없으면, 이해하는 앎은 쉴 곳이 없다. 너는 단지 동, 정, 합, 이, 담, 변, 색, 통, 생, 멸, 명, 암이라는 열두 가지 유위의 상을 따르지 않으면 된다. 그에 따라 한 근을 뽑아내어 점착에서 떼어내고, 안으로 항복받아라. 그것을 항복받아 본래의 진실과 불필요한 밝음으로 돌아가라. 명성(밝은 성품)이 나타날 때, 나머지 다섯 가지 점착은 뽑히고 완전히 분리될 것이다. 지식과 견해는 외부의 감각 대상에서 생기지 않을 것이다. 밝음은 근을 따르지 않고 근에 의지하여 나타난다. 이로써 육근은 호환하여 사용될 수 있다.”
“아난아, 너는 모르느냐? 지금 이 회상에서 아니루따(Aniruddha)는 눈 없이 본다. 용 우파난타(Upananda)는 귀 없이 듣는다. 강가(Ganges)의 신은 코 없이 향기를 맡는다. 가범바제(Gavampati)는 기이한 혀로 맛을 본다. 순약다(Shunyata) 신은 몸이 없는데도 감촉을 느낀다. 여래의 빛이 비추어 그들을 일시적으로 나타나게 한다. 그들은 바람의 성질이기 때문에 그 실체는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멸진정에 든 자들은 성문의 고요함을 얻는다. 이 회상의 마하가섭(Mahakasyapa)처럼, 그는 오래전에 의근을 멸했지만 정신적 사고에 의존하지 않는 원만하고 밝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아난아, 만약 너의 모든 근이 완전히 뽑혀 안으로 빛을 발한다면, 떠다니는 티끌과 물질세계, 모든 변화하는 모습은 뜨거운 물에 얼음이 녹는 것과 같을 것이다. 생각에 응하여, 그것들은 무상의 앎과 깨달음으로 변할 것이다.”
“아난아, 그것은 마치 세간 사람들이 보는 것을 눈에 모으는 것과 같다. 만약 그들에게 갑자기 눈을 감게 하면, 어두운 모습이 나타난다. 육근은 어둡고 혼동한다. 머리와 발이 똑같이 보인다. 만약 그 사람이 손으로 자신의 몸을 더듬으면, 보지 않아도 머리와 발을 구별할 수 있다. 앎과 깨달음은 동일하다. 보는 것은 밝음에 의존하기 때문에, 어둠은 봄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해는 저절로 나타난다; 어둠의 모습은 그것을 가릴 수 없다. 일단 근과 티끌이 해소되면, 어찌 각명(깨닫는 밝음)이 원만하고 묘하게 되지 않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만약 인지(因地)의 마음이 영원한 머묾을 구한다면, 마땅히 과지(果地)의 명칭과 의미에 상응해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과지의 보리, 열반, 진여, 불성, 아마라식(Amala Consciousness, 무구식), 공여래장, 대원경지—비록 이 일곱 가지 이름은 다르지만, 그 청정하고 원만한 본성은 견고하고 응축되어 있어, 마치 금강왕(Diamond King)과 같이 항상 머물며 파괴되지 않습니다. 만약 이 보고 들음이 명(밝음)과 암(어둠), 동(움직임)과 정(고요함), 통(트임)과 색(막힘)을 떠나서 궁극적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마치 외부의 감각 대상을 떠난 정신적 생각이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면, 어떻게 이 궁극적인 단멸(끊어짐)을 수행의 원인으로 삼아 여래의 일곱 가지 상주하는 과지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만약 봄(見)이 명과 암을 떠난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공(空)입니다. 전경(앞의 대상)이 없으면, 생각의 자성이 소멸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고 가며, 순환하고 면밀히 찾아보아도, 근본적으로 ‘나’도 없고, 나의 마음도 없고, 나의 정신 상태도 없습니다. 무상각(위없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무엇을 원인으로 세워야 합니까? 여래께서는 이전에 담 연한(고요한) 본질은 원만하고 상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진실한 말씀에 위배되는 것은 결국 희론(쓸모없는 이론)이 되고 맙니다. 어떻게 여래가 진실을 말하는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원하옵건대 대자비를 베푸시어 저의 어리석음과 막힘을 열어 주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많이 배웠으나 아직 루(번뇌)를 다하지 못했다. 마음속으로는 전도(뒤바뀜)의 원인을 알 뿐, 전도가 나타날 때 참으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너의 진실한 마음이 아직 믿음과 복종을 갖지 못했을까 두렵구나. 내가 이제 세간의 일을 들어 너의 의심을 없애주겠다.” 즉시 여래께서는 라후라(Rahula)에게 종을 한 번 치라고 명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물으셨다. “지금 들리느냐?”
아난과 대중이 모두 말했다. “들립니다.”
종소리가 그치고 소리가 없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지금 들리느냐?”
아난과 대중이 모두 말했다. “들리지 않습니다.”
그때, 라후라가 다시 종을 쳤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지금 들리느냐?”
아난과 대중이 다시 들린다고 말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왜 들리고, 왜 들리지 않느냐?”
아난과 대중이 모두 부처님께 말했다. “만약 종을 치면, 우리는 듣습니다. 만약 쳐서 소리가 그치고, 여운이 끝나면,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래께서는 다시 라후라에게 종을 치라고 명하시고, 아난에게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있느냐?”
아난이 말했다. “소리가 있습니다.”
잠시 후, 소리가 그쳤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있느냐?”
아난과 대중이 대답했다. “소리가 없습니다.”
잠시 후, 라후라가 다시 와서 종을 쳤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있느냐?”
아난과 대중이 모두 말했다. “소리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왜 소리가 있고, 왜 소리가 없느냐?”
아난과 대중이 모두 부처님께 말했다. “만약 종을 치면, 우리는 소리가 있다고 합니다. 만약 쳐서 소리가 그치고, 여운이 끝나면, 소리가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과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왜 너희는 지금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게 말하느냐?”
대중과 아난이 동시에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저희가 지금 혼란스럽고 무질서하다고 불립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들음(聞)에 대해 물었을 때, 너희는 들린다고 했다. 내가 너희에게 소리(聲)에 대해 물었을 때, 너희는 소리가 있다고 했다. 너희는 들음과 소리에 대해 정의 없이 대답하고 있다. 어찌 이것을 혼란과 무질서라 이름하지 않겠느냐? 아난아, 소리가 그치고 메아리가 없을 때, 너는 들음이 없다(無聞)고 말한다. 만약 참으로 들음이 없다면, 듣는 성품(聞性)은 마른 나무처럼 소멸했을 것이다. 종을 다시 칠 때, 어떻게 아느냐? 있다고 알고 없다고 아는 것은 성진(소리의 대상)에 속한다. 혹은 ‘없음’, 혹은 ‘있음’; 어찌 그 듣는 성품이 너를 위해 ‘있음’이 되거나 ‘없음’이 되겠느냐? 만약 들음이 참으로 없다면, 누가 없다는 것을 알겠느냐? 그러므로 아난아, 소리는 자연히 들음 안에서 생하고 멸한다. 너의 들음이 소리와 함께 생하고 멸하여, 너의 듣는 성품을 존재하게 하거나 존재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여전히 전도되어, 소리를 잘못 듣는 것(聞)으로 여기고 있다. 네가 혼란스러워하고 미혹하여, 상주하는 것을 끊어진 것으로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너는 단지 동과 정, 색(막힘)과 통(트임)을 떠나서, 들음에 자성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침대에서 깊이 잠든 사람과 같다. 그 집안의 누군가가 그가 잠든 사이에 비단을 다듬질하거나 쌀을 찧고 있다. 꿈속에서, 그 사람은 찧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다른 것, 아마도 북을 치거나 종을 치는 소리로 착각한다. 꿈속에서 그는 왜 종이 나무나 돌 같은 소리를 내는지 의아해한다. 갑자기 그가 깨어나 절굿공이 소리임을 인식한다. 그는 가족에게 말한다. ‘내가 꿈을 꾸는 동안, 이 찧는 소리를 북소리로 착각했어.’ 아난아, 이 꿈속의 사람이 어떻게 정과 동, 열림과 닫힘, 통함과 막힘을 기억할 수 있었겠느냐? 비록 그의 형상(육체)은 잠들었지만, 그의 듣는 성품은 어둡지 않았다. 설령 너의 형상이 녹아 없어지고 너의 생명의 불빛이 옮겨가더라도, 어떻게 이 성품이 너를 위해 소멸하겠느냐?”
“일체 중생이 무시이래로 색(형상)과 소리를 따르고, 생각을 쫓아 흘러 다녔기 때문에, 청정하고 묘하며 상주하는 성품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 상주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생멸을 쫓는다. 이로써 그들은 거듭 태어나고, 더러움 속에서 흐른다. 만약 네가 생멸을 버리고 참된 상주를 지킨다면, 상주하는 빛이 나타날 것이다. 감각 기관(근), 대상(진), 식은 즉시 사라질 것이다. 생각과 형상은 티끌(진)이요, 감정과 식은 때(구)이다. 둘 다 멀리 여의라. 그러면 너의 법안(Dharma Eye)이 그에 따라 작용하여 맑고 밝아질 것이다. 어찌 무상지각(위없는 앎과 깨달음)을 얻지 못하겠느냐?”
현대어 번역 능엄경 제4권
그때, 부루나미다라니자(Purana Maitrayaniputra)가 대중 가운데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 공경하며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장엄한 불당에서 많은 수행자가 조용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 갑자기 부루나라는 제자가 일어섰다. 그는 공손히 땅에 무릎을 꿇고 합장하며 부처님께 말했다.
“대덕이신 세존이시여, 당신께서는 중생을 위해 여래의 제일의제(궁극적 진리)를 웅변으로 설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자주 저를 설법하는 자 중에 으뜸(설법제일)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오늘, 여래의 미묘하고 훌륭한 법음을 듣는 것은 마치 귀머거리가 백 보 밖에서 모기 소리를 들으려는 것과 같아서, 본래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듣겠습니까? 부처님의 명쾌한 선포는 저에게 미혹을 없애라고 명하시지만, 저는 아직 의심 없는 지점까지 궁극적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과 같은 이들은 비록 어느 정도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들의 습기와 루(번뇌)는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대중 가운데 무루의 단계에 도달한 우리조차도, 모든 루를 다하였음에도 여래의 법음을 듣고 여전히 의심과 후회를 품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세간의 감각 기관, 감각 대상, 온, 처, 계가 본래 청정한 여래장이라면, 어찌하여 산, 강, 대지가 갑자기 생겨나고, 모든 유위의 현상이 잇달아 흐르며, 끝나고 다시 시작합니까? 또한, 여래께서는 지, 수, 화, 풍의 성품이 원만하게 융합되어 법계에 두루하고 고요하며 상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지의 성품이 두루하다면, 어떻게 물을 포용할 수 있습니까? 만약 수의 성품이 두루하다면, 불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만약 물과 불의 성품이 모두 허공에 두루하다면, 서로 멸해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지의 성품은 막는 성질이고 공의 성품은 통하는 성질인데, 어떻게 둘 다 법계에 두루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 뜻이 어디로 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직 원하옵건대 여래께서 대자비를 쏟으시어 저와 대중을 위해 미혹의 구름을 열어 주소서.”
“존경하는 부처님, 당신은 항상 가장 심오한 지혜로 저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일찍이 저를 설법제일이라고 칭찬하셨지만, 지금 당신의 가르침을 들으니 마치 귀머거리가 멀리서 모기 소리를 들으려는 것 같아 지극히 어렵습니다. 당신께서 매우 명확하게 설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많은 의심이 있습니다.”
부루나는 계속했다. “아난과 같이, 그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아직 제거되지 않은 습관들이 있습니다. 무루의 경지에 도달한 저희는 모든 번뇌를 제거했지만, 당신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도 여전히 혼란스럽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물었다. “부처님, 만약 세상 만물이 본래 청정하다면, 왜 산, 강, 대지와 같은 유형의 사물들이 갑자기 나타납니까? 왜 그것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끝없이 소멸합니까? 당신은 지, 수, 화, 풍 사대가 본래 원만하게 융합되어 온 세상에 두루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만약 흙(地)의 성질이 어디에나 있다면, 어떻게 물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만약 물의 성질이 어디에나 있다면, 어떻게 불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물과 불은 동시에 허공에 두루합니다. 왜 서로 파괴하지 않습니까? 흙의 성질은 막히는 것이고, 공의 성질은 통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들이 동시에 온 세상에 두루할 수 있습니까? 저는 정말 이 이치들을 모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자비롭게 저희를 위해 이 의심들에 대답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 말을 마치고, 그는 오체투지하여 여래의 위없는 자비로운 가르침을 간절히 기다렸다.
이 말을 한 후, 부루나는 공손히 땅에 엎드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기를 갈망했다.
그때, 세존께서 부루나와 회상에 있는 모든 루를 다하여 무학이 된 아라한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이 대중을 위하여, 여래가 제일의제(승의제) 가운데 제일의제를 선포하리라. 회상에 있는 정성성문(결정된 성품의 성문)들과, 이공(아공, 법공)을 아직 얻지 못했지만 스스로를 최상승(대승)으로 향하고 있는 모든 이들과, 아라한들로 하여금 일승의 적멸의 장소, 참된 아란야(고요한 수행처), 바른 수행처를 얻게 하리라. 지금 주의 깊게 들어라. 너희를 위해 설명하리라.”
이때 부처님께서 부루나와 참석한 모든 수행자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나는 모두에게 가장 뛰어난 진리를 설명하겠다. 이것은 너희 모두, 이미 어떤 경지에 도달한 수행자이든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자이든, 궁극적인 평온의 장소에 도달하도록 도울 것이다. 자, 내 설명을 주의 깊게 들어라.”
부루나 등은 공경히 부처님의 법음을 기다리며 조용히 들었다.
부루나와 다른 제자들은 공손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며 조용히 있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루나야, 네가 말한 것처럼 만물은 청정하고 근원적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산, 강, 대지가 갑자기 생겨나느냐? 너는 여래가 ‘각의 성품(각성)은 묘명하고, 본각은 명묘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느냐?”
부처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셨다. “부루나야, 너는 물었다. 만약 모든 것이 본래 청정하다면, 왜 산, 강, 대지가 갑자기 나타나는가 하고. 내가 ‘각성은 묘명하고, 본각은 명묘하다’고 자주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자주 부처님께서 이 뜻을 선포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루나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당신께서 이 이치를 설명하시는 것을 자주 듣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각(깨달음)과 명(밝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품이 밝아서 각이라 부르느냐, 아니면 각은 본래 밝지 않아서 명각이라 부르느냐?”
부처님께서 계속해서 물으셨다.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각명(Jue Ming)‘이란, 본성이 밝은 깨달음이라는 뜻이냐, 아니면 깨달음 자체는 밝지 않아서 깨달음을 묘사하기 위해 밝음이 필요하다는 뜻이냐?”
부루나가 말했다. “만약 이 밝음의 결여가 각이라 불린다면, 무명은 없을 것입니다.”
부루나가 잠시 생각하고 대답했다. “만약 밝지 않은 것이 각이라 불린다면, 무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명이 없다면 명각은 없다. 만약 엄밀히 각이 아닌 것이 있다면, 밝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나 무명은 명료한 각의 성질이 아니다. 각의 성품은 필연적으로 밝지만, 잘못하여 명각이 된다. 각은 이해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명 때문에 대상(소)이 확립된다. 일단 대상이 허망하게 확립되면, 너의 허망한 주체(능)가 생긴다.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것 안에, 격렬한 차이가 확립된다. 그 다른(차이) 것과 다르기 때문에, 차이로 인해 같음(동일성)이 확립된다. 같음과 다름이 명확히 확립되면, 이어서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것이 확립된다. 그러한 소란은 서로 피로(로)를 낳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피로는 티끌(진)을 낳고, 스스로를 가리고 스스로를 흐리게 한다. 이로부터 진과 로의 번뇌가 일으켜진다. 일어나면 세계가 되고, 고요하면 허공이 된다. 허공은 같음이고, 세계는 다름이다.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것이 참된 유위법이다.”
부처님께서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하셨다. “만약 이해되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명각은 없다. 대상을 가지는 것은 참된 깨달음이 아니며, 대상을 가지지 않는 것이 참된 밝음이다. 무명 또한 깨달음의 본질이 아니다. 본성의 깨달음은 필연적으로 밝지만, 우리는 잘못하여 밝음이 깨달음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참된 깨달음은 대상을 가지지 않아야 하지만, 밝음 때문에 대상이 생성된다. 대상이 있으면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이 생성된다. 같음과 다름이 없는 곳에 갑자기 차이가 생긴다. 차이 때문에 같음의 개념이 확립된다. 일단 같음과 다름의 개념이 형성되면,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는 개념이 생성된다.”
부처님께서 계속하셨다. “이러한 혼란은 상호 의존 관계를 낳는다.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티끌이 생겨나 모든 것을 흐리게 한다. 이것이 번뇌의 기원이다. 동적인 것은 세계가 되고, 정적인 것은 허공이 된다. 허공은 같음을 나타내고, 세계는 다름을 나타낸다. 그리고 참된 실재는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 이것이 참된 현상이다.”
「깨달음이 허공을 어둡게 하고, 서로 작용하여 요동이 됩니다. 그리하여 세계를 붙드는 풍륜(風輪)이 있게 됩니다. 허공으로 인해 요동이 생기고, 견固한 밝음이 장애를 성립시킵니다. 금속과 보배는 밝은 깨달음이 견고해져 성립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땅을 지탱하는 금륜(金輪)이 있게 됩니다. 견고한 깨달음은 보배로운 금속이 되고, 요동하는 밝음은 바람을 일으킵니다. 바람과 금속이 서로 마찰하여 변화의 성질인 불빛이 생깁니다. 보배로운 밝음은 습기를 생성하고, 불빛은 위로 증발합니다. 그리하여 시방세계를 담는 수륜(水輪)이 있게 됩니다. 불은 오르고 물은 내려가며, 그 상호작용이 견고함을 성립시킵니다. 젖은 것은 큰 바다가 되고, 마른 것은 대륙과 섬이 됩니다. 이러한 뜻 때문에 불빛은 항상 큰 바다에서 솟아오르고, 강물은 항상 대륙으로 쏟아집니다. 물의 힘이 불보다 약한 곳에서는 맺혀서 높은 산이 됩니다. 그러므로 산의 바위를 치면 불꽃이 튀고, 녹이면 액체가 됩니다. 흙의 힘이 물보다 약한 곳에서는 식물로 추출됩니다. 그러므로 숲이 타면 재가 되고, 짜내면 물이 나옵니다. 서로 작용하는 허망한 발생이 서로 씨앗이 됩니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세계가 계속됩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설명하셨습니다. 「깨달음과 밝음이 서로 대립할 때 요동하는 작용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람이 되어 세계를 지탱합니다. 허공이 요동을 낳기 때문에, 견고함과 밝음이 장애를 만듭니다. 금속과 보석은 밝은 깨달음이 견고해진 결과입니다. 그래서 대지를 보호하는 금륜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하셨습니다. 「견고한 깨달음이 보배로운 물체가 될 때, 요동하는 밝음은 바람이 됩니다. 바람과 금속 사이의 마찰은 변화의 본질인 불빛을 만듭니다. 보배로운 물체의 광택은 습기를 만들고, 불빛은 위로 증발하여 시방세계를 담는 물이 있게 됩니다. 불은 오르고 물은 내려가며, 그들의 상호작용이 견고한 사물을 형성합니다. 젖은 것은 바다가 되고, 마른 것은 육지가 됩니다.」
그분은 계속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이 불빛이 항상 바다에 나타나고, 강이 항상 육지 위를 흐르는 이유입니다. 물의 힘이 불만큼 크지 않아서 높은 산이 형성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을 치면 불꽃이 생기고, 녹이면 물로 변합니다. 흙의 힘이 물만큼 크지 않아서 식물이 자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숲을 태우면 흙으로 변하고, 쥐어짜면 물이 나옵니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상호 작용하여 서로의 뿌리가 됩니다. 이것이 세계가 끝없이 계속되는 이유입니다.」
「또한 부루나야, 밝음의 잘못은 다름 아닌 깨달음이 대상이 되는 허물이다. 일단 거짓 대상이 성립되면 밝음의 원리는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듣는 것은 소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보는 것은 형색을 넘어서지 못한다. 색, 성, 향, 미, 촉—여섯 가지 허망함이 이루어진다. 이로부터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이 나누어진다. 비슷한 업이 서로 묶이고, 결합과 분리가 변화를 가져온다. 봄(見)이 밝음을 만날 때 형색이 생겨나고, 밝은 봄이 생각을 만든다. 서로 다른 견해는 미움을 만들고, 같은 것을 보는 것은 사랑을 만든다. 흐르는 사랑은 씨앗이 되고, 받아들이는 생각은 태(胎)가 된다. 교접이 일어나 비슷한 업을 끌어당긴다. 그리하여 인연이 갈라람(kalala), 알부담(arbuda) 등을 낳는다. 태생, 난생, 습생, 화생은 그 상응함을 따른다. 알은 생각에서 태어나고, 태는 감정에서 생긴다. 습생은 결합을 통해 감지되고, 화생은 분리를 통해 반응한다. 감정, 생각, 결합, 분리가 서로 변하고 바뀐다. 모든 받아들인 업은 그 오르내림을 따른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중생이 계속된다.」
부처님께서는 부루나를 향해 계속하셨습니다. 「또한 부루나야, 밝음의 오류는 다름 아니라 깨달음의 밝음으로 인한 것이다. 일단 잘못된 인식이 확립되면, 올바른 원리는 그것을 초월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귀는 소리 너머의 것을 들을 수 없고, 눈은 색깔 너머의 것을 볼 수 없다. 색, 냄새, 맛, 감촉 등 여섯 가지 잘못된 인식이 이렇게 형성된다.」
「이것이 시각과 청각 같은 지각을 낳는다. 비슷한 업들이 서로 얽히고, 모임과 흩어짐이 변화를 낳는다. 밝음을 보는 것이 색깔을 낳고, 밝은 시각이 상상을 형성한다. 서로 다른 시각은 미움을 낳고, 같은 상상은 사랑을 낳는다. 사랑은 흘러서 씨앗이 되고, 상상은 받아들여져 태아가 된다.」
부처님께서는 결론지으셨습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생명을 낳고 비슷한 업을 끌어당긴다. 따라서 인연으로 인해 다양한 생명체가 생겨난다.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은 모두 각각의 조건에 따라 생겨난다. 알은 단지 상상만 있으면 생겨나고, 태는 형성되는 데 감정이 필요하다. 습생은 접촉의 감각이 필요하고, 화생은 분리의 반응이 필요하다. 감정과 상상의 모임과 흩어짐은 끊임없이 서로 변한다. 경험한 업이 생명의 오르내림을 결정한다. 이것이 중생이 끝없이 계속되는 이유이다.」
「부루나야, 생각과 사랑이 서로 묶여서 사랑이 분리될 수 없다. 그리하여 세상의 부모와 자식이 끊임없이 서로를 낳는다. 이것들은 욕망과 탐욕에 근거한다. 탐욕과 사랑이 서로를 기르니 탐욕은 멈출 수 없다. 그리하여 세상의 네 가지 태어남—난생, 태생, 습생, 화생—이 그 힘에 따라 서로를 삼킨다. 이것들은 살생과 탐욕에 근거한다. 사람이 양을 먹고, 양이 죽어 사람이 되고, 사람이 죽어 양이 된다. 이와 같이 십종의 생류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태어나고 죽을 때마다 서로를 잡아먹는다. 악업이 그들과 함께 태어나 미래의 끝까지 다한다. 이것들은 도둑질과 탐욕에 근거한다. 네가 내 목숨을 빚졌으니, 내가 네게 빚을 갚는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우리는 수십만 겁을 끊임없는 생사를 겪으며 지나간다. 너는 내 마음을 사랑하고, 나는 너의 형색을 흠모한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우리는 수십만 겁을 끊임없는 얽힘 속에 지나간다. 살생, 도둑질, 음욕은 세 가지 뿌리이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업의 과보가 계속된다.」
부처님께서는 부루나에게 계속 설명하셨습니다. 「부루나야, 상상과 사랑이 서로 묶이면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이 세상의 부모와 자식이 끝없이 서로를 낳는 이유이다. 이 현상의 근본 원인은 욕망과 탐욕이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하셨습니다. 「탐욕과 사랑이 서로를기를 때, 탐욕은 멈출 수 없다. 이것이 세상에서 알, 태, 습기, 변화로 태어난 생명체들이 힘에 따라 서로를 잡아먹는 이유이다. 이 현상의 근본 원인은 살생과 탐욕이다.」
부처님께서는 예를 드셨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양을 먹는다. 양이 죽은 후에는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고, 사람이 죽은 후에는 양으로 태어날 수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생명체는 생사의 순환을 통해 서로를 잡아먹는다. 이 악업은 끝없이 계속된다. 이 현상의 근본 원인은 도둑질과 탐욕이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설명하셨습니다. 「네가 내 목숨을 앗아갔으니, 나는 빚을 거두어야 한다. 이 이유 때문에 중생은 수십만 겁 동안 생사를 겪는다. 너는 내 마음을 사랑하고, 나는 네 외모를 가엾게 여긴다. 이 이유 때문에 중생은 수십만 겁 동안 얽혀 있다. 살생, 도둑질, 음욕—이 세 가지 행동이 모든 것의 뿌리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업의 결과가 끝없이 계속된다.」
「부루나야, 이 세 가지 뒤바뀜이 계속된다. 그것들은 모두 밝은 깨달음과 아는 성품을 이해하는 데서 생긴다. 이해 때문에 겉모습이 구성된다. 그것들은 거짓된 봄(見)에서 태어난다. 산, 강, 대지, 모든 조건 지어진 겉모습들이 잇따라 흐른다. 이 허망함 때문에 그것들은 끝나고 다시 시작한다.」
부처님께서는 결론지으셨습니다. 「부루나야, 이 세 가지 뒤바뀜의 지속은 모두 깨달음에 대한 밝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이해 때문에 겉모습이 생겨나고, 거짓된 견해에서 태어난다. 산, 강, 대지—모든 유형의 것들—은 잇따라 변한다. 바로 이 허망함 때문에 끝남과 다시 시작함의 순환이 있다.」
부루나가 말했습니다. 「만약 이 묘한 깨달음이 본래 묘하고 깨어있는 밝음이며, 여래의 마음에서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갑자기 산, 강, 대지, 그리고 모든 조건 지어진 겉모습들을 일으킵니까? 이제 여래께서 묘하고 공하며 밝은 깨달음을 얻으셨는데, 언제 산, 강, 대지, 그리고 조건 지어진 유루(有漏)의 축적이 다시 생겨나겠습니까?」
부처님의 설명을 들은 후, 부루나는 새로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만약 이 묘한 깨달음이 원래 원만하고 부처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면, 왜 산, 강, 대지가 갑자기 나타납니까? 부처님께서 이미 묘하고 공하며 밝은 깨달음을 얻으셨는데, 왜 이러한 세상의 현상들이 다시 나타납니까?」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을에서 남쪽을 북쪽으로 착각하여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혼란은 혼란의 결과인가, 아니면 깨어남에서 생기는가?」
부처님께서는 미소 지으며 대답하셨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주겠다. 마을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남쪽을 북쪽으로 착각한다고 가정해 보자. 너는 이 혼란이 혼란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깨어남 때문에 사라진다고 생각하느냐?」
부루나가 말했습니다. 「그러한 혼란스러운 사람은 혼란 때문도 아니고 깨어남 때문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혼란은 근본적으로 뿌리가 없는데 어떻게 원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깨어남은 혼란을 만들지 않는데 어떻게 원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부루나는 잠시 생각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혼란은 혼란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깨어남 때문에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혼란은 뿌리가 없는데, 어떻게 혼란에 의해 야기될 수 있겠습니까? 깨어남은 혼란을 만들지 않는데, 어떻게 깨어남 때문에 사라질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 혼란스러운 사람이 혼란 속에 있을 때 갑자기 깨어있는 사람이 길을 가리켜 준다면, 부루나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이 사람이 혼란을 잃는다면, 그가 이 마을에서 다시 혼란스러워지겠느냐?」
부처님께서는 찬성하며 끄덕이셨습니다. 「잘 말했다. 그러니, 만약 이 길 잃은 사람이 혼란 속에 있는데, 갑자기 이해하는 사람이 그에게 지적해 주어 그를 깨운다면. 부루나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한때 길을 잃었다 해도, 이 마을에서 다시 길을 잃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루나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루나야, 시방의 여래들도 또한 이와 같다. 이 혼란은 뿌리가 없으며, 그 성품은 궁극적으로 공(空)하다. 과거에는 근본적으로 혼란이 없었고, 혼란과 깨어남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혼란을 깨달을 때 혼란은 소멸하며, 깨어남은 혼란을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백내장이 있는 사람이 허공에서 꽃을 보는 것과 같다. 만약 백내장이 제거되면, 꽃은 허공으로 사라진다. 만약 갑자기 어리석은 사람이 꽃이 사라진 빈 곳에서 꽃이 다시 자라기를 기다린다면, 너는 이 사람을 어리석다고 여기겠느냐, 지혜롭다고 여기겠느냐?」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시방의 부처님들도 또한 이와 같다. 이 혼란은 근본적으로 뿌리가 없으며, 그 본질은 공하다. 원래 혼란은 없었고, 단지 혼란과 깨어남의 겉모습만 있었다. 일단 혼란에서 깨어나면 혼란은 사라지고, 깨어남은 다시 혼란을 만들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다른 예를 드셨습니다. 「눈병이 있는 사람이 허공에서 꽃을 보는 것과 같다. 눈병이 치료되면 허공의 꽃은 사라진다. 만약 어리석은 사람이 꽃이 사라진 곳에서 그것들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린다면, 너는 이 사람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멍청하다고 생각하느냐?」
부루나가 말했습니다.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으며, 거짓된 봄이 생겨남과 사라짐을 만듭니다. 꽃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은 이미 뒤바뀜입니다. 그것들에게 다시 나타나라고 명령하는 것은 참으로 광기이자 어리석음입니다. 그러한 미친 사람을 어떻게 어리석다거나 지혜롭다고 이름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비유를 듣고 부루나는 문득 깨닫고 말했습니다. 「애초에 하늘에는 꽃이 없었습니다. 거짓된 시각이 생겨남과 사라짐의 겉모습을 야기했습니다. 꽃이 하늘로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은 이미 뒤바뀐 생각인데, 그것들이 다시 나타나기를 요구하는 것은 참으로 미친 짓입니다. 그러한 미친 사람이 똑똑한지 멍청한지 어떻게 논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설명한 대로라면, 너는 왜 부처님들과 여래들의 묘하고 밝으며 공한 깨달음이 다시 산, 강, 대지를 만들어낼지 묻느냐? 그것은 금광석이 정제된 금과 섞여 있는 것과 같다. 일단 금이 순수해지면 다시 섞이지 않는다. 나무가 재가 되는 것과 같이, 다시 나무가 되지 않는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들의 보리와 열반도 또한 이와 같다.」
부처님께서는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 원리를 이해 하는데, 왜 부처님들의 묘하고 깨어있는 밝은 공함이 다시 산, 강, 대지를 만들어낼지 묻느냐? 이것은 금광석에서 추출된 순금과 같다. 일단 추출되면 다시 불순물로 변하지 않는다. 혹은 나무가 타서 재가 된 것과 같다. 그것은 다시 나무로 변하지 않는다. 부처님들과 여래들의 보리와 열반도 또한 이와 같다.」
「부루나야, 너는 또한 지, 수, 화, 풍의 성질이 완벽하게 융합되어 법계에 두루함에 대해 물었고, 물과 불의 맥락이 서로 파괴하지 않는 것을 의심하였다. 너는 또한 허공과 대지가 둘 다 법계에 두루하면서 어떻게 충돌하지 않는지 물었다. 부루나야, 예를 들어 허공의 실체는 형색의 집합이 아니지만, 다양한 형색의 현현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것은 왜인가? 부루나야, 그 큰 허공 속에는 태양이 비칠 때 밝음이 있고, 구름이 모일 때 어둠이 있으며, 바람이 불 때 움직임이 있고, 하늘이 갤 때 맑음이 있으며, 안개가 모일 때 탁함이 있고, 먼지가 쌓일 때 흐릿함이 있으며, 물이 고요할 때 반사가 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른 장소에 있는 이러한 조건 지어진 겉모습들은 그 조건들에서 생겨나느냐, 아니면 허공에서 생겨나느냐? 만약 그것들이 그 조건들에서 생겨난다면, 부루나야, 태양이 비칠 때는 밝은데, 시방세계는 같은 태양색이다. 어떻게 하늘에서 둥근 태양을 볼 수 있느냐? 만약 그것이 허공의 밝음이라면, 허공은 스스로 빛나야 한다. 왜 구름과 안개가 있을 때 한밤중에는 빛이 없느냐?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밝음은 태양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지만, 허공이나 태양과 다르지도 않다. 겉모습은 본래 거짓이며 실재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음을 관찰하라. 허공의 꽃을 응시하는 것이 허공의 열매를 만드는 것과 같다. 왜 그것들의 상호 파괴의 의미를 조사하느냐? 성품은 본래 참되며, 오직 묘하고 밝은 깨달음일 뿐임을 관찰하라. 묘하고 밝으며 깨어있는 마음은 본래 물이나 불이 아니다. 왜 그것들의 양립 불가능성에 대해 묻느냐? 참되고 묘하며 밝은 깨달음도 또한 이와 같다. 만약 네가 허공을 인정하면 허공이 나타난다. 만약 지, 수, 화, 풍이 각각 발견되면, 그들이 각각 나타난다. 만약 그것들이 함께 발견되면, 그것들은 함께 나타난다. 그것들은 어떻게 함께 나타나는가?」
부처님께서는 부루나의 이전 의문에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왜 지, 수, 화, 풍의 사대가 완벽하게 융합되어 법계에 두루하면서 서로 파괴하지 않는지 물었다. 너는 또한 허공과 대지가 둘 다 법계에 두루하면서 어떻게 충돌하지 않는지 물었다. 부루나야, 너에게 다른 예를 들어주겠다.」
“허공 자체가 고정된 형태가 없는 것처럼, 허공은 다양한 현상의 출현을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허공 속에서 해가 비치면 밝고, 먹구름이 모이면 어둡고, 바람이 불면 요동치고, 날씨가 맑으면 깨끗하고, 공기가 응결되면 탁하고, 먼지가 쌓이면 흐릿하고, 물이 맑으면 비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이러한 다른 현상들이 허공 때문에 생기는 것인가, 아니면 허공 속에 본래 있는 것인가?”
부처님께서 설명하셨다: “만약 그것들이 허공 때문에 생긴다면, 해가 비칠 때 온 세상이 태양의 색이 되어야 할 텐데, 왜 우리는 여전히 하늘에 둥근 해를 볼 수 있는가? 만약 허공 자체가 밝다면, 저절로 빛나야 할 텐데, 왜 밤이나 구름 낀 날에는 빛나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 밝음은 태양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오는 것도 아니지만, 태양 및 허공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이 현상들이 본래 거짓이며 그 본질을 진정으로 지적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마치 하늘에서 꽃을 따려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일이다.”
“진정한 본성은 순수한 깨달음이며, 물도 아니고 불도 아니다. 그러니 그것들이 서로 충돌하는지 묻지 말라. 참되고 묘하며 밝은 깨달음의 마음도 이와 같다. 허공이 있다고 생각하면 허공을 보고,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들이 개별적으로 나타난다. 만약 그것들을 동시에 인식하면, 동시에 나타난다.”
“부루나여, 그것은 마치 물에 비친 태양의 그림자와 같다. 두 사람이 물 속의 태양을 함께 본다. 만약 그들이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걸어가면, 태양이 각각 그들을 따라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갈 것이다. 정해진 기준이 없다. ‘이 태양은 하나인데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가?’ 또는 ‘태양이 두 개가 되었는데 어떻게 하나만 나타나는가?‘라고 어렵게 묻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근거 없는 헛된 회전일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생생한 비유로 계속 설명하셨다: “부루나여, 물웅덩이에 비친 태양을 상상해 보라. 두 사람이 물 속의 태양을 함께 본다. 만약 그들이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걸어가면, 각자 발 아래 태양이 따라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는 왜 원래 하나의 태양이 두 개가 되었는지 물을 수 없으며, 왜 두 사람이 같은 태양을 보는지도 물을 수 없다. 그것은 실질적인 근거가 없는 환영과 같다.”
“부루나여, 그대는 색(色)과 공(空)을 사용하여 여래장을 다투고 붙잡으려 하니, 여래장이 법계에 색과 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바람이 움직이고, 허공은 고요하며, 태양은 밝고, 구름은 어둡다. 중생들은 미혹하고 어리석어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과 결합한다. 그리하여 티끌의 피로가 일어나 세속적인 모습을 가져온다. 나는 묘한 밝음으로 여래장과 결합하여 멸하지도 않고 생기지도 않으니, 여래장은 오직 묘한 깨달음과 밝음으로 법계를 완전히 비춘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하나가 무한이고 무한이 하나이다. 작은 것이 큰 것 안에 나타나고 큰 것이 작은 것 안에 나타난다. 움직이지 않는 도량(道場)이 시방세계에 가득하다. 내 몸은 시방의 끝없는 허공을 포함한다. 터럭 끝 하나에 보왕(寶王)의 국토가 나타난다. 티끌 하나 속에 앉아 대법륜(大法輪)을 굴린다. 티끌을 멸하고 깨달음과 결합하니, 진여(眞如)의 본성, 묘한 깨달음과 밝음이 드러난다. 여래장, 근본적이고 묘하며 원만한 마음은 마음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고, 지(地)도 아니고, 수(水)도 아니고, 풍(風)도 아니고, 화(火)도 아니다. 눈, 귀, 코, 혀, 몸, 뜻도 아니고, 색, 성, 향, 미, 촉, 법도 아니다. 안식계(眼識界)도 아니고, 의식계(意識界)까지도 아니다. 밝음도 아니고, 무명도 아니고, 밝음과 무명의 끝남(문명진)도 아니다. 늙고 죽음도 아니고, 늙고 죽음의 끝남(노사진)도 아니다. 고(苦), 집(集), 멸(滅), 도(道)도 아니다. 지혜도 아니고 얻음도 아니다. 보시도 아니고, 지계도 아니고, 정진도 아니고, 인욕도 아니고, 선정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고, 바라밀다도 아니다. 여래도 아니고, 아라한도 아니고, 정등각(Samyak-sambodhi)도 아니고, 대열반도 아니다. 항상함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고, 자아도 아니고, 깨끗함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속적인 것도 아니고 탈세속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래장, 근본적으로 밝은 마음이자 묘함이다. 그것은 마음이고, 허공이고, 지(地)이고, 수(水)이고, 풍(風)이고, 화(火)이다. 그것은 눈이고, 귀, 코, 혀, 몸, 뜻이다. 그것은 색이고, 성, 향, 미, 촉, 법이다. 그것은 안식계이고, 의식계까지이다. 그것은 밝음이고, 무명이며, 밝음과 무명의 끝남이다. 늙고 죽음이며, 늙고 죽음의 끝남이다. 고, 집, 멸, 도이다. 지혜이고 얻음이다. 보시이고, 지계이고, 정진이고, 인욕이고, 선정이고, 지혜이고, 바라밀다이다. 여래이고, 아라한이고, 정등각이고, 대열반이다. 항상함이고, 즐거움이고, 자아이며, 깨끗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속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탈세속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래장, 묘하고 밝은 근본 마음이다. 그것은 ‘있음’과 ‘없음’을 떠나 있으며, ‘있음’이기도 하고 ‘없음’이기도 하다. 삼계의 중생들과 세상을 벗어난 성문과 연각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아는 마음으로 여래의 무상보리(Supreme Bodhi)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세속의 언어를 사용하여 불지견(佛知見)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마치 거문고, 공후, 비파와 같다. 훌륭한 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능숙한 손가락이 없으면 연주될 수 없다. 그대와 모든 중생들도 이와 같아서, 보배로운 깨달음과 참된 마음이 각자에게 원만하게 가득 차 있다. 내가 손가락을 누르면 해인(海印)이 빛을 발하는 것과 같이, 그대가 마음을 일으키자마자 티끌의 피로가 먼저 일어난다. 그대가 무상각도(Supreme Way of Awakening)를 부지런히 구하지 않고, 소승(Small Vehicle)을 좋아하며 적은 것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부루나여, 내가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겠다.”
“이 세상이 ‘여래장’이라고 부르는 마법의 보물 상자와 같다고 상상해 보라. 이 상자는 유형과 무형의 온갖 묘한 것들이 뒤섞여 가득 차 있다.”
“때때로 우리가 보는 세상은 이렇다. 바람이 불고, 하늘이 맑다. 해가 밝고, 구름이 어둡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길을 잃고 자신의 본성을 잊은 채, 바깥세상에 의해 혼란스러워한다.”
“이 마법의 보물 상자를 다시 보자. 그것은 사실 매우 놀라워서 수많은 세계로 변할 수 있다. 이 상자 안에서는 하나의 것이 수많은 것이 될 수 있고, 수많은 것이 합쳐져 하나가 될 수 있다. 거대한 세계가 작은 것 안에 나타날 수 있고, 작은 세계가 거대한 것 안에 숨겨질 수 있다.”
“상상해 보라, 터럭 하나 끝에 웅장한 왕국이 나타날 수 있고, 작은 티끌 하나 속에서 위대한 법의 수레바퀴가 돌아갈 수 있다. 이것이 보물 상자의 마법이다.”
“이 보물 상자는 너무나 마법 같아서,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마음도 아니고, 빈 공간도 아니다. 지, 수, 화, 풍의 요소들도 아니다.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라는 감각기관들도 아니며, 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이라는 인식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인지와 이해를 초월한다.”
“하지만 이 보물 상자는 모든 것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마음일 수 있고, 허공일 수 있으며, 지, 수, 화, 풍일 수 있고, 우리의 감각과 인식 대상일 수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며 모든 것을 초월한다.”
“부루나여, 아는가? 수행하는 이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제한된 지식으로 이 무한한 보물 상자를 이해하려고 한다. 마치 작은 막대기로 바다를 측정하려는 것과 같아서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다. 거문고와 같이,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지만 솜씨 좋은 사람이 연주하지 않으면 결코 울리지 않는다. 그대와 모든 중생이 이 보물 상자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사용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 경이로움을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부루나여, 작은 성취에 만족하지 말라. 용기를 내어 최고의 지혜를 추구하고 이 마법의 보물 상자를 탐구하라!”
부루나가 말했다: “저와 여래는 모두 보배로운 깨달음, 완벽한 밝음, 그리고 이원성 없는 참되고 묘하며 청정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주 오래전에 시작 없는 헛된 생각을 만난 이래로 오랫동안 윤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제 성인의 수레(Sage Vehicle)를 얻었지만, 아직 궁극적이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거짓은 완전히 소멸되었고, 오직 경이로운 것은 진실한 항상함(常)뿐입니다. 감히 여래께 묻습니다. 무슨 이유로 모든 중생은 거짓을 가지고 있어 자신의 묘한 밝음을 가리고 이 물에 빠지는 고통을 겪습니까?”
부처님의 설명을 듣고 부루나는 새로운 의문을 제기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제가 당신과 똑같은 완벽한 깨달음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왜 저는 시작 없는 시간부터 헛된 생각에 시달리며 윤회 속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방황해 왔습니까? 성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지금조차도 저는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묻습니다, 왜 중생들은 본래의 얼굴을 가리고 윤회의 고해(苦海)에 가두는 이런 헛된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비록 그대가 의심을 없앴지만, 남은 미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세상에 눈앞에 있는 일들을 들어 다시 묻겠다. 사위성(Shravasti)의 연야달다(Yajnadatta)에 대해 듣지 못했느냐?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그는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거울 속의 눈썹과 눈이 보이는 머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화가 나서 자신의 머리가 얼굴과 눈을 보지 못하는 것을 탓했다. 귀신이라고 생각하여 이유 없이 미친 듯이 달렸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무슨 이유로 이 사람은 원인 없이 미친 듯이 달렸는가?”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며 대답하셨다: “비록 그대가 몇 가지 의심을 해결했으나, 여전히 혼란이 남아 있구나. 실제 예를 들어 설명해 주겠다. 사위성의 연야달다에 대해 들어보았느냐?”
부처님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셨다: “어느 날 아침, 연야달다는 거울을 보며 자기 머리, 눈썹, 눈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화가 나서 자신의 머리가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탓했다. 그는 자신이 귀신으로 변했다고 생각하고 미친 듯이 달렸다. 왜 이 사람이 이유 없이 미쳤다고 생각하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이 사람의 마음이 미친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부루나가 대답했다: “이 사람은 그저 마음이 미친 것일 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묘한 깨달음은 밝고 원만하며, 근본적인 원만함은 밝고 묘하다. 그것을 거짓이라 부르는데, 어떻게 원인이 있을 수 있겠느냐? 만약 원인이 있다면 어떻게 거짓이라 부를 수 있겠느냐? 모든 헛된 생각은 서로 잇달아 일어나, 혼란 위에 혼란을 쌓으며 티끌 같은 겁(kalpa)을 지나왔다. 부처가 그것을 명확히 해도 그대는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한 혼란의 원인은 혼란 때문에 존재한다. 혼란에는 원인이 없고 거짓에는 근거가 없음을 깨달아라. 아직 생겨나지도 않았는데 무엇을 멸하겠는가? 보리(Bodhi)를 얻는 자는 꿈에서 깨어나 꿈속의 일을 이야기하는 사람과 같다. 비록 마음이 맑고 밝더라도 무슨 인연으로 꿈속의 물건을 잡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에 원인이 있겠는가! 저 도시의 연야달다처럼, 자신의 머리를 두려워하고 달리는 것에 무슨 인연이 있겠느냐? 만약 그의 광기가 갑자기 멈춘다면, 그의 머리는 외부에서 얻은 것이 아니다. 설령 광기가 멈추지 않았다 해도 그가 무엇을 잃었느냐? 부루나여, 거짓의 본성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느냐? 그저 세간의 분별과 업(karma), 과보(fruit), 중생(sentient beings)이라는 세 가지 상속을 따르지 말라. 이 세 가지 인연이 끊어지면 세 가지 원인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그대 마음속의 연야달다, 광기의 본성은 저절로 멈춘다. 멈춤이 곧 보리이다. 위없이 청정하고 밝은 마음은 본래 법계에 두루하다.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니, 어찌 힘든 노고와 뼈를 깎는 수행에 의지하여 증득하려 하느냐?”
부처님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그렇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본래 완벽한 깨달음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헛된 생각이라 부르는 것에 어떻게 원인이 있을 수 있겠느냐? 원인이 있다면 어떻게 헛된 생각이라 부를 수 있겠느냐? 이 헛된 생각들은 그저 서로를 만들어내며 수많은 겁 동안 쌓여왔을 뿐이다. 부처가 진실을 지적했음에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본래의 얼굴로 돌아오지 못한다.”
부처님께서 계속 설명하셨다: “이 혼란은 혼란 자체 때문에 존재한다. 혼란에 진짜 원인이 없음을 깨닫는다면, 헛된 생각은 의지할 곳이 없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왜 없애려 하느냐?”
“깨달음을 얻는 자는 꿈에서 깨어나는 사람과 같다. 꿈속의 일들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다 해도, 어떻게 꿈속의 물건을 정말로 가질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 헛된 생각들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저 도시의 연야달다처럼, 왜 자신의 머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뛰어다니겠는가? 갑자기 깨어나면 자신의 머리가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마침내 결론을 내리셨다: “부루나여, 헛된 생각의 본성은 이와 같아서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세간의 업과 중생의 상속을 분별하기를 멈추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인연들이 끊어지면 헛된 생각의 뿌리는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대 마음속의 ‘연야달다’는 저절로 잠잠해질 것이다. 이 고요함이 깨달음이며, 모든 것을 초월하고 본래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청정하고 밝은 마음이다.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니, 왜 그것을 얻기 위해 힘들게 수행하느냐?”
그것은 마치 옷 속에 여의주(wish-fulfilling jewel)를 꿰매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과 같다. 빈곤하여 타향을 떠돌며 음식을 구걸하고 돌아다닌다. 비록 정말 가난하지만 보석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다. 갑자기 지혜로운 사람이 보석을 가리켜 준다. 모든 소원이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고 그는 큰 부를 얻는다. 그는 신성한 보석이 외부에서 얻은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부처님께서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옷 속에 여의주가 꿰매져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그는 다른 곳에서 음식을 구걸하며 돌아다닌다. 비록 가난한 삶을 살지만 사실 그는 매우 부자이다.”
어느 날 갑자기 현자가 그의 옷 속에 있는 보석을 가리켜 주었다. 그때부터 그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졌고 그는 매우 부유해졌다. 그제야 그는 이 마법의 보석이 외부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과 함께 있었음을 깨달았다."
즉시 대중 가운데 있던 아난이 부처님 발에 절하고 일어나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께서 지금 살생, 도둑질, 음란의 세 가지 원인이 끊어지면 세 가지 조건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속의 달다(Datta)의 미친 본성은 저절로 멈추고, 멈춤이 곧 보리이며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인연의 문제입니다. 왜 여래께서는 갑자기 인연을 버리십니까? 제 마음은 인연을 통해 열리고 깨달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뜻은 배울 것이 남은 우리 젊은 성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모임에 있는 대목건련, 사리불, 수보리 등도 옛 바라문들을 따르다가 부처님의 인연법을 듣고 마음을 일으켜 깨닫고 무루(no outflows)의 경지를 얻었습니다. 만약 지금 보리가 인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면, 왕사성(Rajgriha)의 막카리 고살리푸트라(Maskari Goshaliputra) 등이 말한 자연(spontaneity)이 으뜸가는 진리가 될 것입니다. 오직 당신의 대자비로 저의 혼란과 어리석음을 열어 주옵소서.”
이때 아난이 일어나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방금 살생, 도둑질, 음란의 세 가지 행위가 끊어지면 그 원인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즈나다타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그의 광기는 자연스럽게 멈춥니다. 이 멈춤이 바로 보리이며, 다른 사람에게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전히 인연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왜 인연을 버리라고 하십니까? 저는 인연의 원리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아난다가 계속했습니다: “저희 젊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마하목건련, 사리불, 수보리와 같은 대가들도 부처님께서 인연을 설명하시는 것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만약 깨달음이 인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라즈기르의 외도들이 말하는 ‘자연(자발성)‘이 최고의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부디 부처님, 자비롭게 저희의 의심을 해결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도시의 야즈나다타와 같다. 그의 광기의 인연이 멈추면, 광기가 없는 상태가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인연과 자연의 원리는 여기서 끝난다. 아난다야, 야즈나다타의 머리는 본래 그곳에 있었고, 본래 그러했다. 본래 그러하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 무슨 인연으로 그는 자신의 머리를 두려워하고 미친 듯이 달렸느냐? 만약 그가 본래의 머리라는 인연 때문에 미쳤다면, 왜 자연적인 인연 때문에 그것을 잃지 않았느냐? 그의 본래 머리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며, 광기와 두려움이 거짓되게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았는데, 왜 인연에 의존하느냐? 본래의 광기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본래 광기와 두려움이 있었다. 그가 미치기 전에는 광기가 어디에 숨어 있었느냐? 만약 그가 자연적으로 미치지 않았고, 그의 머리가 본래 거짓이 아니었다면, 왜 미친 듯이 달렸느냐? 만약 그가 자신의 본래 머리를 깨닫고 미친 듯이 달린 것을 인식한다면, 인연과 자연은 모두 헛된 이론일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세 가지 인연이 끊어질 때, 그것이 바로 보리심이다. 보리심이 생겨나면, 생멸심은 소멸한다. 이것은 여전히 생멸이다. 멸과 생이 완전히 다하면, 무생(無生)의 도가 있다. 만약 자연이 있다면, 자연스러운 마음이 생겨나고 생멸심이 소멸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이것 또한 생멸이다. 생멸이 없는 것을 자연이라 한다. 그것은 세상의 여러 현상이 섞이는 것과 같다. 한 몸이 되는 것을 화합의 성질이라 하고, 섞이지 않고 합해지지 않는 것을 근본 성질이라 한다. 근본 성질은 자연이 아니며, 화합은 합해지지 않는다. 합함과 자연스러움은 모두 버려지고, 분리와 합함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장을 희론이 없는 법이라 한다. 보리와 열반은 아직 멀리 있다. 그것은 겁(kalpa) 동안 고통을 겪으며 수행하고 증명할 것이 아니다. 비록 그대가 시방 여래의 십이부경의 청정하고 묘한 이치를 갠지스강의 모래만큼 외운다 해도, 그것은 희론을 도울 뿐이다. 비록 그대가 인연과 자연을 논하고 결정적으로 이해한다 해도,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다문(도움) 제일이라 부른다. 그러나 겁 동안 쌓은 이 학식으로도 마등가의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다. 무슨 이유로 그대는 내 불정(佛頂)의 능엄주를 기다려야 했느냐? 그래야 마등가의 마음속 애욕의 불이 갑자기 멈추고, 그녀가 아나함과를 얻어 내 법 안의 정진의 숲이 되고, 사랑의 강이 말라 그대가 해방될 수 있었느냐? 그러므로 아난다야, 그대가 비록 여래의 비밀스럽고 묘한 장엄을 겁 동안 외웠다 해도, 하루 동안 무루업(無漏業)을 수행하여 세상의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 가지 고통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만 못하다. 전직 창녀였던 마등가처럼, 주문의 힘으로 그녀의 음욕이 잠재워졌다. 법 안에서 그녀의 이름은 이제 성비구니(性比丘尼)이다. 그녀와 라훌라의 어머니 야소다라는 모두 과거의 원인을 깨닫고 탐욕과 사랑이 여러 생 동안 고통을 초래했음을 알았다. 일심으로 훈습하고 무루의 선을 수행했기에, 한 사람은 속박에서 해방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수기를 받았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아난다야, 도시의 야즈나다타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겠다.”
“어느 날, 이 남자는 갑자기 미쳐서 소리치며 뛰어다녔다: ‘내 머리가 없어졌어! 내 머리가 없어졌어!’ 사실 그의 머리는 목 위에 잘 붙어 있었고 전혀 잃어버리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이봐, 진정해, 네 머리는 아직 거기 있어!‘라고 말해준다면, 그의 광기는 멈추고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난다야, 보아라. 야즈나다타의 머리는 본래 그곳에 있었고 떠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왜 그는 갑자기 머리가 없어졌다고 두려워했느냐? 만약 그의 머리가 자연적으로 존재한다면, 왜 어떤 이유로 미쳤느냐? 만약 그의 머리가 정말 어떤 이유로 존재한다면, 왜 어떤 이유로 사라지지 않느냐?”
“사실은 그의 머리는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두려움과 광기는 설명할 수 없이 갑자기 나타났다. 머리에 변화가 없는데 왜 원인을 찾느냐? 만약 그가 처음부터 미쳤다면, 미치기 전에는 광기가 어디에 숨어 있었느냐? 만약 그가 처음부터 정상이었다면, 왜 갑자기 미친 듯이 뛰어다녔겠느냐?”
“아난다야, 이 이야기는 우리가 진실을 이해할 때 우리의 두려움과 걱정이 근거가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임을 말해준다. 사물에 원인이 있다고 말하든 자연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든, 이것들은 단지 헛된 말들이다.”
“참된 지혜와 해탈은 많은 경전을 외우거나 많은 이치를 논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난다 너처럼, 비록 많은 불경을 기억하고 다문 제일로 알려져 있지만, 마등가의 딸로부터 성적 유혹을 만났을 때 이러한 지식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신 마등가의 딸의 욕망을 즉시 끄고 그녀가 수행자가 되게 하며 네가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도운 것은 나의 신령한 주문이었다.”
“그러므로 아난다야, 많은 경전을 외우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하루라도 진실하게 수행하여 세상의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 가지 번뇌를 멀리하는 것이 낫다. 전에는 창녀였지만 수행을 통해 이제 비구니가 된 마등가의 딸처럼 말이다. 그녀와 라훌라의 어머니 야소다라는 모두 전생의 인과를 이해하고 갈애가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수행 덕분에 그들은 번뇌를 없애거나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
“어찌하여 그대들은 스스로를 속이며 보고 듣는 것에 얽매여 있느냐?”
말씀을 마치고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왜 그대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속이며, 가르침을 듣고 보기만 할 뿐 수행하지 않느냐?”
아난다와 대중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의심이 사라졌으며, 그들의 마음은 실상에 눈을 떴습니다. 그들의 몸과 마음은 가볍고 편안해져 예전에 없던 것을 얻었습니다. 그는 다시 슬픔에 잠겨 울며 부처님의 발에 절하고, 두 무릎을 꿇고 합장하며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비할 데 없고 대자비하신 청정 보왕께서 교묘하게 제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당신은 그러한 다양한 인연과 방편을 사용하여 저희가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고통의 바다에서 나오도록 격려하고 인도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비록 제가 지금 그러한 법음을 듣고 여래장, 즉 묘하고 밝은 깨달음의 마음이 법계에 두루하여 시방 여래의 국토, 즉 각왕(覺王)의 청정하고 보배롭고 엄숙하고 묘한 국토를 포함하고 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여래께서는 다시 저의 학식이 공덕이 없고 수행에 미치지 못한다고 꾸짖으십니다. 저는 이제 마치 천왕으로부터 웅장한 집을 갑자기 받은 떠돌이 나그네와 같습니다. 비록 큰 저택을 얻었지만,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합니다. 저는 오직 여래께서 대자비를 버리지 않으시고 어둠에 덮인 저희 대중에게 소승을 버리고 반드시 여래의 무여열반, 즉 근본 서원을 얻는 길을 보여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학식 있는 이들이 과거의 반연하는 마음을 항복받고 다라니를 얻어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가는 법을 알게 하소서.” 이 말을 마치고 그는 오체투지 하였다. 대중 속에서 그들은 일심으로 부처님의 자비로운 명령을 기다렸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아난다와 대중은 마음속의 의심을 없애고 참된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몸과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는데, 이는 그들이 전에 가져보지 못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난다는 다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께 절하고, 땅에 무릎을 꿇고 합장하며 말했습니다: “자비롭고 비할 데 없는 세존이시여, 당신은 교묘하게 저희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당신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저희 혼란스러운 사람들을 고통의 바다에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비록 제가 이제 여래장이 시방에 두루함을 이해하지만, 당신께서는 저희가 학식만 있을 뿐 진정으로 수행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왕으로부터 웅장한 집을 갑자기 받은 나그네와 같습니다; 비록 큰 집을 얻었지만, 여전히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합니다. 부디 저희를 위한 자비를 포기하지 마시고, 여전히 혼란 속에 있는 저희를 인도하여 소승을 버리고 불도에 오르게 하소서. 부디 과거의 습관을 제어하고 부처님의 지혜를 얻는 방법을 알려주소서.” 말을 마친 아난다는 땅에 엎드려 모두와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다렸다.
그때 세존께서 대중 가운데 보리심에 아직 편안하지 못한 성문과 연각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부처님 입멸 후 말법 시대에 보리에 뜻을 둘 미래의 중생들을 위하여, 최상승 수행의 묘한 길을 여셨습니다. 그는 아난다와 대중에게 선언하셨습니다: “만약 너희가 결정코 보리심을 내어 여래의 묘한 삼매 안에서 피로감이나 싫증을 내지 않으려면, 먼저 초발심을 일으키는 두 가지 결정적인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초발심을 위한 두 가지 결정적인 원리는 무엇인가? 아난다야, 첫 번째 원리는 이것이다: 만약 네가 성문승을 버리고 보살승을 수행하여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인지(因地)의 발심과 과지(果地)의 깨달음이 같은지 다른지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아난다야, 만약 인지에서 생멸심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아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불승(佛乘)을 구한다면, 그런 곳은 없다. 이런 이유로 너는 세상의 모든 물질적 대상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법은 변화와 소멸의 대상이다. 아난다야, 세상을 관찰해 보라: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중에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나 너는 허공이 썩거나 부서진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허공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결코 썩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네 몸 안에서 단단한 요소는 흙이고, 축축한 요소는 물이며, 따뜻한 요소는 불이고, 움직이는 요소는 바람이다. 이 네 가지 속박 때문에, 너의 고요하고 둥글고 묘하고 밝은 깨달음의 마음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으로 나뉜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섯 겹의 혼탁함이 있다. 혼탁함이란 무엇인가? 아난다야, 예를 들어 맑은 물은 본래 깨끗하다. 먼지, 흙, 재, 모래는 본질적으로 장애물이다. 이 두 물질은 본래 성질이 다르다. 만약 세상 사람이 흙과 먼지를 가져다 맑은 물에 던지면, 흙은 단단함을 잃고 물은 깨끗함을 잃는다. 겉모습이 흐려지는데, 이것을 혼탁함이라 한다. 너의 다섯 겹의 혼탁함도 이와 같다.”
부처님은 참석한 일부 수행자들이 보리심의 진정한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는 이 사람들과, 부처님이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을 미래의 수행자들을 돕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난다와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친애하는 벗들이여, 만약 당신들이 정말로 부처가 되고 싶다면, 먼저 두 가지 중요한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첫 번째 원리는 이것입니다: 당신이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을 하고 싶다고 가정해 봅시다. 먼저 명확히 생각해야 합니다. 당신의 현재 마음은 미래에 부처가 되었을 때의 마음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아난다야, 만약 생겨나고 사라지는 마음을 사용하여 수행하면서,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불과(佛果)를 얻고자 한다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하나 들어주겠다. 이 세상의 물건들을 보라.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은 결국 부서지지 않느냐? 하지만 공기가 부서진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왜냐하면 공기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부서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네 몸을 보자. 네 몸에는 뼈와 같은 단단한 것이 있어 흙과 같고, 피와 같은 축축한 것이 있어 물과 같으며, 따뜻한 것은 불과 같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과 같다. 이 네 가지가 너의 본래 청정한 마음을 감싸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능력을 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너의 마음은 불순해진다. 마치 맑은 물이 진흙에 의해 휘젓가지는 것과 같다. 본래 맑은 물과 진흙은 서로 섞이지 않지만, 누군가 맑은 물에 진흙을 던지면 물은 흐려지게 된다. 너의 마음도 이와 같아서, 본래 청정하지만 이러한 감각과 생각 때문에 흐려지고 불분명해진다.”
“아난다야, 너는 허공이 시방에 두루한 것을 본다. 공(空)과 견(見)은 나뉘지 않는다. 공은 실체가 없고, 견은 자각이 없다. 이 둘이 거짓되게 맞물려 첫 번째 층을 형성하니, 이를 겁탁(Kalpa Turbidity)이라 한다. 너의 몸은 4대를 실체로 삼아 씨름하는 듯하다.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이 막혀 머물게 된다. 물, 불, 바람, 흙이 회전하여 느낌과 앎을 일으킨다. 이들이 거짓되게 맞물려 두 번째 층을 형성하니, 이를 견탁(View Turbidity)이라 한다. 또한, 네 마음속의 기억, 분별, 암송은 육진을 수용하는 지견을 낳는다. 티끌을 떠나서는 모습이 없고, 자각을 떠나서는 성품이 없다. 이들이 거짓되게 맞물려 세 번째 층을 형성하니, 이를 번뇌탁(Affliction Turbidity)이라 한다. 또한, 밤낮으로 너는 끝없는 생멸을 겪는다. 너의 지견은 항상 세상에 머물기를 바라지만, 너의 업보는 끊임없이 너를 여러 국토로 옮긴다. 이들이 거짓되게 맞물려 네 번째 층을 형성하니, 이를 중생탁(Living Beings Turbidity)이라 한다. 너의 봄과 들음은 본래 다른 성질이 아니지만, 많은 티끌이 장애를 만들고, 형체 없는 차이가 묘하게 생겨난다. 본성에서는 서로 알지만, 작용에서는 서로 대립한다. 동일함과 다름이 그 기준을 잃는다. 이들이 거짓되게 맞물려 다섯 번째 층을 형성하니, 이를 명탁(Life Turbidity)이라 한다.”
부처님은 계속해서 아난다를 가르치며 다섯 가지 혼탁함을 설명하셨습니다: “아난다야, 네가 보는 허공은 시방에 두루하지만, 사실 공과 견은 분리될 수 없다. 공은 실체가 없고, 견은 자각이 없다. 이 두 개념이 얽혀 잘못된 이해를 형성한다. 이것이 첫 번째 혼탁함인 겁탁이다.”
“네 몸은 지, 수, 화, 풍의 4대로 구성되어 있다. 너의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은 이 요소들에 의해 방해받는다. 4대와 자각이 얽혀 잘못된 이해를 형성한다. 이것이 두 번째 혼탁함인 견탁이다.”
“너의 마음속에 있는 기억, 인식, 암송의 습관이 지식과 견해를 일으켜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육진(六塵)을 받아들인다. 이 듮진(六塵)이 없으면 모양(相)이 없고, 깨달음(覺)이 없으면 성품(性)이 없다. 이들이 서로 얽혀 허망한 이해를 형성한다. 이것이 세 번째 탁함이니, 번뇌탁(煩惱濁)이라고 한다.”
“너의 생명은 생멸(生滅)과 함께 매일 변하지만, 너의 지식과 견해는 항상 세상에 머물기를 원하며, 너의 업(業)은 종종 윤회하게 만든다. 이들이 서로 얽혀 허망한 이해를 형성한다. 이것이 네 번째 탁함이니, 중생탁(衆生濁)이라고 한다.”
“너의 보고 듣는 것은 본래 구분할 수 없었으나, 여러 티끌의 장애로 인해 서로 다른 이해가 생겼다. 성품은 서로 알지만 작용은 서로 어긋난다. 이들이 서로 얽혀 허망한 이해를 형성한다. 이것이 다섯 번째 탁함이니, 명탁(命濁)이라고 한다.”
“아난아, 만약 지금 네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여래의 상(常), 낙(樂), 아(我), 정(淨)에 합치되게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죽고 사는 근원을 선택하여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원만하고 고요한 성품에 의지해야 한다. 이 고요함으로 허망한 생멸을 돌이켜 복종시키고 본래의 깨달음으로 돌아가 본래의 밝은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성품을 인지(因地)의 마음으로 삼아야만 과지(果地)의 수행과 증득을 이룰 수 있다. 이는 마치 더러운 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두는 것과 같다. 조용히 두어 움직이지 않으면 모래와 흙이 저절로 가라앉고 맑은 물이 나타난다. 이것을 객진(客塵) 번뇌를 처음 복종시킨 것이라고 한다. 진흙을 제거하고 오직 맑은 물만 남으면, 이것을 근본 무명(無明)을 영원히 끊은 것이라고 한다. 밝음과 모양이 청정하고 본질이 원만하면 모든 나타남이 번뇌가 되지 않고 모두 열반의 청정하고 미묘한 공덕에 부합하게 된다.”
부처님은 이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네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하고자 한다면, 먼저 생사의 근원을 찾고,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원만한 성품에 의지해야 한다. 이 성품을 사용하여 허망한 생사를 없애고 본래의 깨달음으로 돌아가라. 이 불생불멸의 성품을 수행의 기초로 삼아야만 불과(佛果)를 온전히 성취할 수 있다.”
부처님은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마치 흙탕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가만히 두면 진흙과 모래가 자연스럽게 가라앉고 맑은 물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번뇌를 처음 복종시킨 상태이다. 진흙을 완전히 제거하고 맑은 물만 남기는 것이 근본 무명을 영원히 끊는 것이다. 밝음의 성품이 청정하면 모든 변화가 번뇌가 되지 않고 모두 열반의 청정한 공덕에 부합하게 된다.”
“두 번째 원리는 이것이다. 만약 네가 결정코 보리심을 내어 보살승(菩薩乘)에서 크게 용맹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모든 조건화된 모양(有爲相)을 버려야 한다. 너는 마땅히 번뇌의 근원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시작 없는 옛적부터 누가 업을 짓고 누가 생명을 기르는 고통을 견디는가? 아난아, 만약 네가 보리를 닦으면서 번뇌의 근원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공허한 티끌의 근원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전도(顚倒)된 곳조차 모른다면 어떻게 그것을 복종시키고 여래의 지위를 얻겠느냐? 아난아, 세상에서 매듭을 푸는 사람을 보아라. 그가 매듭이 어디에 있는지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풀 방법을 알겠느냐? 너는 허공이 너에 의해 부서졌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허공은 형상이나 모양이 없어 풀 매듭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너의 눈, 귀, 코, 혀, 몸, 뜻은 여섯 도적이 되어 너 자신의 집 보물을 약탈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중생은 시작 없는 옛적부터 세상에 묶여 물질세계를 초월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중요한 원리는, 만약 네가 보리심을 일으켜 보살의 길에서 용맹 정진하고자 한다면, 모든 조건화된 겉모습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번뇌의 뿌리를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시작 없는 옛적부터 누가 업을 짓고 누가 그 결과를 받는가? 아난아, 보리도를 수행하면서 번뇌의 뿌리를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거짓의 근원을 알 수 없다. 혼란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면 어떻게 번뇌를 복종시키고 부처의 경지에 이르겠느냐?”
부처님은 마지막으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세상에서 매듭을 푸는 사람을 보아라. 만약 그가 매듭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푸는 법을 알겠느냐? 허공이 깨졌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지? 왜냐하면 허공은 형체가 없고 풀 매듭도 없기 때문이다. 너의 현재 눈, 귀, 코, 혀, 몸, 뜻은 여섯 도적처럼 네 집안의 보물을 훔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중생은 시작 없는 옛적부터 세상에 묶여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아난아, 무엇을 중생세계라고 하느냐? ‘세(世)’는 시간과 흐름을 의미하고, ‘계(界)’는 방위와 방향을 의미한다. 동, 서, 남, 북, 남동, 남서, 북동, 북서, 상, 하가 계(界)가 됨을 알아야 한다. 과거, 미래, 현재가 세(世)가 된다. 위치에는 열 가지 방향이 있고 흐름에는 세 가지가 있다. 모든 중생은 허망함이 서로 얽혀 형성되었다. 몸 안에서 교류와 변화가 일어나고 세상이 서로 연루된다. 이 계의 성질에 대해 말하자면, 열 가지 방향이 확립되고 분명하지만, 세상은 오직 동, 서, 남, 북만 본다. 위와 아래는 위치가 없고, 중간은 정해진 방향이 없다. 네 방향이 분명히 확립되어 있고 세상(시간)과 교류한다. 셋 곱하기 넷은 열둘이고, 열둘로 회전한다. 흐름과 변화의 세 겹으로 일, 십, 백, 천이 된다. 이것이 시작과 끝을 요약한 것이다. 육근(六根) 안에는 각각 1,200의 공덕이 있다.”
부처님은 계속해서 아난에게 설명하셨습니다. “무엇이 중생세계인가? ‘세(世)’는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고, ‘계(界)’는 공간의 방위를 가리킨다. 동, 서, 남, 북에 남동, 남서, 북동, 북서, 그리고 위, 아래를 합쳐 십방(十方)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 현재, 미래는 삼세(三世)이다.”
“공간에는 열 가지 방향이 있고, 시간에는 세 단계가 있다. 모든 중생은 이 허망한 개념들이 서로 얽혀 형성된 것이다.”
부처님은 계속하셨습니다. “우리 몸 안에서 이 개념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세계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십방을 명확히 지적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보통 동, 서, 남, 북만 말한다. 위와 아래는 고정된 위치가 없고, 중간은 정해진 방향이 없다. 네 방향이 삼세와 얽혀 열두 가지 개념을 형성한다. 이 개념들은 각각 수천 가지의 변화를 가진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육근(눈, 귀, 코, 혀, 몸, 뜻) 중에서 각 근은 1,200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아난아, 너는 그 중에서 우열을 가려야 한다. 예를 들어, 눈은 볼 수 있지만 뒤를 보면 어둡고 앞을 보면 밝다. 앞은 완전히 밝지만 뒤는 완전히 어둡다. 좌우를 보면 3분의 2만 보인다. 그 기능을 종합적으로 논하면 공덕이 불완전하다. 세 부분은 공덕이 있지만 한 부분은 공덕이 없다. 안근(眼根, 눈)은 오직 800 공덕만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귀는 시방(十方) 어디서나 빠짐없이 듣는다. 가깝든 멀든 움직임은 끝없이 들린다. 이근(耳根, 귀)은 1,200 공덕으로 원만함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코는 들숨과 날숨의 통로로 냄새를 맡는다. 출입은 있지만 교차점에서는 결핍이 있다. 비근(鼻根, 코)을 살펴보면 3분의 1이 부족하다. 비근은 오직 800 공덕만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혀는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지혜를 선포하고 다한다. 말에는 한계가 있지만 이치는 끝이 없다. 설근(舌根, 혀)은 1,200 공덕으로 원만함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몸은 촉감을 느끼고 순응과 거역을 인식한다. 접촉할 때는 느끼지만 떨어지면 아무것도 모른다. 떨어짐은 하나요 접촉은 둘이니, 신근(身根, 몸)을 살펴보면 3분의 1이 부족하다. 신근은 오직 800 공덕만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뜻(의)은 십방과 삼세, 그리고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조용히 포함한다. 성인이든 범부이든 끝까지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의근(意根, 뜻)은 1,200 공덕으로 원만함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각 감각 기관의 기능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눈은 사물을 보지만, 앞은 밝고 뒤는 어두우며, 좌우의 3분의 2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눈은 800 공덕밖에 없다.”
“귀는 거리에 상관없이 십방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이근(귀)은 1,200 공덕으로 완벽하다.”
“코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냄새를 맡을 수 있지만, 그 사이의 교환 과정이 부족하다. 그래서 코는 800 공덕밖에 없다.”
“혀는 세속적 지혜와 초세속적 지혜를 표현할 수 있다. 말은 제한적이지만 이치는 무한하다. 그래서 설근(혀)은 1,200 공덕으로 완벽하다.”
“몸은 감촉을 느낄 수 있지만, 접촉할 때만 느끼고 떨어지면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몸은 800 공덕밖에 없다.”
“의식은 십방과 삼세의 모든 법을 포괄하며 성인과 범부의 생각을 모두 수용할 수 있다. 그래서 의근(마음)은 1,200 공덕으로 완벽하다.”
“아난아, 만약 네가 지금 욕망과 생사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흐름의 근원을 다하여 불생불멸의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면, 이 여섯 가지 수용하고 작용하는 근(根)을 살펴보아야 한다. 어느 것이 합하는 것이고 어느 것이 여의는 것인가? 어느 것이 깊고 어느 것이 얕은가? 어느 것이 원만하게 통하고 어느 것이 원만하지 않은가? 만약 네가 원만하게 통하는 근을 깨달을 수 있다면, 시작 없는 옛적부터 허망하게 짜여진 업의 흐름을 되돌릴 수 있다. 만약 원만한 통달을 따른다면, 너의 진전은 원만하지 않은 근에 의지하여 수천 겁을 수행하는 것보다 두 배가 될 것이다. 나는 이제 여섯 가지 고요하고 원만한 밝음과 그 근본 공덕의 양을 완전히 드러내 보였다. 너는 어느 것으로 들어갈지 자세히 선택하여라. 내가 너의 진전을 돕기 위해 설명하겠다. 십방의 여래들은 십팔계(十八界) 각각에서 수행하여 모두 원만하고 위없는 보리를 얻었다. 그들 사이에는 우열이 없었다. 그러나 너의 근기는 하열하여 아직 그들 중에서 지혜로 원만하게 행할 수 없으므로, 나는 네가 한 문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이것을 설한다. 한 곳으로 들어가 허망함이 없으면 여섯 근이 일시에 청정해질 것이다.”
부처님은 마지막으로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생사의 홍수를 거슬러 불생불멸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이 여섯 근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어느 것이 더 적합하고, 어느 것이 더 원만하며, 어느 것이 불완전한지 보아라. 만약 가장 원만한 근을 깨달을 수 있다면, 시작 없는 옛적부터의 허망한 업을 되돌릴 수 있다. 원만한 근으로 수행하는 것이 불완전한 근에 의지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십방의 여래들은 십팔계 각각에서 수행하여 우열 없이 원만하고 위없는 보리를 얻었다. 그러나 너의 근기는 아직 하열하여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시작할 하나만을 선택하여 깊이 수행할 것을 제안한다. 만약 한 측면에서 오류가 없음을 성취할 수 있다면, 나머지 다섯 근도 함께 청정해질 것이다.”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흐름을 거슬러 한 문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어떻게 육근을 일시에 청정하게 할 수 있습니까?”
아난이 공손하게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우리의 여섯 가지 감각을 동시에 청정하게 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제 수다원(Srota-apanna)의 과(果)를 얻었다. 너는 삼계(三界) 중생 세간의 견해의 미혹을 멸했다. 그러나 너는 아직 근(根)에 축적된 시작 없는 허망한 습기를 알지 못한다. 이 습기는 수행을 통해 끊어야 하며, 생(生), 주(住), 이(異), 멸(滅)의 많은 갈래는 말할 것도 없다. 이제 너는 현재 네 앞에 있는 육근을 관찰해 보아라. 그것들은 하나인가 여섯인가? 아난아, 만약 하나라고 한다면 왜 귀는 보지 못하고, 눈은 듣지 못하며, 머리는 걷지 못하고, 발은 말하지 못하느냐? 만약 이 육근이 결정코 여섯이라면, 내가 지금 이 모임에서 너에게 묘한 법문을 설할 때 너의 육근 중 어느 것이 와서 받아들이느냐?”
부처님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셨습니다. “아난아, 너는 이미 수다원의 경지에 도달했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너는 우리 감각 속에 숨겨진, 시작 없는 옛적부터 쌓여온 많은 습관들이 여전히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이 습관들은 수행을 통해 제거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부처님은 아난의 이해를 시험하고자 물으셨습니다. “아난아, 너는 우리의 육근(눈, 귀, 코, 혀, 몸, 뜻)이 하나의 실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여섯 개의 독립된 부분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난이 말했습니다. “저는 귀로 듣습니다.”
아난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귀로 당신의 말씀을 듣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귀는 스스로 들을 뿐인데, 너의 몸이나 입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의 입은 뜻을 묻고, 너의 몸은 공경을 표한다. 그러므로 만약 그것들이 하나가 아니라면 여섯이어야 하고, 여섯이 아니라면 하나여야 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너의 근은 본래 하나도 아니요 본래 여섯도 아니다. 아난아, 너는 이 근들이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시작 없는 옛적부터 가라앉고 빠지게 하는 허망한 환상 때문에 원만한 고요함 속에 하나와 여섯의 의미가 생겨났다. 비록 네가 수다원의 여섯 가지 멸(滅)을 얻었지만, 아직 하나를 파괴하지 못했다. 이는 마치 허공을 여러 그릇에 맞추는 것과 냘다. 그릇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허공의 이름도 달라진다. 그릇을 치우고 허공을 보면 허공이 하나라고 말한다. 그 광대한 허공이 어떻게 너를 위해 같거나 다르게 될 수 있겠느냐? 하물며 하나라거나 하나가 아니라고 이름 지을 수 있겠느냐? 너는 여섯 가지 수용하고 작용하는 근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좋다. 하지만 너의 귀는 듣기만 할 뿐 말할 수는 없지 않느냐? 너의 입은 질문을 하고 있고, 너의 몸은 존경을 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육근은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니고 완전히 통일된 것도 아니다.”
부처님은 계속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늘과 그릇의 관계와 같다. 하늘은 하나이지만, 다른 그릇들에 의해 나뉘어진 후에는 서로 다른 공간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근은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통일되어 있다.”
“아난아, 너는 우리의 감각이 완전히 분리된 여섯 부분도 아니고 하나의 전체도 아니며, 미묘한 통일체임을 이해해야 한다.”
“명(明)과 암(暗)이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인해, 견(見, 보는 성품)이 묘하고 원만한 진성(眞性) 속에 깊이 들러붙어 생겨납니다. 견의 본질은 형상을 비추고 형상과 결합하여 근(根)이 됩니다. 본래 근의 근원은 청정한 사대(四大)입니다. 그러므로 안(眼)이라는 신체 명칭이 붙었으며, 그 모양은 포도송이와 같습니다. 부근(浮根)과 사진(四塵)이 함께 치달으며 색(色)을 쫓아갑니다. 동(動)과 정(靜)이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인해, 문(聞, 듣는 성품)이 묘하고 원만한 진성 속에 깊이 들러붙어 생겨납니다. 문의 본질은 소리를 반영하고 소리와 엉켜서 근이 됩니다. 본래 근의 근원은 청정한 사대입니다. 그러므로 이(耳)라는 신체 명칭이 붙었으며, 그 모양은 갓 돋아난 둥근 잎과 같습니다. 부근과 사진이 함께 치달으며 소리(聲)를 쫓아갑니다. 통(通)과 색(塞)이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인해, 후(嗅, 맡는 성품)가 묘하고 원만한 진성 속에 깊이 들러붙어 생겨납니다. 후의 본질은 향기를 반영하고 향기를 받아들여 근이 됩니다. 본래 근의 근원은 청정한 사대입니다. 그러므로 비(鼻)라는 신체 명칭이 붙었으며, 그 모양은 두 개의 드리운 발톱 같습니다. 부근과 사진이 함께 치달으며 향기(香)를 쫓아갑니다. 염(恬)과 변(變)이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인해, 미(味, 맛보는 성품)가 묘하고 원만한 진성 속에 깊이 들러붙어 생겨납니다. 미의 본질은 맛을 반영하고 맛과 뒤섞여 근이 됩니다. 본래 근의 근원은 청정한 사대입니다. 그러므로 설(舌)이라는 신체 명칭이 붙었으며, 그 모양은 초승달과 같습니다. 부근과 사진이 함께 치달으며 맛(味)을 쫓아갑니다. 이(離)와 합(合)이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인해, 촉(觸, 닿는 성품)이 묘하고 원만한 진성 속에 깊이 들러붙어 생겨납니다. 촉의 본질은 감촉을 반영하고 감촉을 붙잡아 근이 됩니다. 본래 근의 근원은 청정한 사대입니다. 그러므로 신(身)이라는 신체 명칭이 붙었으며, 그 모양은 허리장구와 같습니다. 부근과 사진이 함께 치달으며 감촉(觸)을 쫓아갑니다. 생(生)과 멸(滅)이라는 두 가지 이어진 모습으로 인해, 지(知, 아는 성품)가 묘하고 원만한 진성 속에 깊이 들러붙어 생겨납니다. 지의 본질은 법(法)을 반영하고 법을 받아들여 근이 됩니다. 본래 근의 근원은 청정한 사대입니다. 그러므로 의(意)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이는 마치 어두운 방에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부근과 사진이 함께 치달으며 법(法)을 쫓아갑니다.”
부처님은 계속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우리의 감각 기관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말해주겠다. 그것은 마치 신비한 이야기와 같다.”
“먼저 눈을 보자: 마법의 거품처럼 원래는 맑고 투명했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나 밝음과 어둠을 만났을 때, ‘보는’ 능력이 생겨났다. 이 ‘보는’ 능력은 거울 같아서 색깔을 반영하고, 그 후 눈을 형성했다. 눈의 모양은 작은 포도송이와 같다.”
“다음은 귀다: 이 마법의 거품이 움직임과 고요함을 만났을 때, ‘듣는’ 능력이 생겨났다. 이 ‘듣는’ 능력은 소리를 포착하고, 그 후 귀를 형성했다. 귀의 모양은 갓 돋아난 둥근 잎과 같다.”
“그 다음은 코다: 이 마법의 거품이 뚫림과 막힘을 만났을 때, ‘맡는’ 능력이 생겨났다. 이 ‘맡는’ 능력은 향기를 흡수하고, 그 후 코를 형성했다. 코의 모양은 두 개의 늘어진 발톱과 같다.”
“그 다음은 혀다: 이 마법의 거품이 담백함과 다양함을 만났을 때, ‘맛보는’ 능력이 생겨났다. 이 ‘맛보는’ 능력은 맛을 보고, 그 후 혀를 형성했다. 혀의 모양은 초승달과 같다.”
“그 다음은 몸이다: 이 마법의 거품이 접촉과 떨어짐을 만났을 때, ‘느끼는’ 능력이 생겨났다. 이 ‘느끼는’ 능력은 감촉을 느끼고, 그 후 몸을 형성했다. 몸의 모양은 장구와 같다.”
“마지막으로 마음(의식)이다: 이 마법의 거품이 생겨남과 사라짐을 만났을 때, ‘아는’ 능력이 생겨났다. 이 ‘아는’ 능력은 다양한 것들을 이해하고, 그 후 마음을 형성했다. 마음은 마치 어두운 방에서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아난아, 육근(六根)은 이와 같다. 깨달음의 밝음으로 인해 밝음과 깨달음이 있다. 그 이해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헛된 것에 집착하여 빛을 발한다. 그러므로 이제 어둠과 밝음을 떠나면 너에게는 보는 실체가 없다. 움직임과 고요함을 떠나면 본래 듣는 실체가 없다. 뚫림과 막힘이 없으면 맡는 성품이 일어나지 않는다. 변함과 담백함이 없으면 맛봄이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떨어짐과 합침이 없으면 닿는 느낌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라짐과 생겨남이 없으면 마음의 앎은 머물 곳이 없다. 너는 단지 움직임과 고요함, 합침과 떨어짐, 담백함과 변함, 뚫림과 막힘, 생겨남과 사라짐, 어둠과 밝음이라는 열두 가지 조건 지어진 모습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하나의 근(根)을 뽑아내어 집착을 놓고 안으로 조복해라. 본래의 진실로 돌아가 본래의 밝은 광명을 발할 때까지 조복해라. 광명의 성품이 비추어 나올 때, 다른 다섯 가지 집착은 뽑혀 나가고 완전히 해탈할 것이다. 너는 눈앞의 티끌(경계)에서 생기는 지견(知見)에 의지하지 않게 될 것이다. 밝음은 근을 따르지 않고, 근에 의지하여 비추어 나올 것이다. 그러면 육근이 서로 뒤섞여 작용하게 될 것이다.”
“아난아, 너는 우리의 육근이 본래 청정하고 오염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외부 사물에 집착하기 때문에, 마치 밝은 거울이 먼지로 덮인 것과 같다.”
부처님은 손을 들어 먼지를 털어내는 시늉을 하시며 계속하셨다: “만약 네가 더 이상 외부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예를 들어 움직임과 고요함, 합침과 떨어짐, 담백함과 다양함, 뚫림과 막힘, 생겨남과 사라짐, 밝음과 어둠과 같은 상대적인 개점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너는 본래의 청정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만약 네가 감각 중 하나를 정화할 수 있다면, 다른 감각들도 또한 청정해질 것이다. 그것은 마치 구슬 꿰미와 같아서, 하나를 당기면 다른 것들도 따라 움직이는 것과 같다.”
“아난아, 어찌 알지 못하느냐? 지금 이 모임에서 아나율(Aniruddha)은 눈이 없지만 본다. 용인 ‘발난타(Upananda)‘는 귀가 없지만 듣는다. 항하(Ganges)의 강의 신은 코가 없지만 향기를 맡는다. 교범발 제(Gavampati)는 기이한 혀로 맛을 본다. 순야타(Shunyata) 신은 몸이 없지만 감촉을 느낀다. 여래의 빛 속에서 그들은 비춰지고 일시적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바람의 본질을 삼고 있기에 그들의 몸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멸진정(滅盡定)에 든 이들은 적멸(寂滅)과 소리를 듣는다. 이 모임에서 마하가섭(Mahakashyapa)은 오래전에 의근(意根)을 멸했지만, 그의 완벽하고 밝은 명료한 앎은 마음의 생각에 의지하지 않는다. 아난아, 만약 네가 지금 너의 모든 근을 완벽하게 뽑아낸다면, 안으로 그것들은 반짝이며 빛을 발할 것이다. 그리하여 떠다니는 티끌과 물질세계, 그리고 모든 변화하는 모습들은 마치 뜨거운 물에 얼음이 녹는 것과 같을 것이다. 너의 생각에 응하여 그것들은 위없는 지혜와 깨달음으로 변화할 것이다.”
다음으로, 부처님은 이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드셨다: “보라, 우리 모임에 몇 가지 특별한 예들이 있다. 아나율은 비록 눈이 멀었지만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용인 발난타는 귀가 없지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항하의 강의 신은 코가 없지만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교범발제는 다른 혀를 가졌지만 다양한 맛을 구별할 수 있다. 순야타 신은 육신이 없지만 감촉을 느낄 수 있다.”
부처님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또한, 마하가섭과 같은 수행자들은 평범한 의식을 초월하여 더 높은 자각의 상태에 도달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은 아난을 격려하셨다: “아난아, 만약 네가 감각을 완전히 정화할 수 있다면, 너의 내면은 빛을 발할 것이다. 그때, 이 무상한 세상은 마치 뜨거운 물에 얼음이 녹는 것처럼, 최고의 지혜로 변할 것이다.”
“아난아, 그것은 마치 세상 사람이 눈에 보는 것을 모으는 것과 같다. 만약 그가 갑자기 눈을 감게 하면, 어두운 모습이 그의 앞에 나타날 것이다. 육근은 흐릿하고 어두워서, 머리와 발이 같은 부류다. 만약 그 사람이 손으로 몸 밖을 더듬는다면, 비록 보지는 못하지만 머리와 발을 구별할 수 있다; 그의 알아차림은 동일하다. 봄(見)으로 인해 밝음과 어둠이 ‘보지 못함’이 되지만; 밝음이 없어도 그것(알아차림)은 스스로 빛을 발한다. 그러니 모든 어두운 모습이 결코 그것을 가릴 수 없다. 근과 티끌이 파괴되었는데, 어찌 밝은 깨달음이 원만하고 묘해지지 않겠느냐?”
부처님은 흥미로운 비유를 사용하여 아난에게 계속 설명하셨다: “아난아, 어떤 사람이 갑자기 눈을 감으면 어둠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지?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손으로 자신의 몸을 만져 머리와 발의 위치를 구별할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우리의 알아차림이 전적으로 눈의 시각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처님은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빛과 어둠을 초월하고 감각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높은 자각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자각은 완벽하고 묘한 것이다.”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만약 깨달은 마음의 인지(因地)가 영원한 머묾(常住)을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과위(果位)의 명칭과 용어에 상응해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보리(菩提), 열반(涅槃), 진여(眞如), 불성(佛性), 아마라식(奄摩羅識), 공여래장(空如來藏), 대원경지(大圓鏡智)라는 과위는—비록 이 일곱 가지 이름은 다르지만, 그 청정하고 원만한 성품은 견고하고 단단합니다. 금강왕(金剛王)과 같아서 영원히 머물고 파괴되지 않습니다. 만약 이 보고 들음이 어둠과 밝음, 움직임과 고요함, 뚫림과 막힘을 떠난다면,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실체가 없습니다. 마치 생각하는 마음과 같습니다; 전진(前塵, 앞의 경계)을 떠나면 본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 궁극적인 단절과 소멸을 수행의 원인으로 삼아, 여래의 일곱 가지 영원히 머무는 열매를 얻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만약 보는 것이 밝음과 어둠을 떠난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공(空)입니다. 마치 전진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의 성품은 스스로 소멸합니다. 순환하며 오고 가며, 자세히 찾아봐도, 본래 ‘나의 마음’이나 ‘나의 마음이 있는 곳’은 없습니다. 누가 위없는 깨달음을 구할 원인을 세우겠습니까? 여래께서는 이전에 ‘담연(湛然, 고요하고 맑음)한 본체는 원만하고 영원하다’고 말씀하셨지만, 당신의 진실한 말씀과 모순되게도, 그것은 경솔한 이론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떻게 여래께서 진실을 말하는 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원하옵건대 대자비(大慈悲)를 베푸시어 저의 무지와 침체를 열어 주소서.”
이 말을 듣고 아난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부처님께 말했다: “세존이시여, 당신의 가르침을 이해합니다. 영원한 상태에 도달하려면 우리의 수행 방법이 최종적인 과위(결과)에 상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의문이 있습니다.”
아난은 계속했다: “당신이 언급하신 보리, 열반, 진여, 불성 등은 맑고 완벽하며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감각이 대상을 떠난다면, 예를 들어 시각이 밝음과 어둠을 떠나고, 청각이 움직임과 고요함을 떠난다면, 그것들은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 대상을 떠나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아난은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완전히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어떻게 수행의 기초로 사용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수행을 위한 견고한 기반을 세워 저 영원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아난은 진심으로 말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정말 혼란스럽습니다. 이전에 말씀하신 ‘담연한 본체는 원만하고 영원하다’(청정하고, 미묘하며, 완벽하고, 영원하다)는 이 원리와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자비로 저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많이 배웠지만 아직 모든 번뇌(유루)를 다 없애지 못했다. 마음속으로는 전도(顚倒)의 원인만 알 뿐, 진짜 전도가 눈앞에 나타날 때는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너의 진심 어린 마음이 아직 믿고 복종하지 않았을까 두렵다. 이제 세상일을 들어 너의 의심을 풀어주도록 하겠다.” 즉시 여래께서 라후라에게 종을 한 번 치라고 명하셨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지금 들리느냐?”
아난의 질문을 듣고 부처님은 얼굴에 자비롭고 약간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셨다. 그는 아난에게 말했다: “아난아, 네가 아는 것은 많지만, 아직 번뇌를 완전히 없애지 못했구나. 혼란의 이유는 알지만, 정작 진짜 혼란을 마주할 때는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네 마음이 아직 진리를 깊이 믿고 따르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이다. 하지만 걱정 마라, 네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다.”
말씀을 마치고 부처님은 옆에 있는 라후라를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라후라야, 종을 울려라.”
“댕-” 종이 맑게 울렸다.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아난아, 방금 소리를 들었느냐?”
아난과 대중이 모두 말했다: “들었습니다.”
아난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대답했다: “들었습니다.”
종소리가 멈추고 소리가 없어졌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지금 들리느냐?”
잠시 후, 종소리가 사라졌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지금은 어떠냐, 어떤 소리가 들리느냐?”
아난과 대중이 모두 말했다: “들리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아난과 군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그때 라후라가 다시 쳤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지금 들리느냐?”
부처님은 라후라에게 다시 종을 울리라고 신호를 보냈다. “댕-” 종이 다시 울렸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지금 들리느냐?”
아난과 대중은 다시 들었다고 말했다.
모두 다시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왜 듣는다고 하고, 왜 듣지 못한다고 하느냐?”
부처님은 미소 지으며 아난에게 물으셨다: “아난아, 왜 때로는 들었다고 하고, 때로는 듣지 못했다고 하는지 설명해 줄 수 있느냐?”
아난과 대중이 모두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식종(종을 침)하면 들립니다. 만약 쳤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소리가 그치고 메아리마저 끊어지면, 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난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종이 울리면 소리를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리가 사라지면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리가 있으면 들린다고 하고, 소리가 없으면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래께서 다시 라후라에게 종을 치게 하시고, 아난에게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있느냐?”
아난을 바라보며, 부처님은 또 다른 실험을 하기로 하셨다.
그는 라후라에게 다시 말했다: “라후라야, 종을 다시 울려라.” “댕-” 종이 다시 울렸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있느냐?”
아난이 말했다: “소리가 있습니다.”
아난이 대답했다: “소리가 있습니다.”
잠시 후 소리가 그치자,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있느냐?”
잠시 후, 종소리가 점차 사라졌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지금은 어떠냐?”
아난과 대중이 대답했다: “소리가 없습니다.”
아난과 대중이 모두 대답했다: “소리가 없습니다.”
잠시 후 라후라가 다시 와서 종을 쳤고,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있느냐?”
부처님은 라후라에게 세 번째로 종을 울리라고 하셨다. “댕-”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있느냐?”
아난과 대중이 모두 말했다: “소리가 있습니다.”
아난과 대중이 입을 모아 말했다: “소리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왜 소리가 있다고 하고, 왜 소리가 없다고 하느냐?”
부처님은 미소 지으며 물으셨다: “아난아, 왜 때로는 소리가 있고 때로는 소리가 없는지 다시 설명해 줄 수 있느냐?”
아난과 대중이 모두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종을 치면 소리가 있다고 합니다. 만약 쳤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소리가 그치고 메아리마저 끊어지면, 소리가 없다고 합니다.”
아난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종이 울리면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소리가 있다고 합니다. 소리가 사라지면 들을 수 없으니 소리가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과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왜 지금 그렇게 혼란스럽고 모순되게 말하느냐?”
아난의 대답을 듣고, 부처님의 표정이 다소 진지해지셨다. 그는 아난과 자리에 있는 대중에게 말했다: “지금 너희 대답이 약간 자기모순적이지 않느냐?”
대중과 아난이 동시에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저희가 지금 어떤 점에서 혼란스럽고 모순된 것입니까?”
아난과 대중은 혼란스러워하며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가 어디서 잘못 말했습니까? 왜 저희가 자기 모순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들었느냐고 물으니, 너희는 들었다고 했다. 그 다음 내가 소리가 있느냐고 물으니, 너희는 소리가 있다고 했다. 너희는 정의 없이 ‘듣는 것’과 ‘소리’로 대답하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혼란스럽고 모순되지 않느냐? 아난아, 소리가 그치고 메아리가 없을 때, 너는 듣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만약 정말로 듣는 것이 없다면, 듣는 성품은 죽은 나무처럼 소멸했을 것이다. 종이 다시 울릴 때, 너는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있다고 알고 없다고 아는 것은 소리 먼지(聲塵) 그 자체이다. 아마도 그것이 있거나 없을 것이나, 듣는 성품이 어찌 너를 위해 있거나 없을 수 있겠느냐? 만약 듣는 것이 정말로 없다면, 듣는 것이 없다는 것을 누가 알겠느냐? 그러므로 아난아, 소리는 자연히 듣는 것 안에서 생겨나고 사라진다. 소리가 생겨나고 사라짐에 따라 너의 듣는 감각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너는 여전히 뒤바뀌어, 소리를 듣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네가 혼란을 대표하고 영원함을 단절로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너는 움직임과 고요함, 막힘과 트임 외에는 듣는 성품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부처님께서는 혼란스러워하는 아난과 대중을 보시고 자비롭게 미소를 지으며 설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소리를 들었느냐고 물었을 때, 너희는 들었다고 했다. 소리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너희는 있다고 했다. 너희의 대답은 ‘듣는 것’과 ‘소리’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이것이 자기 모순이 아니냐?”
부처님께서는 계속하셨습니다. “아난아, 너는 소리가 사라졌을 때 들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로 들을 수 없었다면, 너의 듣는 성품도 사라지지 않았겠느냐? 만약 그렇다면, 종이 다시 울렸을 때 어떻게 들을 수 있었겠느냐?”
부처님께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소리는 너의 듣는 것 안에서 생겨나고 사라지지만, 소리의 유무 때문에 너의 듣는 성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거울이 비친 물체가 오고 간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이 베개를 베고 자고 있는 것과 같다. 그가 자는 동안 가족 중 누군가가 옷을 다듬질하거나 쌀을 찧고 있다. 꿈속에서 그 사람은 다듬질하고 찧는 소리를 듣고 다른 것으로 착각한다. 아마도 북을 치거나 종을 치는 것으로. 꿈속에서 그는 왜 종소리가 나무나 돌 소리 같은지 의아해한다. 갑자기 그가 깨어나면 즉시 그것이 절구공이 소리임을 안다. 그는 가족에게 말한다. ‘방금 꿈을 꾸었는데, 쌀 찧는 소리를 북소리로 착각했어.’ 아난아, 꿈속의 그 사람이 어떻게 고요함과 움직임, 트임과 막힘, 통함과 막힘을 기억할 수 있었겠느냐? 비록 그의 몸은 잠들었지만, 그의 듣는 성품은 어둡지 않았다. 설사 네 몸이 녹아 없어지고 네 생명이 옮겨가고 희미해지더라도, 이 성품이 어찌 너를 위해 소멸하겠느냐?”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다른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고, 그의 가족이 근처에서 쌀을 찧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 사람은 꿈속에서 쌀 찧는 소리를 들었지만, 꿈속에서는 그 소리를 북이나 종 소리로 착각했다. 잠에서 깼을 때, 그는 갑자기 그것이 사실 쌀 찧는 소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처님께서는 설명하셨습니다. “잠을 잘 때조차 이 사람의 듣는 성품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너의 육신이 사라지더라도 너의 진정한 성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시작 없는 시간부터 모든 중생이 형상과 소리를 따르고 흐름과 변화 속에서 생각을 쫓기 때문에, 그들은 순수하고 묘하며 영원한 본질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영원한 것을 따르지 않고, 생겨남과 사라짐을 쫓는다. 이 때문에 그들은 생을 거듭하며 섞인 불순함 속에서 흐르고 돈다. 만약 그들이 생겨남과 사라짐을 버리고 진정한 영원함을 지킨다면, 영원한 빛이 나타날 것이다. 감각 기관, 대상, 의식은 즉시 사라질 것이다. 생각과 형상은 먼지이고, 의식과 감정은 오물이며, 둘 다 멀리 두어진다. 그러면 너의 법안(法眼)이 즉시 맑고 밝아질 것이다. 어찌 최고의 지혜와 깨달음을 얻지 못하겠느냐?”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시작 없는 시간부터 중생들은 외부의 색과 소리에 현혹되어 본래 순수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잊고 있었다. 만약 너희가 생사가 있는 현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실하고 영원한 성품을 붙잡을 수 있다면, 너희의 마음은 맑아지고 마침내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아난과 대중은 부처님의 설명을 듣고 새로운 통찰을 얻은 듯했습니다. 그들은 듣는 것의 진정한 성품이 소리의 유무를 초월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이는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