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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엄경 3권: 깨달음 후의 몸과 마음,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 6근, 6진, 6식의 관계.

능엄경 3권(전문): 깨달음 후의 마음, 몸,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 6근(감각 기관), 6진(감각 대상), 6식(의식)의 관계. 부처님은 혀와 맛, 몸과 감촉, 뜻과 법(대상) 사이의 관계와 그것들이 어떻게 상응하는 의식을 생성하는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의식의 기원을 탐구하며, 의식이 단순히 6근이나 6진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능엄경 3권 요약

  1. 6근, 6진, 6식의 관계:

    • 부처님은 혀와 맛, 몸과 감촉, 뜻과 법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어떻게 상응하는 의식을 생성하는지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 이러한 관계가 단순한 인과 관계나 자연 현상이 아니라 더 깊은 본질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2. 여래장의 개념:

    • 부처님은 ‘여래장’을 반복해서 언급하며 이것이 모든 현상의 근원임을 나타냈습니다.
    • 여래장이 본질적으로 청정하며 법계에 두루 퍼져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3. 4대(지, 수, 화, 풍)와 공에 대한 논의:

    • 부처님은 우물 파기, 불 피우기 등 다양한 예를 사용하여 4대 원소와 공의 본질을 설명했습니다.
    • 이러한 원소들의 성질이 모두 원융하며 여래장에서 비롯됨을 지적했습니다.
  4. 의식의 본질:

    • 의식의 근원을 탐구하며, 의식이 단순히 6근이나 6진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 아님을 지적했습니다.
    • 의식의 본성 또한 원만하고 고요하며 여래장과 불가분임을 강조했습니다.
  5. 망상과 실상:

    • 세상 사람들이 무지로 인해 현상을 인연이나 자연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 이것들은 단지 식심의 분별 계탁(분별하고 헤아림)일 뿐이며 실질적인 의미가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6. 깨달음의 경지:

    • 법문을 들은 후 아난과 대중들의 깨달음의 상태, 예를 들어 마음이 시방에 두루하고 시방의 공을 보는 것 등을 묘사했습니다.
    • 깨달음 후의 몸, 마음, 세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강조했습니다.
  7. 보살도의 발심:

    • 아난 등은 중생을 제도하기를 서원하며 자신을 위해 열반을 구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 모든 중생이 성불하도록 돕기 위해 먼저 오탁악세에 들어가겠다는 대승의 정신을 표명했습니다.
  8. 부처님에 대한 찬탄:

    • 부처님의 지혜와 가르침을 찬탄하며 ‘묘담총지부동존(묘하게 맑고 모든 것을 지닌 동요하지 않는 분)’, ‘수능엄왕’으로 묘사했습니다.
  9. 더 깊은 법에 대한 갈망:

    • 더 미세한 미혹을 해결할 수 있도록 부처님께 설법을 계속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 최상의 깨달음을 빨리 성취하고자 하는 소망을 나타냈습니다.

이 권에서는 마음의 의식, 감각 기관, 외부 대상의 본질과 그것들이 여래장과 맺는 관계를 깊이 탐구하는 동시에, 대승 불교의 보살 정신과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줍니다.

능엄경 3권 전문

“또 아난아, 어찌하여 6입(6근)이 본래 여래장의 묘진여성인가? 아난아, 눈을 부릅뜨고 보아서 피로해진 눈의 예를 생각해 보아라. 눈과 피로는 둘 다 동일한 보리(깨달음)의 본체이다. 부릅뜸이 피로라는 상을 만들어낸다. 명(밝음)과 암(어둠)이라는 두 가지 망진(허망한 티끌)으로 인해 봄(견)이 그 가운데 나타난다. 이러한 티끌의 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견성(보는 성품)이라 한다. 명과 암이라는 두 티끌을 여의면, 이 봄은 필경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아난아, 이 봄은 명이나 암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근(감각 기관)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공에서 생기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명에서 온다면 암이 올 때 멸해야 하므로 암을 보지 못해야 한다. 만약 암에서 온다면 명이 올 때 멸해야 하므로 명을 보지 못해야 한다. 만약 근에서 생긴다면 필연적으로 명도 암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견정(보는 능력)은 본래 자성이 없다. 만약 공에서 나온다면 앞의 티끌의 상을 볼 때 돌아와서 근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만약 공이 스스로 본다면, 그것이 너의 입(감각)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안입(눈)은 허망하며,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어떤 사람이 두 손가락으로 급히 귀를 막는 예를 생각해 보아라. 이근이 피로하기 때문에 머리 속에서 소리가 난다. 귀와 피로는 모두 동일한 보리의 본체이다. 움켜쥠이 피로의 상을 만들어낸다. 동(움직임)과 정(고요함)이라는 두 가지 망진으로 인해 들음(문)이 그 가운데 나타난다. 이러한 티끌의 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문성(듣는 성품)이라 한다. 동과 정이라는 두 티끌을 여의면, 이 들음은 필경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아난아, 이 들음은 동이나 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근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공에서 생기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정에서 온다면 동이 올 때 멸해야 하므로 동을 듣지 못해야 한다. 만약 동에서 온다면 정이 올 때 멸해야 하므로 정을 지각하지 못해야 한다. 만약 근에서 생긴다면 필연적으로 동도 정고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체(듣는 본체)는 본래 자성이 없다. 만약 공에서 나와서 듣는 것을 그 성질로 삼는다면, 그것은 공이 아니다. 또한, 만약 공이 스스로 듣는다면, 그것이 너의 입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이입(귀)은 허망하며,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어떤 사람이 급히 코를 훌쩍이는 예를 생각해 보아라. 오랫동안 훌쩍이면 피로해져서 코 안에 차가운 감촉이 생긴다. 그 감촉과는 별개로 통과 색(막힘), 허와 실, 그리고 온갖 향기로운 냄새와 악취가 있다. 코와 피로는 모두 동일한 보리의 본체이다. 움켜쥠이 피로의 상을 만들어낸다. 통과 색이라는 두 가지 망진으로 인해 냄새 맡음(후)이 그 가운데 나타난다. 이러한 티끌의 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후문성(냄새 맡는 성품)이라 한다. 통과 색이라는 두 티끌을 여의면, 이 냄새 맡음은 필경 실체가 없다.

“이 냄새 맡음은 통이나 색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근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공에서 생기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통에서 온다면 색이 올 때 멸해야 하는데 어떻게 색을 알겠느냐? 만약 색으로 인해 통이 있다면 냄새 맡음이 없어야 하는데 어떻게 향기와 악취를 발견하겠느냐? 만약 근에서 생긴다면 필연적으로 통도 색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체(냄새 맡는 본체)는 본래 자성이 없다. 만약 공에서 나온다면, 이 냄새 맡음은 돌이켜 너의 코를 맡아야 할 것이다. 만약 공이 스스로 냄새 맡는다면, 그것이 너의 입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비입(코)은 허망하며,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어떤 사람이 혀로 입술을 핥는 예를 생각해 보아라. 지나치게 핥으면 피로가 생긴다. 만약 그 사람이 병이 있으면 쓴맛이 난다. 병이 없는 사람은 약간의 단맛이 난다. 단맛과 쓴맛은 이 설근을 드러낸다. 움직이지 않을 때는 담(맛없음)의 성질이 항상 거기에 있다. 혀와 피로는 모두 동일한 보리의 본체이다. 움켜쥠이 피로의 상을 만들어낸다. 단맛, 쓴맛, 담이라는 두 가지 망진으로 인해 맛봄(상)이 그 가운데 나타난다. 이러한 티끌의 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지미성(맛보는 성품)이라 한다. 단맛과 쓴맛과 담이라는 두 티끌을 여의면, 이 맛봄은 필경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아난아, 이 쓴맛과 담을 맛보는 지각은 단맛이나 쓴맛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담으로 인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근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공에서 생기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단맛이나 쓴맛에서 온다면 담이 올 때 지각은 멸해야 하는데 어떻게 담을 알겠느냐? 만약 담에서 나온다면 단맛이 올 때 지각은 사라져야 하는데 어떻게 단맛과 쓴맛의 두 가지 상을 알겠느냐? 만약 혀에서 생긴다면 필연적으로 단맛도 담도 쓴맛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근은 본래 자성이 없다. 만약 공에서 나온다면 공이 스스로 맛보는 것이지 너의 입이 아는 것이 아니다. 또한, 만약 공이 스스로 안다면, 그것이 너의 입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설입(혀)은 허망하며,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어떤 사람이 찬 손으로 뜨거운 손을 만지는 예를 생각해 보아라. 만약 찬 기운이 강하면 뜨거운 손이 차가워진다. 만약 뜨거운 기운이 이기면 찬 손이 뜨거워진다. 이와 같이 이 합각의 접촉은 떨어진 상태에서의 앎을 드러낸다. 그 기세의 주고받음은 접촉으로 인한 피로를 가져온다. 몸과 피로는 모두 동일한 보리의 본체이다. 움켜쥠이 피로의 상을 만들어낸다. 이(떨어짐)와 합(붙음)이라는 두 가지 망진으로 인해 느낌(각)이 그 가운데 나타난다. 이러한 티끌의 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지각성(느끼는 성품)이라 한다. 이와 합, 위(거스름)와 순(따름)이라는 두 티끌을 여의면, 이 느낌은 필경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아난아, 이 느낌은 이나 합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위나 순으로 인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근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공에서 생기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합에서 온다면 이가 올 때는 이미 멸했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를 느끼겠느냐? 위와 순의 두 가지 상 또한 이와 같다. 만약 근에서 나온다면 필연적으로 이, 합, 위, 순의 네 가지 상은 없을 것이며, 그러면 너의 몸의 앎은 본래 자성이 없게 된다. 만약 공에서 나온다면 공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니, 그것이 너의 입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신입(몸)은 허망하며,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어떤 사람이 피로하여 잠자그 예를 생각해 보아라. 깊이 잠들면 깨어난다. 티끌(대상)을 보고 기억하며, 기억을 잃는 것을 망각이라 한다. 이 전도된 생, 주, 이, 멸이 습관을 빨아들여 중심(중)으로 돌린다. 그것들은 서로 넘어서지 않는다. 이것을 의지근(지성의 뿌리)이라 한다. 뜻과 피로는 모두 동일한 보리의 본체이다. 움켜쥠이 피로의 상을 만들어낸다. 생과 멸이라는 두 가지 망진으로 인해 집지(지식을 모음)가 그 가운데 나타난다. 안의 티끌을 빨아 모으고, 보고 들음이 역류하여 흐름을 거슬러 땅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을 각지성(아는 성품)이라 한다. 깨어있음(오)과 잠듦(매), 생과 멸이라는 두 티끌을 여의면, 이 아는 성품은 필경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아난아, 이 아는 근은 깨어있음이나 잠듦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생이나 멸로 인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근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공에서 생기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깨어있음에서 온다면 잠듦이 올 때 멸해야 하는데 무엇을 잠듦으로 삼겠느냐? 만약 생길 때 반드시 있다면 멸이 올 때 무와 같아질 것이니, 누가 멸을 받겠느냐? 만약 멸에서 있다면 생이 올 때 멸해서 없어질 것이니, 누가 생을 알겠느냐? 만약 근에서 나온다면, 깨어있음과 잠듦의 두 상은 몸의 열림과 닫힘을 따르지만, 이 두 실체를 여의면, 이 아는 자는 허공의 꽃과 같아서 필경 성품이 없다. 만약 공에서 생기면 자연히 공이 아는 것이니, 그것이 너의 입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의입(뜻)은 허망하며,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 아난아, 어찌하여 12처가 본래 여래장의 묘진여성인가? 아난아, 기원정사의 숲과 샘, 연못을 보아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물건들이 색이 눈의 봄(견)을 생기게 하느냐, 아니면 눈이 색의 상을 생기게 하느냐? 아난아, 만약 안근이 색의 상을 생기게 한다면, 공을 볼 때 그것은 색이 아니므로 색의 성질은 소멸해야 한다. 만약 소멸하면 나타나는 모든 것이 무가 된다. 만약 색의 상이 없어지면 누가 공의 실체를 밝히겠느냐? 공 또한 이와 같다.

“만약 색의 티끌이 눈의 봄을 생기게 한다면, 공을 볼 때 그것은 색이 아니므로 봄은 소실되어야 한다. 만약 소실되면 아무것도 없게 된다. 누가 공과 색을 이해하겠느냐? 그러므로 봄과 색과 공에는 장소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색과 견의 두 처는 허망하며,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니다.

“아난아, 기원정사에서 식사 준비가 되었을 때의 북소리와 대중이 모일 때의 종소리를 다시 들어보아라. 종소리와 북소리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어진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물건들은 소리가 귀 곁으로 오는 것이냐? 아니면 귀가 소리의 장소로 가는 것이냐? 아난아, 만약 소리가 귀 곁으로 온다면, 내가 탁발하기 위해 사위성에 가고 기원정사에 있지 않을 때, 만약 소리가 필연적으로 아난의 귀로 온다면, 목건련과 가섭은 그것을 함께 듣지 말아야 한다. 하물며 1,250명의 사문들이 종소리를 함께 듣고 식사 장소로 오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만약 너의 귀가 소리 곁으로 간다면, 내가 기원정사로 돌아오고 사위성에 없을 때, 네가 북소리를 들으면 너의 귀는 이미 북을 치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그러면 동시에 종소리가 울릴 때, 너는 그것을 함께 듣지 못해야 한다. 하물며 코끼리, 말, 소, 양 등의 온갖 소리를 듣는 것이 가능하겠느냐? 만약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없다면 듣는 것 또한 없다. 그러므로 듣는 것과 소리에는 장소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문과 성의 두 처는 허망하며,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니다.

“아난아, 이 향로 안의 전단을 맡아 보아라. 이 향을 1주(铢) 피우면 그 향기는 사위성 40리 이내에서 동시에 맡을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향기는 전단의 나무에서 생기는 것이냐, 너의 코에서 생기는 것이냐? 아니면 공에서 생기는 것이냐? 아난아, 만약 이 향기가 너의 코에서 생긴다면 코에서 생긴다고 말해야 하며 코에서 나와야 한다. 코는 전단이 아니다. 어찌 코 속에 전단의 기운이 있겠느냐? 향기를 듣는다(맡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코로 들어가야 한다. 향이 코에서 나오는 것을 냄새 맡는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만약 공에서 생긴다면, 공의 성질은 상주하고 불변하므로 향기는 항상 거기에 있어야 한다. 왜 향로 안에서 이 마른 나무를 태울 필요가 있겠느냐? 만약 나무에서 생긴다면, 이 향기의 실체는 태워서 연기가 됨으로써 생긴다. 만약 코가 그것을 맡는다면 그것은 연기에 덮여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연기는 공중으로 피어오르고 아직 멀리 미치지 못했는데, 어찌 40리 이내에서 맡을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향기, 악취, 냄새 맡는 것에는 장소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후와 향의 두 처는 허망하며,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니다.

“아난아, 너는 항상 2시(아침과 점심)에 대중 속에서 발우를 가지고 있다. 그 동안 소, 낙, 제호와 같은 상미(최상의 맛)를 만날 때가 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맛은 공중에 생기는 것이냐, 혀 속에 생기는 것이냐? 아니면 음식 속에 생기는 것이냐? 아난아, 만약 이 맛이 너의 혀에서 생긴다면 너의 입 속에는 혀가 하나뿐이다. 만약 그 혀가 이미 소의 맛이 되었다면, 흑석밀(검은 설탕)을 만났을 때 변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변하지 않는다면 맛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만약 변한다면 혀는 여러 개의 몸이 아니다. 어찌 하나의 혀가 많은 맛을 알 수 있겠느냐?

“만약 음식에서 생긴다면, 음식에는 식(의식)이 없다. 어찌 스스로를 알 수 있겠느냐? 또한, 만약 음식이 스스로 안다면 그것은 타인이 먹는 것과 같으니, 너의 맛을 안다는 이름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만약 공에서 생긴다면, 네가 허공을 씹을 때 무슨 맛이 나느냐? 만약 허공이 필연적으로 짠맛을 만든다면, 그것은 짜기 때문에 너의 혀를 짜게 하고 너의 얼굴도 짜게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세계의 사람은 바다의 물고기와 같게 될 것이다. 항상 짠맛을 받고 있다면 담(싱거움)을 알지 못할 것이다. 만약 담을 식별하지 못한다면 짠맛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필연적으로 앎이 없다면 어찌 맛이라 부를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맛, 혀, 맛보는 것에는 장소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상(맛보는 것)과 미의 두 처는 허망하며,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니다.

아난아, 너는 아침마다 손으로 머리를 만진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만짐을 아는 것은 만지는 능력이 있는 손에 있는가, 아니면 머리에 있는가? 만약 손에 있다면 머리는 앎이 없을 것이니, 어떻게 접촉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만약 머리에 있다면 손은 쓸모가 없을 것이니, 어떻게 접촉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만약 각각에 있다면, 아난아, 너는 응당 두 개의 몸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머리와 손이 한 번의 접촉으로 생긴다면, 손과 머리는 마땅히 한 몸이어야 한다. 만약 한 몸이라면 접촉은 성립되지 않는다. 만약 두 몸이라면 접촉은 어디에 있는가? 능동적인 쪽에 있으면 수동적인 쪽에 없고, 수동적인 쪽에 있으면 능동적인 쪽에 없다. 허공이 너와 접촉을 이루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접촉을 아는 것과 몸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곧 몸과 접촉은 둘 다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요 자연성도 아니다.

아난아, 너는 항상 의식(意) 속에서 선, 악, 무기(無記)의 세 가지 성질을 반연하여 법칙(法)을 생성한다. 이 법은 마음에서 생기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을 떠나 따로 처소가 있는 것인가?

아난아, 만약 마음(心)이라면 법은 티끌(塵, 대상)이 아니며, 마음이 반연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처(處)를 이루겠느냐? 만약 마음에 떠나 따로 처소가 있다면, 법의 자성은 아는 것인가, 알지 못하는 것인가? 만약 아는 것이라면 이름하여 마음이라 할 것이니, 너와 다르면 티끌이 아니다. 다른 마음과 같다면 곧 너이자 마음이니, 어찌 너의 마음이 너와 달리 두 개가 있겠느냐? 만약 알지 못하는 것이라면, 이 티끌은 색, 성, 향, 미, 이합, 냉난도 아니며 허공의 모양도 아닌데, 마땅히 어디에 있겠느냐? 지금 색과 공 안에 표시가 없고, 인간계 밖에 다시 허공이 있을 리 없다. 마음이 반연하는 바가 아니라면 처는 어디로부터 서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법과 마음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곧 의(意)와 법(法)은 둘 다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요 자연성도 아니다.

다시 아난아, 어찌하여 십팔계(十八界)가 본래 여래장의 묘한 진여성(眞如性)인가? 아난아, 네가 밝힌 바와 같이 안(眼)과 색(色)을 인연으로 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이 식은 눈으로 인하여 생겨서 눈을 계(界)로 삼는가, 색으로 인하여 생겨서 색을 계로 삼는가? 아난아, 만약 눈으로 인하여 생긴다면, 색과 공이 없으면 분별할 것이 없다. 설령 너의 식이 있다 한들 무엇에 쓰겠느냐? 너의 봄(見)은 청, 황, 적, 백이 아니며 표시할 바가 없으니, 어디서 계를 세우겠느냐?

만약 색으로 인하여 생긴다면, 허공에 색이 없을 때 너의 식은 마땅히 멸해야 한다. 어찌 식이 허공의 성질을 알겠느냐? 만약 색이 변할 때 너 또한 그 색상의 천변함을 알고 너의 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계는 어디서 서겠느냐? 변하는 것을 따르면 계의 모양이 저절로 없고, 변하지 않으면 항상 색으로부터 생긴 것이 되니 응당 허공의 소재를 알지 못할 것이다. 만약 두 가지 안과 색이 함께 생긴다면, 합하면 중간이 떨어지고 떨어지면 둘 다 합하여, 체성이 잡란해지니 어떻게 계를 이루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안과 색을 인연으로 하여 안식계가 생긴다는 것은 세 곳 모두 없다. 곧 안과 색 및 색계의 셋은 본래 인연도 아니요 자연성도 아니다.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바와 같이 이(耳)와 성(聲)을 인연으로 하여 이식(耳識)이 생긴다. 이 식은 귀로 인하여 생겨서 귀를 계로 삼는가, 소리로 인하여 생겨서 소리를 계로 삼는가?

아난아, 만약 귀로 인하여 생긴다면, 동(動)과 정(靜)의 두 모양이 현전하지 않으면 근(根)은 앎을 이루지 못하여 반드시 아는 바가 없을 것이다. 앎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식은 어떤 모양이겠느냐? 만약 귀의 들음을 취한다면, 동과 정이 없으므로 들음이 성립되지 않는데, 어찌 귀의 모양이 색이나 촉진과 섞여 식계라 이름하겠느냐? 그렇다면 이식계는 다시 누구로부터 서겠느냐? 만약 소리에서 생긴다면, 식은 소리로 인하여 있으니 들음과는 관계가 없다. 들음이 없으면 소리의 모양이 있는 곳도 없어진다. 식이 소리로부터 생기고, 소리가 들음으로 인하여 소리의 모양이 있다고 허용한다면, 들음은 응당 식을 들어야 하고, 듣지 못하면 계가 아니다. 들음이 소리와 같다면 식은 이미 들린 것이니 누가 듣는 식을 알겠느냐? 만약 아는 자가 없다면 마침내 초목과 같을 것이니, 소리와 들음이 섞여 중간의 계를 이루어서는 안 된다. 계에 중간 위치가 없으면 안팎의 모양은 다시 어디서 이루어지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성을 인연으로 하여 이식계가 생긴다는 것은 세 곳 모두 없다. 곧 이와 성 및 성계의 셋은 본래 인연도 아니요 자연성도 아니다.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바와 같이 비(鼻)와 향(香)을 인연으로 하여 비식(鼻識)이 생긴다. 이 식은 코로 인하여 생겨서 코를 계로 삼는가, 향으로 인하여 생겨서 향을 계로 삼는가?

아난아, 만약 코로 인하여 생긴다면, 너의 마음속에서 무엇을 코라고 하는가? 두 개의 발톱 같은 육체적 형상을 취하는가, 냄새 맡아 아는 동요하는 성질을 취하는가? 만약 육체적 형상을 취한다면, 육질은 몸이요, 몸의 앎은 촉(觸)이니, 몸이라 이름하고 코가 아니며, 촉이라 이름하면 곧 티끌이다. 코에는 아직 이름이 없는데 어떻게 계를 세우겠느냐? 만약 냄새 맡아 아는 것을 취한다면, 또 너의 마음속에서 무엇을 앎으로 삼느냐? 살(肉)을 앎으로 삼으면 살의 앎은 본래 촉이지 코가 아니다. 허공을 앎으로 삼으면 허공이 스스로 아는 것이니 살은 응당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다면 응당 허공이 너이고 너의 몸은 앎이 아닐 것이다. 오늘 아난은 응당 소재가 없을 것이다. 만약 향을 앎으로 삼으면 앎은 저절로 향에 속하니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만약 향기와 악취가 반드시 너의 코를 생기게 한다면, 저 향기와 악취 두 종류의 흐르는 기운은 이란수와 전단나무에서 생기지 않는다. 두 물건이 오지 않을 때 너는 스스로 코를 맡아 향기라 하느냐 악취라 하느냐? 악취라면 향기가 아니요, 향기라면 응당 악취가 아니다. 만약 향기와 악취 둘 다 맡을 수 있다면, 너 한 사람이 두 개의 코를 가진 셈이 된다. 나에게 두 명의 아난이 있다고 묻는다면, 누가 너의 몸이냐? 만약 코가 하나라면 향기와 악취에 둘이 없다. 악취가 곧 향기가 되고 향기가 다시 악취가 된다면, 두 성질이 있지 않아 계는 누구로부터 서겠느냐? 만약 향으로 인하여 생긴다면 식은 향으로 인하여 있다. 눈이 봄(見)이 있으면서 눈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향으로 인하여 있는 까닭에 응당 향을 알지 못할 것이다. 안다면 생긴 것이 아니요, 알지 못하면 식이 아니다. 향에 앎이 있지 않다면 향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식이 향을 알지 못하면 계가 향으로부터 건립되는 것이 아니다. 중간이 없으면 안팎이 성립하지 않는다. 저 모든 냄새 맡는 성질은 필경 허망하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비와 향을 인연으로 하여 비식계가 생긴다는 것은 세 곳 모두 없다. 곧 비와 향 및 향계의 셋은 본래 인연도 아니요 자연성도 아니다.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바와 같이 설(舌)과 미(味)를 인연으로 하여 설식(舌識)이 생긴다. 이 식은 혀로 인하여 생겨서 혀를 계로 삼는가, 맛으로 인하여 생겨서 맛을 계로 삼는가?

아난아, 만약 혀로 인하여 생긴다면, 세간의 사탕수수, 오매, 황련, 석염, 세신, 생강, 계피 등은 모두 맛이 없을 것이다. 너는 스스로 혀를 맛보아 단가 쓴가? 만약 혀의 성질이 쓰다면 누가 와서 혀를 맛보느냐? 혀는 스스로 맛보지 못하는데 누가 지각하는가? 혀의 성질이 쓰지 않다면 맛이 저절로 생기지 않으니, 어떻게 계를 세우겠느냐? 만약 맛으로 인하여 생긴다면 식은 저절로 맛이 되고, 설근과 같아서 응당 스스로 맛보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식이 맛인지 맛이 아닌지를 알겠느냐?

또 일체의 맛은 한 물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맛이 이미 여럿 생기니, 식도 응당 여러 체(體)여야 한다. 식의 체가 만약 하나라면, 체는 반드시 맛에서 생긴다. 짠맛, 싱거운 맛, 단맛, 매운 맛이 화합하여 함께 생겨, 여러 변이의 모양이 동일한 하나의 맛이 되니 응당 분별이 없어야 한다. 분별이 이미 없다면 곧 식이라 이름하지 못한다. 어찌 다시 설, 미, 식계라 이름하겠느냐? 허공이 너의 심식을 생기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혀와 맛의 화합도 바로 그 가운데 본래 자성이 없으니, 어떻게 계가 생기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설과 미를 인연으로 하여 설식계가 생긴다는 것은 세 곳 모두 없다. 곧 설과 미 및 설계의 셋은 본래 인연도 아니요 자연성도 아니다.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바와 같이 신(身)과 촉(觸)을 인연으로 하여 신식(身識)이 생긴다. 이 식은 몸으로 인하여 생겨서 몸을 계로 삼는가, 촉으로 인하여 생겨서 촉을 계로 삼는가?

아난아, 만약 몸으로 인하여 생긴다면 반드시 합(合)과 이(離)가 없을 것이다. 두 각관(覺觀)의 연(緣)이 없는데 몸이 무엇을 알겠느냐? 만약 촉으로 인하여 생긴다면 반드시 너의 몸이 없을 것이다. 몸이 아닌 자가 누가 있어 합과 이를 알겠느냐? 아난아, 물건은 촉을 알지 못하고 몸이 촉이 있음을 안다. 몸을 아는 것이 곧 촉이요, 촉을 아는 것이 곧 몸이다. 촉이라는 것은 몸이 아니요, 몸이라는 것은 촉이 아니다. 몸과 촉 두 모양은 본래 처소가 없다. 몸에 합하면 곧 몸 자체의 성질이 되고, 몸을 여의면 곧 허공 등의 모양이 된다. 안팎이 성립하지 않는데 중간이 어떻게 서겠느냐? 중간이 다시 서지 않으면 안팎의 성질이 공(空)하다. 곧 너의 식이 생겨도 누구로부터 계를 세우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신과 촉을 인연으로 하여 신식계가 생긴다는 것은 세 곳 모두 없다. 곧 신과 촉 및 신계의 셋은 본래 인연도 아니요 자연성도 아니다.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바와 같이 의(意)와 법(法)을 인연으로 하여 의식(意識)이 생긴다. 이 식은 뜻(意)으로 인하여 생겨서 뜻을 계로 삼는가, 법으로 인하여 생겨서 법을 계로 삼는가?

아난아, 만약 뜻으로 인하여 생긴다면, 너의 뜻 중에는 반드시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너의 뜻을 발명한다. 만약 앞의 법이 없으면 뜻은 생길 곳이 없고, 연을 여의어 형체가 없는데 식을 장차 어디에 쓰겠느냐? 또 너의 식심(識心)과 여러 사량(思量) 및 요별성(了別性)은 같은가 다른가? 같으면 곧 뜻인데 어찌 생긴다고 하느냐? 뜻과 다르고 같지 않다면 응당 아는 바가 없을 것이다. 만약 아는 바가 없다면 어찌 뜻이 생기겠느냐? 만약 아는 바가 있다면 어찌 뜻을 알겠느냐? 같음과 다름의 두 성질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데 계가 어떻게 서겠느냐?

만약 법으로 인하여 생긴다면, 세간의 모든 법은 오진(五塵)을 여의지 않는다. 너는 색법, 성법, 향법, 미법 및 촉법을 관찰해 보아라. 그 형상이 분명하다. 오근을 상대하는 것이지 뜻이 거두는 바가 아니다. 너의 식은 결정코 법에 의하여 생기는데, 너는 지금 법을 자세히 관찰해 보아라. 법은 어떤 모양인가? 만약 색, 공, 동, 정, 통, 색, 합, 이, 생, 멸을 여의면, 이 모든 모양을 넘어서는 마침내 얻을 것이 없다. 생기면 색, 공, 제법 등이 생기고, 멸하면 색, 공, 제법 등이 멸한다. 인(因)이 되는 바가 이미 없는데, 인으로 하여 생기는 식은 어떤 형상을 짓겠느냐? 형상이 있지 않은데 계가 어떻게 생기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의와 법을 인연으로 하여 의식계가 생긴다는 것은 세 곳 모두 없다. 곧 의와 법 및 의계의 셋은 본래 인연도 아니요 자연성도 아니다.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항상 화합 인연을 설하시고, 일체 세간의 갖가지 변화는 다 사대(四大)의 화합으로 인하여 발명된다고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인연과 자연 두 가지를 모두 배척하십니까? 저는 지금 이 뜻이 어디에 속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컨대 애민함을 드리우사 중생을 위하여 중도료의(中道了義)의 희론(戲論) 없는 법을 개시해 주십시오.”

그때 세존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먼저 성문과 연각의 여러 소승법을 싫어하여 여의고, 발심하여 부지런히 위없는 보리를 구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너를 위하여 제일의제(第一義諦)를 개시한다. 어찌하여 다시 세간의 희론과 망상 인연을 가지고 스스로 얽어매느냐? 네가 비록 많이 들었으나(多聞), 마치 약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진짜 약이 앞에 나타나도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여래는 이를 참으로 가련히 여길 만하다고 말한다.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내가 마땅히 너를 위하여 분별하여 개시하고, 또한 미래에 대승을 닦는 자들로 하여금 실상을 통달하게 하겠다.” 아난은 잠자코 부처님의 성스러운 뜻을 받들었다.

아난아, 네가 말한 바와 같이 사대가 화합하여 세간의 갖가지 변화를 발명한다. 아난아, 만약 저 대성(大性)의 체가 화합이 아니라면, 여러 대(大)와 섞이고 합할 수 없다. 마치 허공이 여러 색과 화합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화합한다면 변화와 같아서, 시작과 끝이 서로 이루고 생과 멸이 상속한다. 나고 죽고 죽고 나고, 나고 나고 죽고 죽고 하여, 마치 불바퀴(旋火輪)를 돌리는 것과 같이 쉴 새가 없다.

아난아, 마치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다시 물이 되는 것과 같으니라. 너는 지성(地性)을 관찰해 보라. 거칠면 대지가 되고 미세하면 미진이 된다. 인허진(隣虛塵)에 이르러 저 극미를 분석하면 색의 가장자리 모양은 7분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인허를 분석하면 곧 진실한 공의 성질이다. 아난아, 만약 이 인허를 분석하여 허공을 이룬다면, 마땅히 알라. 허공이 색상을 낳는다는 것을. 너는 지금 화합으로 말미암아 세간의 모든 변화의 상이 생긴다고 물었다. 너는 이 하나의 인허진을 관찰해 보라. 몇 개의 허공을 사용하여 화합하여 있게 되었는가? 응당 인허가 합하여 인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인허진을 분석하여 공으로 들어간다면, 몇 개의 색상을 사용하여 합하여 허공을 이루겠느냐?

만약 색이 합할 때 합한 색은 공이 아니다. 만약 공이 합할 때 합한 공은 색이 아니다. 색은 오히려 분석할 수 있지만 공은 어떻게 합하겠느냐? 너는 본래 여래장 중에서 성색(性色)이 진공(真空)이고 성공(性空)이 진색(真色)이며, 청정하고 본연하여 법계에 두루함을 알지 못한다.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아는 양에 응하고, 업을 따라 발현하여 세간의 무지로 인연 및 자연성이라고 미혹한다. 이는 다 식심(識心)이 분별하고 계탁한 것이니, 단지 말(言說)만 있을 뿐 도무지 실다운 뜻(實義)은 없다.

아난아, 화성(火性)은 자아가 없어 여러 인연에 기탁한다. 너는 성안의 아직 밥 먹지 않은 집에서 밥을 지으려 할 때, 손에 양수(陽燧, 불을 취하는 거울)를 쥐고 해 앞에서 불을 구하는 것을 보아라. 아난아, 화합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마치 나와 너, 1250 비구가 지금 하나의 대중이 된 것과 같다. 대중은 비록 하나이지만 그 근본을 따져보면 각각 몸이 있고, 모두 태어난 곳과 씨족과 이름이 있다. 사리불과 같은 바라문 종족, 우루빈라와 같은 가섭파 종족, 나아가 아난과 같은 구담 종성 등이다. 아난아, 만약 이 화성이 화합으로 인하여 있다면, 저 사람이 거울을 쥐고 해에서 불을 구할 때, 이 불은 거울 속에서 나오는가, 쑥에서 나오는가, 해에서 오는가?

아난아, 만약 해에서 온다면 스스로 너의 손안의 쑥을 태울 수 있을 것이니, 오는 곳의 숲과 나무가 다 타야 할 것이다. 만약 거울 속에서 나온다면 스스로 거울에서 나와 쑥을 태울 수 있을 것이니, 거울은 어찌하여 녹지 않느냐? 굽은 너의 손이 쥐고 있어도 아직 열기가 없는데 어떻게 녹겠느냐? 만약 쑥에서 생긴다면 어찌하여 해와 거울의 광명이 서로 접함을 빌린 연후에 불이 생기느냐? 너는 또 자세히 관찰해 보라. 거울은 손이 쥠으로 인하여 있고, 해는 하늘에서 오며, 쑥은 본래 땅에서 생겼다. 불은 어느 방위에서 유력(遊歷)하여 여기에 왔는가? 해와 거울은 멀리 떨어져 있어 화(和)도 아니요 합(合)도 아니다. 응당 불빛이 좇아온 곳 없이 저절로 있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아직 여래장 중에서 성화(性火)가 진공(真空)이고 성공(性空)이 진화(真火)이며, 청정하고 본연하여 법계에 두루함을 알지 못한다.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아는 양에 응한다.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상 사람이 한 곳에서 거울을 쥐면 한 곳에서 불이 생기고, 법계에 두루 쥐면 세간에 가득 일어난다. 세간에 두루 일어나는데 어찌 방소(方所)가 있겠느냐? 업을 따라 발현하여 세간의 무지로 인연 및 자연성이라고 미혹한다. 이는 다 식심(識心)이 분별하고 계탁한 것이니, 단지 말(言說)만 있을 뿐 도무지 실다운 뜻(實義)은 없다.

아난아, 물의 성질은 일정하지 않아 흐르고 멈춤에 항상함이 없다. 마치 사위성(室羅城)의 가비라(迦毘羅) 선인, 착가라(斫迦羅) 선인, 그리고 발두마(鉢頭摩) 하사다(訶薩多) 등 여러 대환술사들이 태음(달)의 정기를 구하여 환약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이 환술사들은 백월(보름달)의 대낮에 방제(물을 받는 그릇)를 손에 들고 달빛 속의 물을 받는다. 이 물은 구슬에서 나오는 것인가, 공중에서 절로 생기는 것인가, 아니면 달에서 오는 것인가? 아난아, 만약 달에서 오는 것이라면, 멀리서도 구슬로 하여금 물이 나오게 할 수 있으니, 지나가는 숲과 나무들도 마땅히 다 물을 토해내야 할 것이다. 흐른다면 어찌 방제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겠느냐? 물이 흐르지 않는다면 명수(明水)는 달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다. 만약 구슬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이 구슬 속에는 항상 물이 흐르고 있어야 할 것이다. 어찌 한밤중이나 백월의 대낮에 받기를 기다리겠느냐? 만약 공중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허공의 성질은 끝이 없으니 물도 마땅히 끝이 없을 것이다. 사람과 하늘이 모두 다 물에 빠지게 될 것이다. 어떻게 다시 물과 육지와 공중을 다니는 것이 있겠느냐?

너는 다시 자세히 관찰해 보아라. 달은 하늘에 있고, 구슬은 손에 쥐고 있으며, 구슬의 물을 받는 접시는 본인이 설치한 것이다. 물은 어디서 이곳으로 흘러들었느냐? 달과 구슬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화합한 것이 아니다. 물의 정기가 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게 절로 있을 수는 없다. 너는 아직 여래장(如來藏) 속에 물의 성품이 진공(眞空)이며 공의 성품이 진수(眞水)여서, 청정하고 본연하여 법계에 두루함을 알지 못하는구나. 중생의 마음을 따라 아는 양만큼 나타나는 것이다. 한 곳에서 구슬을 쥐면 한 곳에서 물이 나오고, 법계에 두루 쥐면 법계에 가득 생긴다. 세간에 가득히 생기는데 어찌 특정한 장소가 있겠느냐? 업을 따라 발견되는 것이거늘, 세간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이나 자연성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모두가 의식의 분별로 헤아리는 것이니, 말만 있을 뿐 진실한 뜻은 없다.

아난아, 바람의 성질은 실체가 없으며, 움직이고 고요함이 일정하지 않다. 네가 항상 옷을 매만지고 대중 속에 들어갈 때, 승가리(大衣) 자락이 움직여 곁에 있는 사람에게 미치면 미풍이 그 사람의 얼굴을 스친다. 이 바람은 가사 자락에서 나오는 것인가, 허공에서 생기는 것인가, 아니면 그 사람의 얼굴에서 생기는 것인가? 아난아, 이 바람이 만약 가사 자락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너는 바람을 입고 있는 것이니, 옷이 날리고 흔들리면 마땅히 너의 몸을 떠나야 할 것이다. 내가 지금 설법을 하고 있어 모임 중에 옷을 드리우고 있는데, 너는 내 옷의 바람이 어디에 있는지 보아라. 옷 속에 바람을 저장하는 곳이 있을 리가 없다.

만약 허공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너의 옷이 움직이지 않을 때는 왜 스치지 않느냐? 허공의 성질은 상주하니 바람도 마땅히 항상 생겨야 할 것이다. 만약 바람이 없을 때 허공이 멸하는 것이라면, 바람이 멸하는 것은 볼 수 있지만 허공이 멸하는 것은 어떤 모양이냐? 만약 생멸이 있다면 허공이라 이름할 수 없다. 허공이라고 이름한다면 어찌 바람이 나오겠느냐? 만약 바람이 절로 생겨서 저 스치는 얼굴로 간다면, 저 얼굴에서 생길 때는 마땅히 너를 스쳐야 할 것이다. 네가 스스로 옷을 매만지는데 어찌 거꾸로 스치겠느냐?

너는 자세히 관찰해 보아라. 옷을 매만지는 것은 너에게 있고, 얼굴은 저 사람에게 속한다. 허공은 고요하여 유동에 참여하지 않는데, 바람은 어디서부터 고동쳐 이곳에 왔느냐? 바람과 허공은 성질이 달라 섞이거나 합하지 않는다. 바람의 성질이 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게 절로 있을 수는 없다. 너는 완연히 여래장 속에 바람의 성품이 진공이며 공의 성품이 진풍(眞風)이어서, 청정하고 본연하여 법계에 두루함을 알지 못하는구나. 중생의 마음을 따라 아는 양만큼 나타나는 것이다. 아난아, 네가 한 사람이 옷을 약간 움직이면 미풍이 나오고, 법계에 두루 떨치면 온 국토에 가득 생긴다. 세간에 두루한데 어찌 특정한 장소가 있겠느냐? 업을 따라 발견되는 것이거늘, 세간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이나 자연성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모두가 의식의 분별로 헤아리는 것이니, 말만 있을 뿐 진실한 뜻은 없다.

아난아, 공(空)의 성질은 형체가 없어 색(色)으로 인해 드러난다. 마치 사위성에서 강과 멀리 떨어진 곳에, 여러 찰제리 종족과 바라문, 비사, 수타, 그리고 파라타, 전다라 등이 새로 주거지를 세우고 우물을 파서 물을 구하는 것과 같다. 흙을 한 자 파내면 그 속에 한 자의 허공이 있고, 이렇게 흙을 한 길 파내면 그 중간에 한 길의 허공을 얻는다. 허공의 얕고 깊음은 흙을 파낸 먄큼에 따른다.

이 공은 흙으로 인해 나오는 것인가? 파는 것으로 인해 있는 것인가? 원인 없이 절로 생기는 것인가? 아난아, 만약 이 공이 원인 없이 절로 생기는 것이라면, 흙을 파기 전에는 왜 막힘이 없고, 오직 대지만이 멀리 통달함이 없이 보이는가? 만약 흙으로 인해 나오는 것이라면, 흙이 나올 때 마땅히 공이 들어가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흙이 먼저 나오고 공이 들어가는 것이 없다면, 어찌 허공이 흙으로 인해 나온다고 하겠느냐? 만약 나오고 들어감이 없다면, 공과 흙은 원래 다른 원인이 없어야 할 것이다. 다르지 않다면 같은 것이니, 흙이 나올 때 공은 왜 나오지 않느냐?

만약 파는 것으로 인해 나온다면, 파서 나온 공은 흙을 내지 않았어야 한다. 파는 것으로 인하지 않는다면, 파서 스스로 흙을 낼 때 어찌 공을 보느냐? 너는 더욱 자세히 살피고, 자세히 살피고 자세히 관찰해 보아라. 파는 것은 사람의 손을 따라 방향대로 운전하고, 흙은 땅으로 인해 이동한다. 이와 같은 허공은 무엇에 인해 나오느냐? 파는 것과 공은 허와 실이라 서로 쓰임이 되지 않고, 섞이거나 합하지 않는다. 허공이 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게 절로 나올 수는 없다.

만약 이 허공의 성질이 원만하고 두루하여 본래 동요하지 않는다면, 눈앞의 지수화풍은 모두 5대라 이름하며, 성품은 참되고 원융하여 모두 여래장이며 본래 생멸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아난아, 너의 마음이 혼미하여 사대(四大)가 원래 여래장인 줄을 깨닫지 못하는구나. 마땅히 허공이 나오는지 들어가는지,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는지 관찰해야 한다. 너는 전혀 여래장 속에 성각(性覺)은 진공(眞空)이며 성공(性空)은 진각(眞覺)이어서, 청정하고 본연하여 법계에 두루함을 알지 못하는구나. 중생의 마음을 따라 아는 양만큼 나타나는 것이다.

아난아, 하나의 우물에 공이 있으면 하나의 우물이 생기듯이, 시방의 허공도 또한 이와 같다. 시방에 원만하니 어찌 특정한 장소가 있겠느냐? 업을 따라 발견되는 것이거늘, 세간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이나 자연성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모두가 의식의 분별로 헤아리는 것이니, 말만 있을 뿐 진실한 뜻은 없다.

아난아, 견각(見覺)에는 앎이 없고 색과 공으로 인해 있다. 예를 들어 네가 지금 기원정사에 있는데, 아침에는 밝고 저녁에는 어두우며, 만약 한밤중에 백월이면 빛나고 흑월이면 어둡다. 명암 등은 봄(見)으로 인해 분석된다. 이 봄은 명암이나 태허공과 더불어 같은 일체인가, 일체가 아닌가? 혹은 같으면서 같지 않고, 다르면서 다르지 않은 것인가?

아난아, 만약 이 봄이 명암이나 허공과 원래 일체라면, 밝음과 어둠의 두 체는 서로 없어질 것이다. 어두울 때는 밝음이 없고, 밝을 때는 어둡지 않다. 만약 어둠과 하나라면, 밝을 때는 봄이 없어질 것이다. 반드시 밝음과 하나라면, 어두울 때는 멸해야 할 것이다. 멸하면 어떻게 밝음을 보고 어둠을 보겠느냐? 만약 어둠과 밝음이 다른데 봄에는 생멸이 없다면, 하나가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만약 이 견정(見精)이 어둠이나 밝음과 일체가 아니라면, 너는 명암과 허공을 떠나서 견(見)의 근원이 어떤 형상인지 분석할 수 있겠느냐? 밝음을 떠나고 어둠을 떠나고 허공을 떠나면, 이 견의 근원은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다. 명암과 허공 세 가지가 모두 다른데, 어디서 견을 세우겠느냐? 명암은 서로 등지는데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느냐? 세 가지 근원을 떠나면 없는데 어떻게 다를 수 있겠느냐? 공을 나누고 견을 나누어도 본래 가장자리가 없는데, 어떻게 같지 않다고 하겠느냐? 어둠을 보고 밝음을 보아도 성질은 변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르지 않다고 하겠느냐?

너는 더욱 자세히 살피고, 미세하게 살피고 자세히 하여, 자세히 살피고 자세히 관찰해 보아라. 밝음은 태양을 따르고, 어둠은 흑월을 따르며, 통함은 허공에 속하고, 막힘은 대지로 돌아간다. 이와 같이 견정은 무엇에 인해 나오느냐? 견각과 공완(空頑)은 섞이거나 합하지 않는다. 견정이 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게 절로 나올 수는 없다.

만약 견문지(見聞知)의 성질이 원만하고 두루하여 본래 동요하지 않는다면, 끝없고 부동한 허공과 그 동요하는 지수화풍은 모두 6대라 이름하며, 성품은 참되고 원융하여 모두 여래장이며 본래 생멸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아난아, 너의 성품은 침륜하여 너의 견문각지가 본래 여래장인 줄을 깨닫지 못하는구나. 너는 마땅히 이 견문각지가 생하는지 멸하는지, 같은지 다른지, 생멸이 아닌지, 같고 다름이 아닌지를 관찰해야 한다.

너는 일찍이 여래장 속에서 성견(性見)은 각명(覺明)이며 각정(覺精)은 명견(明見)이어서, 청정하고 본연하여 법계에 두루함을 알지 못했다. 중생의 마음을 따라 아는 양만큼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의 견근(見根)이 보면 법계에 두루하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깨닫고 아는 것도 묘덕(妙덕)이 영연(瑩然)하여 법계에 두루한다. 시방 허공에 원만하니 어찌 특정한 장소가 있겠느냐? 업을 따라 발견되는 것이거늘, 세간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이나 자연성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모두가 의식의 분별로 헤아리는 것이니, 말만 있을 뿐 진실한 뜻은 없다.

아난아, 식(識)의 성질은 근원이 없으며, 여섯 가지 근진(根塵)으로 인해 망령되이 나온다. 네가 지금 이 모임의 성인 대중을 두루 관찰하며, 눈으로 차례대로 훑어보고 그 눈이 두루 보아도, 거울 속처럼 아무런 분별이 없다. 너의 식은 그 속에서 차례대로 지적한다. ‘이분은 문수보살, 이분은 부루나, 이분은 목건련, 이분은 수보리, 이분은 사리불이다.’ 이 식의 요별함은 견(見)에서 생기는가? 상(相)에서 생기는가? 허공에서 생기는가? 원인 없이 갑자기 나오는 것인가?

아난아, 만약 너의 식성(識性)이 견에서 생긴다면, 명암과 색공이 없으면 네 가지가 반드시 없고 원래 너의 견도 없다. 견성조차 없는데 어디서 식을 발하겠느냐? 만약 너의 식성이 상에서 생긴다면, 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밝음도 보지 못하고 어둠도 보지 못하며, 명암을 주목하지 않으면 색공도 없다. 그 상조차 없는데 식은 어디서 발하겠느냐? 만약 공에서 생긴다면, 상도 아니고 견도 아니다. 견이 아니면 분별할 수 없어 스스로 명암과 색공을 알 수 없다. 상이 아니면 연(緣)이 멸하여 견문각지가 안립할 곳이 없다. 이 두 가지가 아닌 곳에 처하여, 공은 무(無)와 같지 않고 유(有)는 물(物)과 같지 않다. 설사 너의 식이 발한다 해도 무엇을 분별하겠느냐?

만약 원인 없이 갑자기 나오는 것이라면, 왜 대낮에 구별하여 밝은 달을 인식하지 못하느냐? 너는 더욱 자세히 하고, 미세하게 자세히 살피고 살피라. 견은 너의 눈동자에 의탁하고, 상은 앞의 경계를 미루어 짐작한다. 형상할 수 있는 것은 유가 되고, 상이 아닌 것은 무가 된다. 이와 같이 식연(識緣)은 무엇에 인해 나오느냐? 식은 움직이고 견은 맑아서 섞이거나 합하지 않는다. 듣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식연이 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게 절로 나올 수는 없다.

만약 이 식심(識心)이 본래 좇아온 곳이 없다면, 요별하는 견문각지는 원만하고 담연하여 성질이 좇아온 곳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 허공과 지수화풍을 겸하여 모두 7대라 이름하며, 성품은 참되고 원융하여 모두 여래장이며 본래 생멸이 없다. 아난아, 너의 마음은 거칠고 들떠서 견문하고 발명하고 요지하는 것이 본래 여래장임을 깨닫지 못하는구나. 너는 마땅히 이 육처 식심이 같은지 다른지, 공인지 유인지, 같고 다름이 아닌지, 공과 유가 아닌지를 관찰해야 한다. 너는 원래 여래장 속에서 성식(性識)은 명지(明知)이며 각명(覺明)은 진식(眞識)이어서, 묘각(妙覺)은 담연하여 법계에 두루함을 알지 못한다. 시방 허공을 머금고 토하는데 어찌 특정한 장소가 있겠느냐? 업을 따라 발견되는 것이거늘, 세간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이나 자연성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모두가 의식의 분별로 헤아리는 것이니, 말만 있을 뿐 진실한 뜻은 없다.

그때 아난과 여러 대중은 부처님 여래의 미묘한 가르침을 입어, 몸과 마음이 탕연하여 걸림이 없게 되었다. 이 여러 대중은 각자 자신의 마음이 시방에 두루하고 시방의 공을 보는 것이, 마치 손바닥에 든 나뭇잎을 보는 것과 같음을 스스로 알았다. 일체 세간의 모든 소유물은 다 곧 보리 묘명원심(妙明元心)이며, 심정(心精)은 두루 원만하여 시방을 포함하고 감싸고 있다. 부모가 낳아준 몸을 돌이켜보니, 저 시방 허공 속에 작은 티끌 하나가 부는 것과 같아 있는 듯 없는 듯하고, 거대한 바다에 하나의 뜬 거품이 흐르는 것과 같아 일어남과 멸함이 종잡을 수 없으나, 분명히 스스로 본래의 묘한 마음을 얻어 상주하여 멸하지 않음을 알았다. 부처님께 예배하고 합장하며 미증유를 얻어, 여래 앞에서 게송을 설하여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묘하고 맑으며 모든 것을 지니신 동요하지 않는 세존이시여    수능엄왕은 세상에 희유하십니다
저의 억겁 전도된 망상을 녹여주시고    승기겁을 지나지 않고 법신을 얻게 하셨습니다
원컨대 지금 깨달음을 얻어 보왕(부처)이 되어    다시 이와 같이 항사 중생을 제도하게 하소서
이 깊은 마음 티끌 같은 국토에 바치오니    이것이 곧 부처님의 은혜 갚는 것이니이다
엎드려 청하오니 세존이시여 증명하여 주옵소서    오탁악세에 맹세코 먼저 들어가리니
만약 한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못하면    끝내 그곳에서 열반을 취하지 않겠나이다
대웅 대력 대자비하신 분이시여    바라건대 다시 미세한 혹을 살펴 없애주시어
저로 하여금 빨리 위없는 깨달음에 오르게 하시고    시방 세계 도량에 앉게 하소서
허공의 성품은 없어질 수 있어도    견고한(금강) 이 마음은 동요함이 없으리이다

《능엄경 제3권》 백화문 번역

다시 아난아, 어찌하여 6입(六入)이 본래 여래장의 묘진여성(妙真如性)이냐? 아난아, 저 눈을 부릅뜨고 피로한 자에게 있어, 눈과 피로는 모두 보리이다. 눈을 부릅뜨고 피로한 모습은 명암으로 인하여, 두 가지 망진(妄塵)이 견(見)을 일으켜 그 중간에 있는데, 이 티끌 형상을 흡수하는 것을 견성(見性)이라 이름한다. 이 견은 저 명암 두 티끌을 떠나면 필경 실체가 없다.

부처님은 제자 아난에게 사람의 감각 기관과 진여의 본성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고 계셨습니다. 부처님은 자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의 입구가 어떻게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질과 관련되어 있는지 이야기해 보자.”

아난은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고, 부처님은 계속해서 설명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무언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아라. 눈은 피로를 느낄 것이다. 이 피로감과 눈 자체는 사실 같은 보리의 지혜에서 생겨난 것이다. 응시할 때 명암의 변화로 인해 피로가 생긴다. 이것은 마치 두 종류의 환영이 우리의 시각 중추에 작용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영상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견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명암이라는 두 가지 환영이 없다면 우리의 시각 자체에는 실체가 없다.”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이 견은 명암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근(根)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공에서 생기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밝음에서 온다면 어두워지면 멸해야 하니 어둠을 보지 못할 것이다. 만약 어둠에서 온다면 밝아지면 멸해야 하니 밝음을 보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근에서 생긴다면 반드시 명암이 없을 것이니, 이 견정은 본래 자성이 없다. 만약 공에서 나온다면, 앞에 티끌 형상을 주목하더라도 돌아와 마땅히 견근을 보아야 할 것이다. 또 공이 스스로 본다면 너의 입(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안입(眼入)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이 아니며 자연성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난은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고, 부처님은 계속했습니다. “이해하거라. 우리의 시각은 빛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어둠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눈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잠시 멈추신 후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시각이 빛에서 온다면, 어둠이 나타날 때 우리는 어둠을 보지 못해야 한다. 만약 어둠에서 온다면, 빛이 나타날 때 우리는 빛을 보지 못해야 한다. 만약 눈에서 생겨난다면, 빛과 어둠이 없어도 우리는 사물을 볼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만약 허공에서 태어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눈을 볼 수 있어야 하지만, 이 또한 불가능하다.”

아난아, 어떤 사람이 두 손가락으로 귀를 꽉 막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이근(귀)이 핍박받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소리가 난다. 귀와 핍박감 모두 보리이다. 빤히 봄이 피로의 증상을 일으키니, 움직임과 고요함으로 인해 두 가지 허망한 티끌(대상)이 그 가운데서 청각을 드러낸다. 이 티끌 현상과 동일시하는 것을 청각의 성품이라 한다. 이 청각은 움직임과 고요함이라는 두 티끌을 떠나서는 마침내 실체가 없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감각과 참된 성품의 관계를 계속 설명하시며, 이번에는 청각과 후각으로 초점을 옮기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귀와 코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는 생생한 비유로 설명을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귀를 꽉 막고 있는 것을 상상해보라. 귀가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머릿속에서 소리를 듣는다. 이 압박감과 귀 자체는 모두 같은 보리 지혜에서 비롯된다.”

아난이 주의 깊게 듣자 부처님은 계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듣는 것에 집중할 때, 소리와 침묵(움직임과 고요함)의 변화로 인해 피로가 생긴다. 이것은 마치 두 가지 환영이 우리 청각 중추에 작용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소리들을 흡수하고 그것을 ‘청각의 성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움직임과 고요함이라는 이 두 환영이 없다면, 우리의 청각 자체는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청각은 움직임이나 고요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근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고요함에서 온다면, 움직임은 그것의 소멸을 의미하므로 움직임을 듣지 못해야 한다. 만약 움직임에서 온다면, 고요함은 그것의 소멸을 의미하므로 고요함을 인식하지 못해야 한다. 만약 근에서 생겨난다면, 필연적으로 움직임도 고요함도 없을 것이니, 청각의 실체는 본래 자성이 없다. 만약 허공에서 나와 청각을 그 성품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허공이 아니다. 또한, 만약 허공이 스스로 듣는다면, 너의 입(감각 기관)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입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이 아니며 자연성도 아니다.

부처님은 더 설명하셨습니다. “아난아, 너는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청각은 움직임과 고요함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귀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허공에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청각이 침묵에서 온다면, 소리가 있을 때 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해야 한다. 만약 소리에서 온다면, 침묵이 있을 때 우리는 침묵을 감지하지 못해야 한다. 만약 그것이 귀에서 생겨난다면,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어도 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부처님은 결론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귀라는 감각의 입구 또한 환영이며, 인과 관계에 의해 생겨난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아난아, 어떤 사람이 코를 꽉 쥐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오랫동안 쥐고 있으면 핍박되어 코 안에서 차가운 감촉을 느낀다. 그 감촉으로 인해 그들은 통함(뚫림)과 막힘, 비움과 참, 심지어 다양한 향기와 악취까지도 구별한다. 코와 핍박감 모두 보리이다. 빤히 봄이 피로의 증상을 일으키니, 통함과 막힘으로 인해 두 가지 허망한 티끌(대상)이 그 가운데서 후각을 드러낸다. 이 티끌 현상과 동일시하는 것을 후각의 성품이라 한다. 이 후각은 통함과 막힘이라는 두 티끌을 떠나서는 마침내 실체가 없다.

다음으로, 부처님은 후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어떤 사람이 코를 꽉 쥐고 있는 것을 상상해보라. 잠시 쥐고 있으면, 그들은 코 안에서 서늘함을 느낄 것이다. 이 감촉을 통해, 그들은 코가 막혔는지 뚫렸는지, 비었는지 꽉 찼는지 구별할 수 있고, 다양한 향기와 악취까지 맡을 수 있다. 이 감각과 코 자체도 보리 지혜에서 비롯된다.”

부처님은 설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냄새 맡는 것에 집중할 때, 코의 뚫림과 막힘의 변화로 인해 피로가 생긴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 환영이 우리의 후각 중추에 작용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냄새들을 흡수하고 그것을 ‘후각의 성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뚫림과 막힘이라는 이 두 환영이 없다면, 우리의 후각 자체도 실체가 없다.”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후각은 통함이나 막힘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근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통함에서 온다면, 막힘은 그것의 소멸을 의미할 텐데, 어떻게 막힘을 알 수 있겠느냐? 만약 막힘 때문에 통함이 있다면, 냄새 맡음이 없을 텐데, 어떻게 향기와 악취, 기타 감촉들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 만약 근에서 생겨난다면, 필연적으로 통함도 막힘도 없을 것이니, 후각의 실체는 본래 자성이 없다. 만약 허공에서 나온다면, 이 후각은 자연히 돌아와 너의 코를 맡아야 한다. 만약 허공이 스스로 후각을 가지고 있다면, 너의 입(감각 기관)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비입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이 아니며 자연성도 아니다.

부처님께서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너는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후각은 코의 뚫림과 막힘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코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허공에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내심을 갖고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냄새가 뚫린 것에서 온다면, 코가 막혔을 때 우리는 막힘을 감지하지 못해야 한다. 만약 막힘 때문에 뚫림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어떤 냄새도 맡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코에서 생겨난다면, 뚫림과 막힘의 변화 없어도 우리는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만약 그것이 허공에서 태어난다면, 냄새는 네가 맡을 필요 없이 저절로 너의 코로 들어와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결론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코라는 감각의 입구 또한 환영이며, 인과 관계에 의해 생겨난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아난아, 어떤 사람이 혀로 입술을 핥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지나치게 핥으면 피로를 일으킨다. 만약 그 사람이 병이 있으면 쓴맛이 있고, 병이 없는 사람은 약간의 단맛을 느낀다. 단맛과 쓴맛으로 인해 이 설근이 드러나며, 움직이지 않을 때는 담백한 성질이 항상 존재한다. 혀와 피로 모두 보리이다. 빤히 봄이 피로의 증상을 일으키니, 달고 쓰고 담백함으로 인해 두 가지 허망한 티끌(대상)이 그 가운데서 미각을 드러낸다. 이 티끌 현상과 동일시하는 것을 미각의 성품이라 한다. 이 미각의 성품은 달고 쓴 것과 담백한 두 티끌을 떠나서는 마침내 실체가 없다.

다음으로, 부처님은 미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끊임없이 입술을 핥고 있는 것을 상상해보라; 오랫동안 핥으면 피로가 생긴다. 만약 이 사람이 병들었다면, 그들은 쓴맛을 볼 것이다; 만약 그들이 건강하다면, 약간의 단맛을 느낄지도 모른다. 달든 쓰든, 그것은 혀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리고 혀가 움직이지 않을 때, 우리는 담백한 맛을 느낀다. 이 감각과 혀 자체도 보리 지혜에서 비롯된다.”

부처님은 계속 설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맛보는 것에 집중할 때, 달고 쓰고 담백함의 변화로 인해 피로가 생긴다. 이것은 다시 환영이 우리의 미각 중추에 작용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맛들을 흡수하고 그것을 ‘미각의 성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맛들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의 미각 자체는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쓴맛과 담백함을 맛보는 지각은 달거나 쓴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담백함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근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달고 쓴 것에서 온다면, 담백함은 앎이 소멸함을 의미할 텐데, 어떻게 담백함을 알 수 있겠느냐? 만약 담백함에서 나온다면, 단 것은 앎이 없음을 의미할 텐데, 또 어떻게 달고 쓴 두 가지 현상을 알 수 있겠느냐? 만약 혀에서 생겨난다면, 필연적으로 달고 담백하고 쓴 티끌들이 없을 것이니, 미각의 근본을 아는 것에는 본래 자성이 없다. 만약 허공에서 나온다면, 허공이 스스로 맛보는 것이지 너의 입이 아는 것이 아니다. 또한, 만약 허공이 스스로 안다면, 너의 입(감각 기관)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설입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이 아니며 자연성도 아니다.

“아난아, 너는 이해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달고 쓰고 담백함에 대한 지각은 달고 쓴 것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담백함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혀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달고 쓴 것에서 온다면, 우리는 담백함을 감지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담백함에서 온다면, 우리는 달고 쓴 것을 감지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혀에서 생겨난다면, 달고 쓰고 담백함의 변화가 없더라도 우리는 맛을 느낄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만약 그것이 허공에서 태어난다면, 허공 자체가 맛을 볼 수 있어야 하며, 너의 입을 통할 필요가 없다.”

부처님은 마침내 결론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혀라는 감각의 입구 또한 환영이며, 인과 관계에 의해 생겨난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아난아, 어떤 사람이 차가운 손으로 뜨거운 손을 만진다고 생각해보라. 만약 차가움이 지나치면 뜨거운 손이 차가움을 띠게 되고; 만약 열이 강력하면 차가운 손이 뜨거워진다. 그러므로 이 접촉으로 인해 촉각의 인식이 분리 속에서 드러난다; 만약 영향이 확립된다면, 그것은 긴장된 접촉 때문이다. 몸과 긴장 모두 보리이다. 빤히 봄이 피로의 증상을 일으키니, 분리와 결합으로 인해 두 가지 허망한 티끌(대상)이 그 가운데서 촉각을 드러낸다. 이 티끌 현상과 동일시하는 것을 촉각의 성품이라 한다. 이 촉각의 실체는 분리와 결합, 거스름(위)과 따름(순)이라는 두 티끌을 떠나서는 마침내 실체가 없다.

부처님께서 친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촉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는 생생한 비유로 설명을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차가운 손으로 뜨거운 손을 만지는 것을 상상해보라. 만약 차가운 느낌이 더 강하면 뜨거운 손이 차가워지고; 만약 뜨거운 느낌이 더 강하면 차가운 손이 뜨거워진다. 이 접촉의 감각이 우리로 하여금 차가움과 뜨거움의 차이를 인식하게 하며, 이 지각은 손의 ‘노동’ 때문에 생겨난다.”

부처님은 계속하셨습니다. “이 촉각과 몸 자체는 모두 같은 보리 지혜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만지는 것에 집중할 때, 접촉과 분리의 변화로 인해 피로가 생긴다. 이것은 마치 두 가지 환영이 우리 촉각 중추에 작용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감각들을 흡수하고 그것을 ‘촉각의 성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접촉과 분리라는 이 두 변화가 없다면, 우리의 촉각 자체는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촉각은 분리나 결합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거스름이나 따름에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근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결합이 있을 때 온다면, 분리는 이미 소멸했음을 의미할 텐데; 어떻게 분리를 인식할 수 있겠느냐? 거스름과 따름의 두 가지 특징 또한 이와 같다. 만약 근에서 나온다면, 필연적으로 분리, 결합, 거스름, 따름의 네 가지 특징이 없을 것이니; 그러면 너의 몸의 아는 능력에는 본래 자성이 없다. 만약 허공에서 나와야만 한다면, 허공이 스스로 알고 느끼는 것이니, 너의 입(감각 기관)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신입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이 아니며 자연성도 아니다.

“아난아, 너는 이해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설명하셨습니다. “이 촉각은 접촉이나 분리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편안함이나 불편함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몸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접촉에서 온다면, 분리될 때는 우리가 그것을 감지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몸에서 생겨난다면, 접촉과 분리의 변화가 없더라도 우리는 촉각을 느낄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만약 그것이 허공에서 태어난다면, 허공 자체가 촉각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하며, 너의 몸을 통할 필요가 없다.”

부처님은 결론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몸이라는 감각의 입구 또한 환영이며, 인과 관계에 의해 생겨난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아난아, 어떤 사람이 피로하여 잠들고, 잠이 깬 후에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생각해 보아라. 사물을 보면 기억하고, 잊어버리면 망각이라 한다. 이 생(生), 주(住), 이(異), 멸(滅)의 전도된 상이 습관적으로 중추에 흡수되어 벗어나지 못하니, 이것을 의근(뜻의 뿌리)이라 한다. 뜻과 피로는 모두 보리(깨달음)이다. 부릅뜸이 피로를 일으키니, 생과 멸로 인하여 두 가지 허망한 티끌이 그 가운데서 앎을 모은다. 안의 티끌을 흡수하여 보고 듣는 흐름을 거슬러 미치지 못하니, 이것을 지각의 성품이라 한다. 이 지각의 성품은 깨어있음과 잠듦, 생과 멸이라는 두 티끌을 떠나서는 마침내 실체가 없다.

다음으로 부처님은 의식(지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피곤하면 잠들고 쉬고 나면 깨어나는 사람을 상상해 보아라. 사물을 이해하면 기억이 되고, 잊어버리면 망각이 된다. 이러한 생, 주, 이, 멸의 변화는 모두 의식 안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기억하고 생각하는 이 능력을 ‘의근(마음의 뿌리)‘이라 부른다.”

부처님은 설명하셨습니다. “이 의식과 피로감은 모두 보리의 지혜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생각에 집중할 때, 생각의 생멸로 인해 피로가 생긴다. 이것은 마치 두 가지 환영이 우리 의식의 중추에 작용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생각들을 흡수하고 그것을 ‘지각의 성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깨어있음, 잠듦, 생겨남, 사라짐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 의식 자체는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지각의 기관은 깨어있음이나 잠듦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생이나 멸에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근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깨어있음에서 온다면 자고 있을 때는 멸해야 할 텐데, 어떻게 잠을 잘 수 있겠느냐? 만약 생길 때 반드시 존재한다면, 멸함이 무(無)를 의미할 때 누가 멸함을 겪겠느냐? 만약 멸함에서 존재한다면 생겨날 때 멸함은 사라지니, 누가 생겨남을 알겠느냐? 만약 근에서 나온다면 깨어있음과 잠듦의 두 형상이 육체적으로 열리고 닫히니, 이 두 몸을 떠나면 이 지각하는 자는 허공의 꽃과 같아서 마침내 성품이 없다. 만약 허공에서 태어난다면 허공이 스스로 아는 것이니, 너의 입(감각 기관)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의입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이 아니며 자연성도 아니다.

부처님은 미소 지으며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우리의 의식과 지각은 마치 마법의 보물 상자와 같아서, 자거나 깨어있는 상태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생겨나거나 사라짐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아난은 눈을 크게 뜨고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스승님, 그러면 이 보물 상자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부처님은 참을성 있게 설명하셨습니다. “이 상자는 우리의 감각에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한번 생각해 보자:”

“만약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온다면, 우리가 잠들 때 의식은 사라져야 한다. 그러면 누가 잠을 경험하느냐?”

“만약 의식이 태어날 때(생) 만들어진다면, 우리가 죽을 때(멸) 의식은 사라져야 한다. 그러면 누가 죽음을 경험하느냐?”

“만약 의식이 멸함에서 만들어진다면, 우리가 태어날 때 의식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누가 우리가 태어난 것을 아느냐?”

아난은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였고, 부처님은 계속하셨습니다. “만약 의식이 우리 감각(근)에서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신체 상태에 따라 변해야 한다. 그러나 몸을 떠나면 우리 의식은 허공의 꽃과 같아서, 단순히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의식이 허공에서 만들어진다면, 허공이 스스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왜 너의 감각을 통해 세상을 알 필요가 있겠느냐?”

부처님은 마침내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마땅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의식과 지각은 특정 원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 본질은 마치 아름다운 꿈처럼 환상적인 것이다.”

다시 아난아, 어찌하여 12처(十二處)가 본래 여래장의 묘진여성(妙真如性)이냐? 아난아, 이 기원정사의 숲과 샘과 연못을 보아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것들은 색이 봄(見)을 일으켜서 생긴 것이냐, 아니면 눈이 색의 모습을 일으켜서 생긴 것이냐? 아난아, 만약 안근이 색의 모습을 일으켰다면, 허공을 볼 때는 색이 없으니 색의 성품은 마땅히 소멸해야 한다. 만약 소멸한다면 모든 것이 무(無)가 될 텐데, 색의 모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공의 실체를 밝히겠느냐? 공 또한 이와 같다.

부처님께서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12처가 어떻게 여래장의 묘한 진여 본성인지 이야기해 보자.”

그는 주위를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저 기원정사의 숲과 샘, 연못들을 보아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색깔들이 너의 시각을 만들어내느냐, 아니면 너의 눈이 이 색깔들을 만들어내느냐?”

아난이 잠시 생각하자 부처님께서 계속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눈이 색깔을 만들어낸다면, 네가 허공을 볼 때 색깔은 사라져야 한다. 만약 색깔이 사라진다면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누가 허공을 볼 수 있겠느냐?”

만약 색진(色塵)이 봄(見)을 일으킨다면, 색이 아닌 허공을 볼 때 봄은 사라져야 한다. 만약 사라진다면 전혀 아무것도 없을 텐데, 누가 공과 색을 밝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봄과 색 및 공은 처소가 없으며, 색과 봄이라는 두 곳은 허망하여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니다.

“반대로, 만약 색깔이 시각을 만들어낸다면, 네가 허공을 볼 때 시각은 사라져야 한다. 시각이 사라진다면 누가 색과 허공을 구별할 수 있겠느냐?”

부처님께서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시각, 색, 허공이 고정된 위치가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시각과 색이라는 두 곳은 모두 허망하며, 인과 관계로 생겨난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아난아, 너는 다시 기원정사에서 식사를 알리는 북소리와 대중이 모일 때 치는 종소리를 들어보아라. 종소리와 북소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어진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소리가 귀 곁으로 와서 들리는 것이냐, 아니면 귀가 소리 있는 곳으로 가서 듣는 것이냐? 아난아, 만약 이 소리가 귀 곁으로 온다면, 내가 사위성에서 걸식할 때는 기원정사에 있지 않는데, 만약 이 소리가 반드시 아난의 귀에 온다면 목건련과 가섭은 함께 듣지 못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1,250명의 비구들이 종소리를 듣고 동시에 식당으로 오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다음으로 부처님은 청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기원정사의 소리를 다시 들어보아라. 식사를 알리는 북이 울리고, 모두가 모일 때 종이 울린다. 종소리와 북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진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소리가 네 귀로 오는 것이냐, 아니면 네 귀가 소리에게로 가는 것이냐?”

부처님은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소리가 네 귀로 오는 것이라면, 내가 사위성에서 걸식하고 있을 때는 기원정사에 있는 소리를 듣지 못해야 한다. 게다가 만약 소리가 오직 네 귀로만 온다면 목건련과 가섭은 듣지 못할 것이다. 다른 1,250명의 비구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어떻게 모두 종소리를 듣고 동시에 밥을 먹으러 올 수 있겠느냐?”

만약 너의 귀가 저 소리 곁으로 간다면, 즉 내가 기원정사로 돌아오고 사위성에 없을 때, 너의 귀가 이미 북을 치는 곳으로 갔다면 종소리가 동시에 날 때 너는 함께 듣지 못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코끼리, 말, 소, 양 등의 갖가지 소리를 듣는 것이겠느냐? 만약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면 들음 또한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들음과 소리는 모두 처소가 없으며, 들음과 소리라는 두 곳은 허망하여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니다.

“반대로, 만약 네 귀가 소리에게로 간다면, 내가 기원정사에 있을 때는 사위성의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또한, 네 귀가 이미 북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다면, 어떻게 동시에 종소리를 들을 수 있겠느냐? 코끼리, 말, 소, 양의 다양한 소리는 말할 것도 없다.”

부처님은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만약 소리가 오지도 않고 귀가 가지도 않는다면,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청각과 소리가 고정된 위치가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청각과 소리라는 두 곳은 모두 허망하며, 인과 관계로 생겨난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아난아, 이 향로 안의 전단향을 맡아 보아라. 이 향을 한 닢(銖)만 피워도 그 향기가 사위성 40리 안에서 동시에 맡을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향기는 전단나무에서 생기는 것이냐, 너의 코에서 생기는 것이냐, 아니면 허공에서 생기는 것이냐? 아난아, 만약 이 향기가 너의 코에서 생긴다면 코에서 생긴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코에서 나와야 한다. 코는 전단목이 아닌데 어찌 코 속에 전단의 향기가 있겠느냐? 네가 향기를 맡아 코로 들어간다고 한다면, 향기가 코에서 나온다는 말은 냄새 맡는 뜻과 어긋난다.

부처님께서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이제 이 향로의 전단향을 맡아 보아라. 작은 전단향 조각 하나만 태워도 그 향기를 사위성 전체 40리 안에서 맡을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향기는 전단나무에서 생기는 것이냐, 네 코에서 생기는 것이냐, 아니면 공기 중에서 생기는 것이냐?”

아난이 잠시 생각하자 부처님께서 계속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향기가 네 코에서 생긴다면 네 코에서 나와야 한다. 하지만 코는 전단나무가 아닌데 어떻게 전단향을 만들어낼 수 있겠느냐? 만약 네가 맡는 향기가 코로 들어간다고 말한다면, 향기가 코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허공에서 생긴다면 허공의 성품은 상주하는 것이니 향기도 마땅히 항상 있어야 할 것이다. 어찌하여 향로 안의 마른 나무를 태움을 기다리느냐? 만약 나무에서 생긴다면 이 향기의 실체는 태워서 연기가 됨으로써 생긴다. 만약 코가 맡는다면 마땅히 연기가 몽롱할 때여야 할 것이다. 연기는 공중으로 피어올라 아직 멀리 미치지 못했는데, 어찌 40리 안에서 벌써 맡을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향기와 악취, 냄새 맡는 것은 모두 처소가 없으며, 냄새 맡는 것과 향기라는 두 곳은 허망하여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니다.

“만약 향기가 공기 중에서 생긴다면, 공기는 항상 존재하므로 향기도 항상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향로에 전단나무를 태워야 하느냐? 만약 향기가 나무에서 생긴다면 이 향기는 태워져서 연기가 되어야 한다. 코가 감지한다면 연기를 맡아야 한다. 하지만 연기는 공중으로 피어올라 아직 멀리 퍼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40리 안에서 맡을 수 있느냐?”

부처님께서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향기와 후각이 고정된 위치가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냄새와 향기라는 두 곳은 모두 허망하며, 인과 관계로 생겨난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아난아, 너는 매일 대중 속에서 발우를 들고 공양할 때, 종종 소(酥), 낙(酪), 제호(醍醐)와 같은 상미(최상의 맛)를 만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맛은 허공에서 생기느냐, 혀에서 생기느냐, 아니면 음식에서 생기느냐? 아난아, 만약 이 맛이 너의 혀에서 생긴다면 너의 입 속에는 혀가 하나뿐이다. 그 혀가 이미 소의 맛이 되었다면, 흑석밀(검은 설탕)을 만났을 때 응당 변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변하지 않는다면 맛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만약 변한다면 혀는 여러 개의 몸이 아니다. 어찌 하나의 혀가 많은 맛을 알 수 있겠느냐?

다음으로 부처님은 미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너는 종종 대중 속에서 발우를 들고 걸식한다. 때로는 소, 치즈, 크림과 같은 맛있는 음식을 만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맛들은 공기 중에서 생기느냐, 네 혀에서 생기느냐, 아니면 음식에서 생기느냐?”

부처님은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맛이 네 혀에서 생긴다면 네 입에는 혀가 하나뿐이다. 혀가 이미 소의 맛이 되었다면 설탕을 만났을 때도 변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변할 수 없다면 맛을 지각한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변할 수 있다면 혀는 여러 개가 아닌데 어떻게 동시에 여러 맛을 알 수 있겠느냐?”

만약 음식에서 생긴다면 음식에는 식(識)이 없는데 어찌 스스로를 알 수 있겠느냐? 또한 만약 음식이 스스로 안다면 그것은 타인이 먹는 것과 같으니, 너의 맛을 아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만약 허공에서 생긴다면 네가 허공을 먹을 때 무슨 맛이 나느냐? 만약 허공이 짠맛을 낸다면 이미 짜기 때문에 너의 혀를 짜게 하고 너의 얼굴도 짜게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세계의 사람은 바다의 물고기와 같아서 항상 짠맛을 받고 담백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만약 담백함을 식별하지 못한다면 짠맛도 감각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앎이 없다면 어찌 맛이라 부를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맛과 혀와 맛보는 것은 모두 처소가 없으며, 맛보는 것과 맛이라는 두 곳은 허망하여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니다.

“만약 맛이 음식에서 생긴다면 음식은 의식이 없는데 어떻게 자신의 맛을 알 수 있겠느냐? 만약 음식이 자신의 맛을 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먹는 것과 같으니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만약 맛이 허공에서 생긴다면 네가 허공을 먹을 때 무슨 맛이 나느냐? 만약 허공이 짜다면 네 혀뿐만 아니라 네 얼굴도 짜야 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바다의 물고기처럼 되어 항상 소금을 먹고 담백함이 무엇인지 모르게 될 것이다. 담백함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짠맛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어떻게 맛을 논할 수 있겠느냐?”

부처님께서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맛, 혀, 그리고 맛보는 행위가 고정된 위치가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맛과 맛봄이라는 두 곳은 모두 허망하며, 인과 관계로 생겨난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아난아, 너는 매일 아침 손으로 머리를 만진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만짐을 아는 것은 만지는 능력이 있는 손에 있는가, 아니면 머리에 있는가? 만약 손에 있다면 머리는 앎이 없을 것이니, 어떻게 접촉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만약 머리에 있다면 손은 쓸모가 없을 것이니, 어떻게 접촉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만약 각각에 있다면, 아난아, 너는 응당 두 개의 몸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머리와 손이 한 번의 접촉으로 생긴다면, 손과 머리는 마땅히 한 몸이어야 한다. 만약 한 몸이라면 접촉은 성립되지 않는다. 만약 두 몸이라면 접촉은 어디에 있는가? 능동적인 쪽에 있으면 수동적인 쪽에 없고, 수동적인 쪽에 있으면 능동적인 쪽에 없다. 허공이 너와 접촉을 이루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접촉을 아는 것과 몸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곧 몸과 접촉은 둘 다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요 자연성도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매일 아침 너는 손으로 머리를 만진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만지는 느낌은 손에 있느냐, 아니면 머리에 있느냐?”

아난이 잠시 생각하자 부처님께서는 계속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느낌이 손에 있다면 머리는 느낌이 없으니 어떻게 만짐이라 할 수 있겠느냐? 만약 느낌이 머리에 있다면 손은 기능이 없으니 어떻게 만짐이라 할 수 있겠느냐? 만약 손과 머리 둘 다 느낌이 있다면 너 아난은 두 개의 몸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만약 머리와 손이 하나라면 만짐은 성립될 수 없다. 만약 두 부분이라면 느낌은 정확히 어디에 있느냐? 허공이 너와 접촉을 만들어낼 리는 없지 않느냐?”

부처님께서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촉각과 몸이 고정된 위치가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몸과 접촉이라는 두 곳은 모두 허망하며, 인과 관계로 생겨난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아난아, 너는 항상 의식(意) 속에서 선, 악, 무기(無記)의 세 가지 성질을 반연하여 법칙(法)을 생성한다. 이 법은 마음에서 생기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을 떠나 따로 처소가 있는 것인가?

다음으로 부처님은 의식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너의 의식 속에서 선, 악, 무기의 생각이 자주 일어나 법(현상)을 형성한다. 이 법들은 마음에서 생기는가, 아니면 마음과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난아, 만약 마음(心)이라면 법은 티끌(塵, 대상)이 아니며, 마음이 반연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처(處)를 이루겠느냐? 만약 마음에 떠나 따로 처소가 있다면, 법의 자성은 아는 것인가, 알지 못하는 것인가? 만약 아는 것이라면 이름하여 마음이라 할 것이니, 너와 다르면 티끌이 아니다. 다른 마음과 같다면 곧 너이자 마음이니, 어찌 너의 마음이 너와 달리 두 개가 있겠느냐? 만약 알지 못하는 것이라면, 이 티끌은 색, 성, 향, 미, 이합, 냉난도 아니며 허공의 모양도 아닌데, 마땅히 어디에 있겠느냐? 지금 색과 공 안에 표시가 없고, 인간계 밖에 다시 허공이 있을 리 없다. 마음이 반연하는 바가 아니라면 처는 어디로부터 서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법과 마음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곧 의(意)와 법(法)은 둘 다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요 자연성도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법이 마음이라면 그것은 외부 대상이 아니며 마음이 조건 짓는 대상도 아니니, 어떻게 장소가 될 수 있겠느냐? 만약 법이 마음과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이 법 자체는 지각이 있느냐 없느냐? 만약 지각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과 같고 외부 대상이 아니다. 만약 지각이 없다면, 이 법은 색, 소리, 냄새, 맛도 아니고 차가움, 따뜻함도 아니며 허공도 아닌데, 정확히 어디에 존재하느냐?”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러한 법을 보거나 만질 수 없으며, 그것들은 우리가 아는 공간 밖에도 존재할 수 없다. 만약 마음이 그것을 조건 지을 수 없다면, 이 장소는 어디에 성립하느냐?”

부처님께서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법과 마음이 고정된 위치가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의식과 법이라는 두 곳은 모두 허망하며, 인과 관계로 생겨난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아난아, 어찌하여 십팔계(十八界)가 본래 여래장의 묘한 진여성(眞如性)인가? 아난아, 네가 밝힌 바와 같이 안(眼)과 색(色)을 인연으로 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이 식은 눈으로 인하여 생겨서 눈을 계(界)로 삼는가, 색으로 인하여 생겨서 색을 계로 삼는가? 아난아, 만약 눈으로 인하여 생긴다면, 색과 공이 없으면 분별할 것이 없다. 설령 너의 식이 있다 한들 무엇에 쓰겠느냐? 너의 봄(見)은 청, 황, 적, 백이 아니며 표시할 바가 없으니, 어디서 계를 세우겠느냐?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며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난아, 흥미로운 주제를 탐구해 보자. 알고 있느냐? 우리 세상은 18계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여래장의 진여 본성에서 나온다. 놀랍지 않느냐?” 아난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하셨습니다. “눈과 색을 예로 들어보자. 눈이 색을 볼 때 안식이 생긴다는 것을 너는 안다. 하지만 이 안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눈 때문에 생기는가? 아니면 색 때문에 생기는가?”

아난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스승님, 눈과 색의 상호작용으로 생기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추측이다, 아난아.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자. 만약 안식이 눈 때문에 생긴다면 색이나 공간이 없을 때 안식은 무엇을 구별할 수 있겠느냐? 안식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아난은 다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 설명하셨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아라, 네가 보는 세상은 단지 파랑, 노랑, 빨강, 하양의 색깔뿐만이 아니다. 만약 안식이 이것들을 나타낼 수 없다면 우리는 이 경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느냐?”

아난이 생각에 잠겨 말했습니다. “스승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상상보다 훨씬 복잡할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부처님께서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그렇다, 아난아. 우리 감각, 의식, 그리고 세상의 관계는 참으로 묘하고 심오하다. 그것들은 마치 거대한 퍼즐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 자신과 주변 세상을 더 잘 알 수 있다.”

만약 색으로 인하여 생긴다면, 허공에 색이 없을 때 너의 식은 마땅히 멸해야 한다. 어찌 식이 허공의 성질을 알겠느냐? 만약 색이 변할 때 너 또한 그 색상의 천변함을 알고 너의 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계는 어디서 서겠느냐? 변하는 것을 따르면 계의 모양이 저절로 없고, 변하지 않으면 항상 색으로부터 생긴 것이 되니 응당 허공의 소재를 알지 못할 것이다. 만약 두 가지 안과 색이 함께 생긴다면, 합하면 중간이 떨어지고 떨어지면 둘 다 합하여, 체성이 잡란해지니 어떻게 계를 이루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안과 색을 인연으로 하여 안식계가 생긴다는 것은 세 곳 모두 없다. 곧 안과 색 및 색계의 셋은 본래 인연도 아니요 자연성도 아니다.

아난이 잠시 생각하자 부처님께서는 계속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안식이 눈에서 생긴다면 색이나 공간이 없을 때 아무것도 구별할 수 없다. 식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보는 것은 파랑, 노랑, 빨강, 하양도 아니고 나타낼 것도 없는데, 이 계가 어떻게 성립하느냐?”

“만약 안식이 색에서 생긴다면 색이 없을 때 너의 식은 사라져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허공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 만약 색이 변할 때 너는 색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는데 너의 식은 변하지 않는다면, 이 계는 어떻게 성립하느냐?”

부처님께서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눈, 색, 안식이 모두 실체가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눈, 색, 안식의 3계는 인과 관계로 생겨난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바와 같이 이(耳)와 성(聲)을 인연으로 하여 이식(耳識)이 생긴다. 이 식은 귀로 인하여 생겨서 귀를 계로 삼는가, 소리로 인하여 생겨서 소리를 계로 삼는가?

다음으로 부처님은 청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너는 또한 귀와 소리가 이식(耳識)을 생성하는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이 의식은 귀 때문에 생성되는가, 아니면 소리 때문에 생성되는가?”

아난아, 만약 귀로 인하여 생긴다면, 동(動)과 정(靜)의 두 모양이 현전하지 않으면 근(根)은 앎을 이루지 못하여 반드시 아는 바가 없을 것이다. 앎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식은 어떤 모양이겠느냐? 만약 귀의 들음을 취한다면, 동과 정이 없으므로 들음이 성립되지 않는데, 어찌 귀의 모양이 색이나 촉진과 섞여 식계라 이름하겠느냐? 그렇다면 이식계는 다시 누구로부터 서겠느냐? 만약 소리에서 생긴다면, 식은 소리로 인하여 있으니 들음과는 관계가 없다. 들음이 없으면 소리의 모양이 있는 곳도 없어진다. 식이 소리로부터 생기고, 소리가 들음으로 인하여 소리의 모양이 있다고 허용한다면, 들음은 응당 식을 들어야 하고, 듣지 못하면 계가 아니다. 들음이 소리와 같다면 식은 이미 들린 것이니 누가 듣는 식을 알겠느냐? 만약 아는 자가 없다면 마침내 초목과 같을 것이니, 소리와 들음이 섞여 중간의 계를 이루어서는 안 된다. 계에 중간 위치가 없으면 안팎의 모양은 다시 어디서 이루어지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성을 인연으로 하여 이식계가 생긴다는 것은 세 곳 모두 없다. 곧 이와 성 및 성계의 셋은 본래 인연도 아니요 자연성도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이식이 귀에서 생긴다면, 동과 정의 두 소리가 없을 때 이근은 지각을 만들어낼 수 없고 아무것도 알지 못해야 한다. 지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식은 어떤 모양이겠느냐?”

“만약 이식이 소리에서 생긴다면 의식은 소리 때문에 존재하며 들음과는 관계가 없다. 들음이 없으면 소리의 존재를 논할 수 없다. 만약 의식이 소리에서 생기고 소리가 들음으로 인해 소리의 모습을 가진다면, 들음은 의식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들을 수 없는 것은 계가 아니다. 만약 들을 수 있다면 의식은 소리와 같다. 만약 의식이 이미 들렸다면 누가 이 들린 의식을 아느냐?”

부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귀와 소리와 이식(耳識)이 모두 세 곳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귀와 소리와 이식계는 인연으로 생긴 것도 아니고 자연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아난아, 네가 또한 이해하듯이 코와 향이 연이 되어 비식(鼻識)이 생긴다. 이 식은 코로 인해 생겨 코를 계로 삼는가, 아니면 향으로 인해 생겨 향을 계로 삼는가?

부처님께서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또한 코와 향이 연이 되어 비식을 생기게 함을 안다. 그러면 이 식은 코 때문에 생기는가, 아니면 향 때문에 생기는가?”

아난아, 만약 코로 인해 생긴다면 네 마음속에서 무엇을 코로 삼느냐? 두 개의 발톱 같은 육체적인 형상을 취하느냐, 아니면 냄새 맡고 움직임을 지각하는 성질을 취하느냐? 만약 육체적인 형상을 취한다면 살은 몸이고 몸의 지각은 촉이니, 몸이라 이름하고 코가 아니다. 만약 촉이라 이름하면 티끌(대상)이다. 코가 아직 이름이 없는데 어떻게 계를 세우겠느냐? 만약 냄새 맡고 지각하는 성질을 취한다면 네 마음속에서 무엇을 앎으로 삼느냐? 만약 살을 앎으로 삼는다면 살의 앎은 본래 촉이지 코가 아니다. 만약 허공을 앎으로 삼는다면 허공이 스스로 알 것이니 살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허공이 너이고 너의 몸은 앎이 없게 될 것이다. 오늘 아난은 소재가 없어야 한다. 만약 향을 앎으로 삼는다면 앎은 자연히 향에 속하니 너와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부처님께서 아난을 자애롭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난아, 흥미로운 질문을 하나 생각해 보자. 만약 우리의 식이 코에서 생긴다고 한다면 너는 무엇을 코로 여기느냐?”

아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물었다. “스승님, 코의 모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냄새 맡는 코의 기능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며 대답하셨다. “아주 좋은 질문이다, 아난아. 함께 분석해 보자.”

“만약 코가 두 개의 발톱 모양을 한 그 살로 된 기관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사실 몸의 일부다. 우리가 코를 만질 때 그 감각은 촉각에 속하지 후각이 아니다. 따라서 이렇게 정의하면 우리는 코와 몸의 경계를 구별할 수 없다.” 아난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부처님께서 계속하셨다. “그러면 만약 코가 냄새를 맡는 그 능력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능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코의 살이 냄새를 맡느냐?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다시 촉각이 되고 후각이 아니다.”

“만약 공기가 냄새를 맡는다고 한다면 공기가 지각을 가져야 하고 너의 코는 아무런 느낌이 없어야 한다. 이런 식이라면 공기가 너이고 너의 몸은 지각이 없다는 뜻이 아니냐?” 아난은 눈을 크게 뜨며 다소 혼란스러워 보였다.

부처님께서 계속 설명하셨다. “만약 향기 자체가 지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 지각은 향기에 속하니,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아난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스승님,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가 평소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부처님께서 안도의 미소를 지으셨다. “맞다, 아난아. 우리의 감각, 식, 그리고 세계 사이의 관계는 매우 신비롭다. 그것들은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 심오하다. 이를 이해하면 우리 자신과 주변 세계를 더 잘 알 수 있다.”

만약 향기와 악취가 반드시 너의 코를 생기게 한다면, 향기와 악취의 그 두 가지 흐르는 기운은 이란나무와 전단나무에서 생기지 않는다. 두 물체가 오지 않을 때 너는 스스로 너의 코를 향기롭다고 맡느냐, 악취가 난다고 맡느냐? 만약 악취가 난다면 향기롭지 않고, 만약 향기롭다면 악취가 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네가 향기와 악취를 둘 다 맡을 수 있다면 너 한 사람이 두 개의 코를 가져야 할 것이다. 만약 네가 나에게 두 명의 아난에 대해 묻는다면 어느 것이 너의 몸이냐? 만약 코가 하나라면 향기와 악취는 둘이 아니다. 만약 악취가 향기가 되고 향기가 악취가 된다면 이원성이 존재하지 않으니, 누구로부터 계가 세워지느냐? 만약 향기로 인해 생긴다면 식은 향기로 인해 존재한다. 마치 눈이 봄(見)을 가지고 있지만 눈을 관찰할 수 없는 것처럼, 향기로 인해 존재하므로 향기를 알지 못해야 한다. 만약 안다면 생긴 것이 아니고, 만약 모른다면 식이 아니다. 만약 향기가 앎이 없다면 향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식이 향기를 모른다면 계는 향기로부터 건립되지 않는다. 중간이 없으므로 내외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한 냄새 맡는 성품은 필경 허망하다. 그러므로 너는 코와 향이 연이 되어 비식계를 생기게 하는 것이 세 곳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코와 향과 향계, 이 셋은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니다.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며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재미있는 질문을 상상해 보자. 만약 향기와 악취가 너의 코에서 생성된다고 한다면, 그 냄새들은 이란나무나 전단나무에서 오지 않아야 하겠지?”

아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소 혼란스럽게 물었다. “예, 스승님. 하지만 냄새가 밖에서 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맡는 향기와 악취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계속 설명하셨다. “좋은 질문이다! 만약 향기와 악취가 별개라면 사람은 두 개의 코를 가져야 한다. 하나는 향기를 맡고 하나는 악취를 맡기 위해서. 그런 경우 내 앞에는 두 명의 아난이 서 있어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난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스승님, 그것은 너무 이상하게 들립니다. 물론 저는 코가 하나뿐입니다.”

부처님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맞다. 만약 코가 하나뿐이라면 향기와 악취 사이에 구별이 없어야 한다. 향기가 악취이고 악취가 향기이다. 하지만 우리는 향기와 악취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매우 모순되지 않느냐?”

아난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정말로 모순입니다, 스승님. 그렇다면 우리가 맡는 냄새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계속하셨다. “한 층 더 깊이 생각해 보자. 만약 우리의 식이 향기를 맡기 때문에 생성된다고 한다면 이 식은 향기가 무엇인지 몰라야 한다. 마치 눈이 사물을 볼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만약 우리가 향기가 무엇인지 안다면 이 식은 향기 때문에 생성된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향기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그것을 후각식이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

아난은 더욱 혼란스러워 보였고 부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다. “아난아, 보아라. 주의 깊게 생각하면 우리는 코, 향기, 후각식 사이의 관계가 우리가 평소 생각하는 것보다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들은 특정한 원인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아난이 무언가 깨달은 듯 말했다. “스승님,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가 평소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 뒤에 매우 깊은 진리가 숨겨져 있음을 느낍니다.”

부처님께서 안도의 미소를 지으셨다. “맞다, 아난아. 세상의 진실은 종종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러한 사유를 통해 우리는 점차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고 생명과 우주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을 유지하고 고유한 개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아난아, 네가 또한 이해하듯이 혀와 맛이 연이 되어 설식(舌識)이 생긴다. 이 식은 혀로 인해 생겨 혀를 계로 삼는가, 아니면 맛으로 인해 생겨 맛을 계로 삼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상상해 보자. 너는 혀가 맛을 지각할 수 있고, 그러면 설식이 생성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설식은 혀 때문에 생성되는가? 아니면 맛 때문에 생성되는가?”

아난아, 만약 혀 때문에 생긴다면 세상의 모든 사탕수수, 오매, 황련, 암염, 세신, 생강, 계피 등이 맛이 없을 것이다. 너는 네 혀를 맛보아라. 단가 쓰냐? 만약 혀의 성질이 쓰다면 누가 와서 혀를 맛보느냐? 혀는 스스로 맛보지 못하니 누가 지각하는 자이냐? 만약 혀의 성질이 쓰지 않다면 맛이 자연히 생기지 않으니 어떻게 계를 세우겠느냐? 만약 맛 때문에 생긴다면 식은 자연히 맛이 되고, 혀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맛보지 말아야 한다. 식이 어떻게 무엇이 맛이고 무엇이 맛이 아닌지 아느냐?

아난은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였고, 부처님께서 계속하셨다. “만약 설식이 혀 때문에 생성된다면 사탕수수든 오매든 황련이든 소금이든 세상의 모든 음식은 맛이 없어야 한다. 네 혀를 핥아보아라. 단가 쓰냐?”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며 물으셨다. “만약 혀 자체가 쓰다면 누가 이 쓴맛을 맛보느냐? 혀는 스스로를 맛볼 수 없으니 누가 맛을 느끼느냐?”

게다가 모든 맛은 하나의 대상에서 생기지 않는다. 맛이 다양하게 생기므로 식도 많은 몸을 가져야 한다. 만약 식의 몸이 하나라면 그 몸은 반드시 맛에서 생겨야 한다. 짠맛, 담백한 맛, 단맛, 매운맛이 화합하여 함께 생기고, 모든 변화하는상이 동일한 하나의 맛이 되니 분별이 없어야 한다. 분별이 없으니 식이라이름하지 않는다. 어떻게 다시 설미식계라고 이름하겠느냐? 허공이 너의 심식을 생성해서는 안 된다. 혀와 맛의 화합이 이 안에 있어 본래 자성이 없으니, 어떻게 계가 생기겠느냐? 그러므로 너는 혀와 맛이 연이 되어 설식계를 생기게 하는 것이 세 곳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혀와 맛과 설계, 이 셋은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만약 설식이 맛 때문에 생성된다면 설식 자체가 맛이 되어야 하며, 혀가 스스로를 맛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설식이 어떻게 이것은 맛이고 저것은 맛이 아니라고 구별할 수 있겠느냐?”

부처님께서 계속 설명하셨다. “또한 세상의 맛은 한 가지 사물에 의해 생성되지 않는다. 맛이 다양하니 설식 또한 여러 개여야 하지 않겠느냐? 만약 설식이 하나뿐이라면 짠맛, 담백한 맛, 단맛, 매운맛 등 모든 맛이 섞여서 모두 같은 맛이 되지 않겠느냐? 그런 경우 우리는 서로 다른 맛을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다. “그래서 아난아, 혀와 맛과 설식 사이에는 고정되고 불변하는 관계가 없다. 그것들은 인과 관계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해야 할 진리이다.”

아난아, 네가 또한 이해하듯이 몸과 촉이 연이 되어 신식(身識)이 생긴다. 이 식은 몸으로 인해 생겨 몸을 계로 삼는가, 아니면 촉으로 인해 생겨 촉을 계로 삼는가?

아난은 계속해서 부처님께 몸, 촉, 신식의 관계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며 참을성 있게 설명하셨다. “아난아, 상상해 보자. 너는 몸이 무언가에 닿을 때 신식이 생성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신식은 몸 때문에 생성되는가? 아니면 촉 때문에 생성되는가?”

아난아, 만약 몸 때문에 생긴다면 필연적으로 접촉이나 분리가 없을 것이다. 느끼고 관찰하는 두 가지 조건이 없다면 몸이 무엇을 지각하겠느냐? 만약 촉 때문에 생긴다면 필연적으로 너의 몸이 없을 것이다. 몸이 없는 자가 누구이기에 접촉과 분리를 알 수 있겠느냐? 아난아, 물체는 촉을 모르고 몸은 촉이 있음을 안다. 몸을 아는 것이 촉이고 촉을 아는 것이 몸이다. 촉이 되는 것은 몸이 아니고 몸이 되는 것은 촉이 아니다. 몸과 촉의 두 상은 본래 처소가 없다. 몸과 합하면 몸 자체의 성질이 되고 몸을 떠나면 허공과 같다. 내외가 성립하지 않으니 중간이 어떻게 서겠느냐? 중간이 서지 않으니 내외의 성품은 공하다. 너의 식이 생기더라도 누구로부터 계가 세워지느냐? 그러므로 너는 몸과 촉이 연이 되어 신식계를 생기게 하는 것이 세 곳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몸과 촉과 신계, 이 셋은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흥미로운 질문을 생각해 보자. 만약 우리의 식이 몸에서 생성된다고 한다면 몸은 물체의 접촉과 분리를 지각할 수 없어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난은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스승님, 그것은 정말 이상하게 들립니다. 만약 몸이 접촉과 분리를 감지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들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질문이다! 이제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보자. 만약 의식이 촉각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면, 너의 몸이 없다면 누가 접촉과 분리를 감지하겠느냐?”

아난은 눈을 크게 떴고, 다소 혼란스러워 보였습니다. 부처님은 계속해서 설명하셨습니다. “보아라, 물체 자체는 지각이 없으며, 우리 몸이 접촉을 감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몸의 존재를 아는 것은 촉각을 느끼는 것과 같고, 촉각을 느끼는 것은 몸의 존재를 아는 것과 같다. 그것들은 하나인 것 같기도 하고, 분리된 것 같기도 하다.”

“만약 촉각이 몸이 아니고 몸도 촉각이 아니라면, 몸과 촉각이라는 이 두 개념은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것이냐? 만약 그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면 몸의 본질이 된다. 만약 그것들이 분리된다면, 촉각은 허공과 같아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된다.”

아난은 골똘히 생각하며 말했습니다.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가 평소 단순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사실은 그렇게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부처님은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아난아. 깊이 생각해보면 몸, 촉각,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의식, 이 셋 사이의 관계가 매우 미묘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들은 어떤 원인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아난은 호기심을 가지고 물었습니다. “그럼 스승님, 우리는 이 감각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부처님은 자비롭게 대답하셨습니다. “아난아, 중요한 것은 확정적인 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한 사고를 통해 우리는 점차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고, 생명과 우주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아난아, 또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뜻(意)과 법(法)을 연(緣)으로 하여 의식이 생긴다. 이 식은 다시 뜻에 인하여 생겨서 뜻을 경계(界)로 삼느냐, 법에 인하여 생겨서 법을 경계로 삼느냐?

이어서 부처님은 의식과 법(생각, 개념)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너는 의식이 심의(心意)와 법(생각, 개념)에 의해 공동으로 생성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자.”

아난아, 만약 뜻에 인하여 생긴다면 네 뜻 가운데 반드시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너의 뜻을 발명할 것이다. 만약 앞의 법이 없다면 뜻이 생길 곳이 없을 것이니, 연을 떠나서 형체 없는 식을 장차 어디에 쓰겠느냐? 또 너의 식심과 여러 가지 사량함과 아울러 요별하는 성품이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같다면 곧 뜻이니 어찌 생겨난 것이라 하겠으며, 다르면 뜻과 같지 않으니 응당 아는 바가 없으리라. 만약 아는 바가 없다면 어찌 뜻이 생기겠느냐? 만약 아는 바가 있다면 어찌 식과 뜻이라 하겠느냐? 오직 같음과 다름의 두 성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경계가 어떻게 서겠느냐?

“만약 의식이 심의에 의해 생긴다면, 네 마음속에 반드시 어떤 생각이 있어서 네 의식을 계발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외재적인 사물이나 개념이 없다면, 네 심의는 또 어디서 생겨나겠느냐?”

“한편, 만약 의식이 법(생각, 개념)에 의해 생긴다면, 네 의식과 네 사고 과정은 같은 것이냐? 아니면 다른 것이냐? 만약 그것들이 같다면 의식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이냐? 만약 그것들이 다르다면 의식은 어떻게 이 생각과 개념들을 이해할 수 있느냐?”

부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다. “그러므로 아난아, 몸과 촉이든 의식과 법이든 그들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인과관계가 아니며,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해야 할 심오한 이치이다.”

만약 의식이 법으로 인해 생긴다면 세간의 모든 법은 5진(五塵)을 떠나지 않는다. 너는 색법과 모든 성법(聲法), 향법, 미법, 촉법의 양상이 분명함을 관찰해라. 오근(五根)을 대함에 있어 의(意)가 포섭하는 바가 아니다. 너의 식(識)이 결정코 법에 의지하여 생긴다면, 너는 지금 법이라는 법이 어떤 형상인지 자세히 관찰해 보아라. 만약 색과 공, 동(動)과 정(靜), 통(通)과 색(塞), 합(合)과 이(離), 생(生)과 멸(滅)을 떠난다면, 이 모든 상(相)을 넘어서서는 마침내 얻을 것이 없다. 생기면 색과 공 등의 모든 법이 똑같이 생기고, 멸하면 색과 공 등의 모든 법이 똑같이 멸한다. 원인이 이미 없는데, 원인으로 생기는 식이 무슨 형상을 짓겠느냐? 상의 모양이 있지 않은데 계(界)가 어떻게 생기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의와 법이 연이 되어 의식계를 생기게 하는 것은 세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의와 법과 의계, 이 셋은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약 의식이 법(생각, 개념)에 의해 생긴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다양한 법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보아라, 이 세상의 모든 법이 우리의 오감과 관련되어 있지 않느냐? 색, 소리, 향기, 맛, 감촉—이 모든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우리의 오감에 직접 대응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이어서 물으셨다. “그러면 이러한 감각적 경험 외에 법이 또 무엇일 수 있겠느냐? 만약 우리가 색, 공, 움직임, 고요함, 통함, 막힘, 합함, 떠남, 생겨남, 사라짐의 현상을 제거한다면 무엇이 남겠느냐?”

아난이 생각에 잠겨 고개를 가로저었고, 부처님께서 계속하셨다. “그러므로 의식, 법, 그리고 의계 사이에는 고정되고 불변하는 관계가 없다. 그것들은 인과관계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항상 화합 인연을 말씀하셨고, 일체 세간의 갖가지 변화는 다 4대(四大)의 화합으로 인해 발명된다고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이제 인연과 자연 두 가지를 모두 배척하십니까? 저는 지금 이 뜻이 어디에 속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컨대 가엾게 여기시어 중생들에게 개시해 주시고, 중도의 요의(了義)이자 희론이 없는 법을 설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아난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세존이시여, 당신께서는 종종 세상의 모든 변화가 인연의 결합으로 생겨나며 지, 수, 화, 풍 4대 요소로 구성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께서는 인연도 자연도 옳지 않다고 하시니, 저는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무엇이 중도의 진정한 이치입니까?”

그때 세존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먼저 성문과 연각의 모든 소승법을 싫어하여 떠났고, 무상보리를 부지런히 구하려는 마음을 내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너를 위해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설명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다시 세간의 희론과 망상 인연으로 스스로를 얽어매느냐? 네가 비록 많이 들었으나(多聞), 약에 대해 말하는 사람과 같아서 진짜 약이 앞에 나타나도 분별하지 못하는구나. 여래는 네가 참으로 가련하다고 말한다. 지금 자세히 들어라. 내가 너를 위해 분별하여 열어 보이리라. 또한 미래에 대승을 닦는 자들로 하여금 실상을 통달하게 하리라.” 아난은 잠자코 부처님의 성스러운 뜻을 받들었다.

부처님께서 아난을 자애롭게 바라보시며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아난아, 네가 전에 소승법에 지쳤다고 나에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너는 심오한 불법을 추구하고 깨달음의 진정한 길을 찾고 싶다고 말했지.” 아난은 공경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처님께서 계속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오늘 너에게 최고의 진리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아난아, 내가 보기에 너는 여전히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사용하여 이러한 이치를 이해하려 하고, 인과관계의 미로 속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것 같구나.” 아난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참으로 아는 것이 많구나. 마치 약리학에 능통한 사람 같다. 하지만 진짜 만병통치약이 네 바로 앞에 놓여 있는데도 네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느냐?” 아난은 고개를 들었고, 그의 눈은 지식을 구하는 빛으로 반짝였다.

부처님께서 사랑스럽게 말씀하셨다. “낙담하지 말라, 아난아. 너의 상태가 바로 연민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자, 이제 주의 깊게 들어라. 내가 너를 위해, 그리고 미래에 대승 불법을 추구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진정한 실재를 자세히 설명하리라.” 이 말씀을 듣고 아난은 너무 흥분하여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준비가 되었음을 보였다.

아난아, 네가 말한 것처럼 4대가 화합하여 세간의 갖가지 변화를 발명한다. 아난아, 만약 저 대(大)의 성품 자체가 화합하지 않는 것이라면, 다른 대들과 섞이고 합할 수 없다. 마치 허공이 여러 색과 화합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화합하는 것이라면 변화와 같아서, 시작과 끝이 서로 이루고 생멸이 상속된다. 생과 사, 사와 생, 생과 생, 사와 사가 마치 회전하는 불바퀴처럼 쉼 없이 계속된다.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계속하셨고, 아난은 주의 깊게 경청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세상의 변화가 지, 수, 화, 풍 4대 요소의 결합으로 형성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부처님께서 생생한 비유로 설명하셨다. “만약 이 요소들이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면, 그것들은 절대 섞일 수 없다. 마치 허공이 색깔과 섞일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만약 그것들이 정말로 섞이고 합할 수 있다면, 그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끝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며, 마치 끊임없이 회전하는 불바퀴처럼 될 것이다.”

아난아, 그것은 마치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다시 물이 되는 것과 같다. 너는 땅의 성질을 관찰해라. 거친 것은 대지가 되고 미세한 것은 티끌이 된다. 인허진(鄰虛塵)에 이르기까지 그 지극히 미세한 것을 분석하면, 색의 가장자리 상은 7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허를 다시 분석하면 그것은 참된 공성(空性)이다. 아난아, 만약 이 인허가 분석되어 허공이 된다면, 허공이 색상(色相)을 낳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는 지금 묻기를 화합으로 인해 세간의 모든 변화하는 상이 생긴다고 하였다. 너는 이 하나의 인허진을 관찰해 보아라. 얼마나 많은 허공을 사용하여 화합해야 이것이 있느냐? 인허가 합하여 인허가 될 리는 없다. 또한 만약 인허진이 분석되어 공으로 들어간다면, 얼마나 많은 색상을 사용하여 화합해야 허공을 성립시키겠느냐?

부처님께서 호수면을 가리키며 특별히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 호수 물을 보라. 물은 얼어서 얼음이 될 수 있고, 얼음은 녹아서 물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성질은 같고 단지 형태가 다를 뿐이다. 이제 우리 발밑의 대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아난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부처님을 바라보며 열중해서 들었다.

부처님께서 계속하셨다. “땅은 단단해 보이지만, 만약 우리가 그것을 끊임없이 쪼갠다면 결국 무엇을 얻게 되겠느냐?”

아난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입자를 얻게 될 것입니다.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부처님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맞다. 이 지극히 작은 입자들을 우리는 ‘인허진(이웃 허공 티끌)‘이라고 부른다. 만약 우리가 이 인허진들을 계속 쪼갠다면 그것들은 마침내 허공이 될 것이다.”

아난은 눈을 크게 떴고 다소 혼란스러워 보였다.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며 설명하셨다. “아난아, 만약 인허진이 허공으로 분해될 수 있다면, 반대로 허공도 물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너는 방금 나에게 세상의 만물이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지 물었다. 그러면 주의 깊게 생각해 보자. 하나의 인허진은 얼마나 많은 허공으로 구성되어 있느냐?”

아난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스승님, 이 질문에는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인허진은 이미 가장 작은 입자이니 더 작은 입자로 구성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찬성하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주 좋은 관찰이다, 아난아. 그러면 만약 인허진이 허공으로 분해될 수 있다면, 허공을 구성하는 데는 얼마나 많은 인허진이 필요하겠느냐?” 아난은 깊은 생각에 잠겼고, 이 질문이 자신의 이해 범위를 벗어난다고 느꼈다.

부처님은 자비롭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낙심하지 마라. 이 질문들의 목적은 확정적인 답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물질세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깊이 생각할 때, 우리가 평소 당연하게 여기던 일들이 사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난은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고, 세상의 진실이 표면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대화로 인해 그는 물질세계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존재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아난이 세상을 보는 눈은 더욱 깊고 지혜로워졌습니다.

만약 색(色)이 화합하여 생긴다면, 화합된 색은 공(空)이 아닐 것입니다. 만약 공이 화합하여 생긴다면, 화합된 공은 색이 아닐 것입니다. 색은 여전히 분석할 수 있지만, 공은 어떻게 화합하겠습니까? 그대는 본래 여래장 속에서 색의 성품이 진공(真空)이고, 공의 성품이 진색(真色)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본래 청정하며 법계에 두루합니다. 중생의 마음에 따라, 그들이 알 수 있는 능력에 반응하여 나타나며, 업을 따라 발견됩니다. 세상의 무지한 자들은 그것들을 인연이나 자연적인 성품으로 잘못 인식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의식 마음의 분별과 계탁이며, 단지 말만 있을 뿐, 참된 의미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며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더 깊이 생각해 보자. 만약 물질이 허공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것들이 결합할 때 더 이상 허공이 아니겠지? 마찬가지로, 만약 허공이 결합하여 물질이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허공이 아닐 것이다.”

아난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소 혼란스러운 듯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물질을 분해할 수 있지만, 허공은 어떻게 결합될 수 있겠느냐? 이 질문들은 답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깊은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

아난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떤 종류의 진리입니까?”

부처님께서 자애롭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우주의 본질인 여래장 속에서는 물질의 성품이 진공이고, 허공의 성품이 진색이다. 그것들은 본래 청정하여 온 법계에 두루하다.”

아난은 눈을 크게 뜨며 조금 이해한 듯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 설명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각 중생의 생각과 업에 따라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인과 관계나 자연적인 결과로 잘못 생각한다.”

아난은 생각에 잠겨 말했습니다. “스승님, 우리가 보는 세상이 사실은 우리 내면의 반영이라는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렇다, 아난아. 이 모든 설명과 이론들은 단지 우리 의식적인 마음의 분별적인 계산일 뿐이다. 그것들은 단지 공허한 말일 뿐이며 참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난은 깊은 생각에 잠겼고, 부처님께서는 온화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이 심오한 이치들에 괴로워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보는 세상이 궁극적인 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참된 지혜는 언어와 개념을 초월해 있다.”

아난은 갑자기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께 깊이 절했습니다. 이 대화는 그에게 세상의 본질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주었습니다. 그는 참된 지혜가 피상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 세상을 바라보는 아난의 눈은 더욱 깊고 지혜로워졌습니다.

아난아, 불의 성품은 자아가 없으며, 여러 조건에 의지한다. 성 안의 가족이 아직 식사하지 않고 요리를 하려 할 때, 태양 앞에서 양수(볼록 렌즈)를 들고 불을 구하는 것을 관찰해 보라. 아난아, ‘화합’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너, 그리고 1,250명의 비구들이 지금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 비록 공동체는 하나이지만, 근본을 따져보면 각자 자신의 몸이 있고, 모두 태생과 씨족 이름과 개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리불이 바라문 종족이고, 우루빌라가 가섭 종족이며, 심지어 아난이 고타마 종족인 것처럼. 아난아, 만약 이 불의 성품이 화합으로 인해 존재한다면, 그 사람이 거울을 들고 태양에서 불을 구할 때, 이 불은 거울에서 나오는가, 쑥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태양에서 나오는가?

아난을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다른 예를 드셨습니다. “아난아, 불은 그 자체의 실체가 없으며, 여러 조건에 의지하여 존재한다. 보라, 성 안에는 불을 피워 요리하려는 가족들이 있다. 그들은 불을 얻기 위해 태양을 향해 볼록 렌즈를 들고 있다.”

“화합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설명하셨습니다. “마치 우리 1,250명의 비구들이 함께 모여 승가가 된 것과 같다. 비록 우리는 하나의 전체이지만, 모두가 각자의 몸을 가지고 있고, 각자의 출신과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리불이 바라문 성이고, 우루빌라 가섭이 가섭 성이며, 너 아난이 고타마 성인 것처럼.”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만약 불의 성품이 화합으로 인해 존재한다면, 그 사람이 태양을 향해 볼록 렌즈를 사용하여 불을 만들 때, 이 불은 거울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쑥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태양에서 오는가?”

아난아, 만약 그것이 태양에서 왔다면, 네 손에 있는 쑥을 태울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온 곳의 숲에 있는 모든 나무들도 불에 탔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거울에서 나왔다면, 자연스럽게 거울 안에서 나와 쑥에 불을 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왜 거울은 녹지 않는가? 그것을 들고 있는 손은 열기를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거울이 녹을 수 있겠는가? 만약 그것이 쑥에서 생겨난 것이라면, 왜 불이 생기기 전에 태양과 거울의 빛이 접촉해야 하는가? 다시 자세히 살펴보라. 거울은 손에 들려 있고, 태양은 하늘에서 오며, 쑥은 땅에서 난다. 불은 어느 방향에서 이곳으로 이동해 왔는가? 태양과 거울은 멀리 떨어져 있어 조화롭지도 않고 결합되지도 않았다. 불빛이 아무 데서나 저절로 존재할 리는 없다.”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며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이 불을 만드는 문제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해 보자. 만약 불이 태양에서 왔다면, 네 손에 있는 쑥은 진작에 타버렸어야 하고, 오는 길에 있는 나무들도 불이 붙었어야 하지 않겠느냐?”

부처님께서는 계속하셨습니다. “만약 불이 거울에서 나왔다면, 거울 자체가 먼저 녹았어야 한다. 그러나 너는 거울을 들고 있어도 열을 느끼지 못한다. 이것은 왜일까?”

“만약 불이 쑥 자체에서 생겨난 것이라면, 왜 태양과 거울이 필요한가?”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주의 깊게 생각해 보라. 거울은 네 손에 있고, 태양은 하늘에 있으며, 쑥은 땅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불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대는 여래장 속에서 불의 성품이 진공이고, 공의 성품이 진색임을 아직 알지 못한다. 그것들은 본래 청정하며 법계에 두루하다. 중생의 마음에 따라, 그들이 알 수 있는 능력에 반응하여 나타난다. 아난아, 그대는 알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한 곳에서 거울을 들면 한 곳에서 불이 생겨난다. 만약 거울을 법계 전체에 들면, 불은 세상을 가득 채우며 일어난다. 그것이 세상을 가득 채우며 일어나는데, 어찌 고정된 위치가 있겠는가? 그것은 업을 따라 발견된다. 세상의 무지한 자들은 그것을 인연이나 자연적인 성품으로 잘못 인식한다. 이것들은 모두 의식 마음의 분별과 계탁이며, 단지 말만 있을 뿐, 참된 의미는 없다.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며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이 불을 보라. 너는 아직 우주의 본질, 즉 여래장 속에서 불의 성품이 진공이고, 혹응의 성품이 진색임을 모를 수도 있다. 그것들은 본래 청정하여 온 우주에 두루하다.”

아난은 눈을 크게 뜨며 다소 혼란스러운 듯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각 중생의 생각과 이해 능력에 따라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아난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습니다. “스승님,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모닥불을 가리키며 참을성 있게 설명하셨습니다. “아난아, 알고 있느냐? 만약 세상 사람들이 한 장소에서 거울을 들면, 태양의 빛은 그 장소에서 불로 모일 것이다. 만약 거울이 전 세계에 놓인다면, 불은 전 세계에 두루할 것이다.” 아난은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불이 정말로 고정된 위치를 가지고 있을까? 그것은 단지 우리의 업 때문에 나타날 뿐이다. 세상의 무지한 사람들은 이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인과 관계나 자연적인 결과로 잘못 생각한다.”

아난은 놀라서 말했습니다. “스승님, 우리가 보는 불이 사실은 우리 내면과 업의 반영이라는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렇다, 아난아. 이 모든 설명과 이론들은 단지 우리 의식적인 마음의 분별적인 계산일 뿐이다. 그것들은 단지 공허한 말일 뿐이며 참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난은 깊은 생각에 잠겼고, 부처님께서는 온화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이 심오한 이치들에 괴로워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보는 세상이 궁극적인 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참된 지혜는 언어와 개념을 초월해 있다.”

아난은 갑자기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께 깊이 절했습니다. 이 대화는 그에게 세상의 본질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주었습니다. 그는 참된 지혜가 피상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 세상을 바라보는 아난의 눈은 더욱 깊고 지혜로워졌습니다.

아난아, 물의 성품은 정해져 있지 않아 흐름과 멈춤이 일정하지 않다. 마치 사위성의 위대한 마술사들인 가비라, 착카라, 파드마하스틴 등이 태음(달)의 정기를 구해 마법의 물약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이 마술사들은 백월(보름달 기간)의 낮에 ‘방주’(물을 모으는 수정)를 손에 들고 달에서 물을 받는다. 이 물은 구슬에서 나오는가, 허공에 저절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달에서 오는가? 아난아, 만약 그것이 달에서 온다면, 먼 거리에서도 구슬에서 물이 나오게 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지나가는 숲의 나무들도 모두 습기를 토해내야 한다. 만약 그것들이 흐른다면, 왜 구슬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는가? 만약 흐르지 않는다면, 밝은 물은 달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구슬에서 나온다면, 이 구슬은 항상 물을 흘려보내야 한다. 왜 한밤중의 채집이나 백월의 낮을 기다리는가? 만약 그것이 허공에서 생긴다면, 허공의 성품이 끝이 없으므로 물도 끝이 없어야 한다. 인간부터 천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익사할 것이다. 어떻게 여전히 물 위, 육지 위, 공중의 여행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부처님께서는 물의 신비를 사용하여 아난에게 심오한 이치를 가르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며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이 호수의 물을 보라. 물의 성품은 무상하고 변하여, 때로는 흐르고 때로는 고요하다. 이것은 나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아난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습니다. “어떤 이야기입니까, 스승님?”

부처님께서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사위성에는 가비라, 착카라, 파드마하스틴과 같은 유명한 마술사들이 있다. 그들은 항상 마법의 물약을 만들기 위해 달의 정기를 찾고 있다.”

“이 마술사들은 낮에 달에서 물을 받기 위해 특별한 보석을 손에 들고 있을 것이다.”

아난은 눈을 크게 뜨며 놀라서 물었습니다. “스승님, 이 물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보석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원래 공기 중에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달에서 오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자애롭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이 문제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자. 만약 물이 달에서 온다면, 나무를 포함하여 달빛이 비치는 모든 장소에서 물이 흘러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지?”

아난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하셨습니다. “만약 물이 보석에서 나온다면, 보석은 언제든지 물을 흘려보낼 수 있어야 하는데, 왜 달빛이 비치기를 기다리는가?”

“만약 물이 공기 중에서 온다면, 공기 중 어디에나 물이 있으니 온 세상이 물에 잠기지 않겠느냐? 어떻게 여전히 육지와 하늘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난은 열심히 들었지만 혼란스러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온화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이 이야기는 사물의 본질이 우리가 표면적으로 보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제한된 지식을 사용하여 세상을 설명하지만, 진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할 수 있다.”

아난은 생각에 잠겨 말했습니다. “스승님, 우리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세상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열린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렇다, 아난아. 참된 지혜는 피상적인 설명을 추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다. 호기심과 열린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지혜의 길이다.”

너는 더 깊이 관찰하라. 달은 하늘에서 뜨고, 구슬은 손에 들려 있으며, 물을 받는 쟁반은 사람이 설치한다. 물은 어느 방향에서 이곳으로 흘러오는가? 달과 구슬은 멀리 떨어져 있어 조화롭지도 않고 결합되지도 않았다. 물의 정기가 아무 데서나 저절로 존재할 리는 없다. 너는 여래장 속에서 물의 성품이 진공이고, 공의 성품이 진수(真水)임을 아직 알지 못한다. 그것들은 본래 청정하며 법계에 두루하다. 중생의 마음에 따라, 그들이 알 수 있는 능력에 반응하여 나타난다. 만약 구슬을 한 곳에서 들면, 물은 한 곳에서 나온다. 만약 그것들을 법계 전체에 들면, 물은 법계를 가득 채우며 생겨난다. 그것이 세상을 가득 채우며 생겨나는데, 어찌 고정된 위치가 있겠는가? 그것은 업을 따라 발견된다. 세상의 무지한 자들은 그것을 인연이나 자연적인 성품으로 잘못 인식한다. 이것들은 모두 의식 마음의 분별과 계탁이며, 단지 말만 있을 뿐, 참된 의미는 없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온화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다시 주의 깊게 생각해 보자. 달은 하늘 높이 있고, 보석은 사람의 손에 있으며, 물을 받는 쟁반은 사람이 놓아둔다. 그렇다면 물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아난은 눈상을 찌푸리며 생각했고, 부처님께서는 계속하셨습니다. “달과 보석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연결되지도 않고 결합되지도 않았다. 물이 이유 없이 저절로 나타날 수는 없다. 답을 생각할 수 있겠느냐?”

아난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사실 너는 우주의 본질, 즉 여래장 속에서 물의 성품이 진공이고, 공의 성품이 진수임을 아직 모른다. 그것들은 본래 청정하여 온 우주에 두루하다.”

아난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 설명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각 중생의 생각과 이해 능력에 따라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보석을 한 곳에서 들면 물이 그 곳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만약 보석이 온 우주에 놓인다면, 물은 온 우주에 두루할 것이다.”

아난은 생각에 잠겨 물었습니다. “스승님, 우리가 보는 물이 사실은 우리 내면의 반영이라는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렇다, 아난아. 물은 세상에 두루하지만, 정말로 고정된 위치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단지 우리의 업 때문에 나타날 뿐이다. 세상의 무지한 사람들은 이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인과 관계나 자연적인 결과로 잘못 생각한다.”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이 모든 설명과 이론들은 단지 우리 의식적인 마음의 분별적인 계산일 뿐이다. 그것들은 단지 공허한 말일 뿐이며 참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난은 깊은 생각에 잠겼고, 부처님께서는 온화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이 심오한 이치들에 괴로워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보는 세상이 궁극적인 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참된 지혜는 언어와 개념을 초월해 있다.”

아난아, 바람의 성품은 형체가 없어 움직임과 고요함이 일정하지 않다. 너는 자주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대중 속으로 들어간다. 너의 승가리(가사) 자락이 움직이며 사람들을 스칠 때, 그들의 얼굴을 스치는 미풍이 있다. 이 바람은 가사 자락에서 나오는가, 허공에서 생기는가, 아니면 사람의 얼굴에서 생겨나는가? 아난아, 만약 이 바람이 가사 자락에서 나온다면, 너는 바람을 (옷 안에) 입고 있는 셈이니, 옷이 날리고 흔들릴 때 그것은 너의 몸을 떠나야 한다. 내가 지금 대중 속에서 옷을 늘어뜨리고 법을 설하고 있는데, 내 옷을 보아라, 바람이 어디에 있는가? 옷 속에 바람을 저장하는 곳이 있을 리가 없다.

부처님은 계속해서 가르침을 펴시며 이번에는 바람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바람은 고정된 형체가 없어 때로는 움직이고 때로는 멈춘다. 네가 옷을 정돈하고 대중 속으로 들어갈 때, 가사가락이 가볍게 흔들려 미풍을 일으키고 옆 사람의 얼굴을 스치는 것을 눈치챘느냐?”

부처님은 이어서 물으셨습니다. “이 바람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네 가사가락에서 나온 것이냐? 허공에서 생긴 것이냐? 아니면 그 사람의 얼굴에서 생겨난 것이냐?”

부처님은 웃으며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바람이 가사가락에서 나온 것이라면, 네가 옷을 입을 때 옷이 날아올라 네 몸에서 멀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보아라, 내가 지금 설법하고 있는 동안 내 옷은 조용히 늘어져 있다. 바람은 어디에 있느냐?”

만약 허공에서 생긴다면, 네 옷이 움직이지 않을 때 무엇 때문에 떨치지 않느냐? 공의 성품이 상주(常住)한다면 바람도 응당 항상 생겨야 할 것이다. 만약 바람이 없을 때는 허공이 마땅히 멸해야 할 것이니, 바람이 멸하는 것은 볼 수 있거니와 허공이 멸하는 것은 어떤 모양이겠느냐? 만약 생멸이 있다면 허공이라 이름하지 못할 것이요, 허공이라 이름하면 어찌 바람이 나오겠느냐? 만약 바람이 스스로 생겨서 저 떨치는 얼굴이라면, 저 얼굴에서 생겨서 응당 너를 떨쳐야 할 것이다. 네가 스스로 옷을 정돈하는데 어찌 거꾸로 떨치겠느냐?

“만약 바람이 허공에서 생겨난다면,” 부처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왜 바람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것이냐? 허공은 항상 존재하는데, 바람도 응당 항상 존재해야 하지 않겠느냐?”

부처님은 또 물으셨습니다. “만약 바람이 그 사람의 얼굴에서 생겨난 것이라면, 왜 네가 옷을 정돈할 때 바람이 그의 얼굴에 부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냐?”

너는 자세히 살펴 보아라. 옷을 정돈하는 것은 너에게 있고, 얼굴은 저 사람에게 속한다. 허공은 고요하여 유동에 참여하지 않는데, 바람은 어느 쪽에서 고동하여 여기에 왔느냐? 바람과 공은 성품이 격하여 화(和)도 아니고 합(合)도 아니니, 응당 바람의 성품이 좇아온 곳 없이 스스로 있을 수는 없으리라. 너는 완연히 여래장 가운데, 성품인 바람은 진실한 공이요 성품인 공은 진실한 바람이라, 청정하고 본연하여 법계에 두루한 줄을 알지 못하는구나.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소지량(所知量)에 응한다. 아난아, 너 한 사람과 같이 약간 의복을 움직이면 약간의 바람이 나오고, 온 법계에 떨치면 온 국토에 생긴다. 두루한 세간에 어찌 방소(方所)가 있겠느냐? 업을 따라 발견하는 것을 세간에서 알지 못하고, 미혹하여 인연 및 자연성이라 하니, 다 이는 식심으로 분별하고 헤아리는 것이라, 단지 말만 있을 뿐 도무지 실다운 뜻은 없느니라.

부처님은 자비롭게 아난을 바라보며 계속 가르치셨습니다. “아난아, 자세히 생각해보아라. 옷을 정돈한 것은 너이고, 바람을 느낀 것은 다른 사람이다. 허공은 본래 고요하여 스스로 흐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바람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냐?”

부처님은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바람과 공의 성질은 달라서, 그것들은 완전히 융합될 수도 없고 완전히 분리될 수도 없다. 바람의 본질이 허공에서 나타날 리는 없다.”

“사실, 아난아,” 부처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아직 여래장 속에서 바람의 본질이 공이고, 공의 본질이 바람이라는 것을 모른다. 이 이치는 청정하고 본래 그러하여 법계에 두루 퍼져 있다. 단지 중생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이 이치에 대한 이해도 다른 것이다.”

부처님은 생생한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마치 네가 옷을 가볍게 움직이면 미풍이 생기는 것과 같다. 만약 온 세상이 움직인다면 바람이 온 세상에 두루 퍼지지 않겠느냐? 바람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 이것들은 사실 모두 중생의 업력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세간 사람들은 이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연화합이나 자연발생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우리 식심의 분별계교일 뿐, 단지 공허한 말일 뿐 진실한 의미는 없다.”

아난아, 공의 성품은 형체가 없으나 색(色)에 인하여 드러난다. 마치 공라성(空羅城)이 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과 같아서, 여러 찰리종 및 바라문, 비사, 수타와 아울러 파라 타, 전다라 등이 새로 안거를 세우고 우물을 파서 물을 구한다. 흙을 한 자 파내면 그 가운데 곧 한 자의 허공이 있고, 이와 같이 하여 흙을 한 길 파내면 중간에 도리어 한 길의 허공을 얻는다. 공허의 얕고 깊음은 흙을 파낸 다소에 따른다.

이어서 부처님은 다시 공의 본질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공은 모양이 없지만 물질의 존재로 인해 드러난다. 예를 들어보겠다.”

부처님은 묘사하셨습니다. “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크샤트리아, 바라문, 바이샤, 수드라, 심지어 찬달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물을 찾기 위해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그들이 한 자의 흙을 파내면 한 자의 공간이 나타난다. 한 길의 흙을 파내면 한 길의 공간이 나타난다. 공간의 깊이는 전적으로 그들이 얼마나 많은 흙을 파냈느냐에 달려 있다.”

부처님은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아난아, 보아라. 공간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간이 줄곧 거기에 있었고, 우리는 단지 굴착이라는 행위를 통해 그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것과 같아서, 수행과 사고를 통해서만 비로소 그 깊은 뜻을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다.”

이 공은 마땅히 흙에 인하여 나온 것이냐, 파는 것에 인하여 있는 것이냐, 원인 없이 스스로 생긴 것이냐? 아난아, 만약 다시 이 공이 원인 없이 스스로 생긴 것이라면, 아직 흙을 파기 전에는 어찌하여 막힘이 없지 않고, 오직 대지가 막혀서 통달함이 없는 것만 보이느냐? 만약 흙에 인하여 나온다면 곧 흙이 나올 때 응당 공이 들어감을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흙이 먼저 나오고 공이 들어가는 것이 없다면, 어찌 허공이 흙에 인하여 나온다 하겠느냐? 만약 나오고 들어감이 없다면, 곧 응당 공과 흙이 원래 다른 원인이 없어야 할 것이다. 다르지 않다면 곧 같으니, 즉 흙이 나올 때 공은 어찌하여 나오지 않느냐?

부처님은 가르침을 계속하시며, 이번에는 우물 파는 예를 들어 더 깊은 이치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는 미소 지으며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자세히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우물을 팔 때 나타나는 그 공간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흙을 파냈기 때문에 있는 것이냐? 파는 동작 때문에 생긴 것이냐? 아니면 본래 거기에 있던 것이냐?”

부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이 공간이 저절로 나타난 것이라면, 우물을 파기 전에는 왜 보이지 않았느냐? 우리는 단지 단단한 대지만 보았을 뿐, 어떤 통로도 없지 않았느냐.”

만약 파는 것에 인하여 나온다면, 파서 나오는 공은 응당 흙을 내지 않아야 할 것이다. 파는 것에 인하여 나오지 않는다면, 파는 것이 스스로 흙을 냄에 어찌하여 공을 보느냐? 너는 다시 자세히 살피고, 살피고 또 자세히 보아라. 파는 것은 사람의 손을 따라 방향대로 운전하고, 흙은 땅에 인하여 옮겨진다. 이와 같은 허공은 무엇에 인하여 나온 것이냐? 파는 것과 공은 허와 실이라 서로 위를 삼아 용이 되지 않고, 화(和)도 아니고 합(合)도 아니다. 응당 허공이 좇아온 곳 없이 스스로 나온 것은 아니리라.

부처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공간이 흙을 파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면, 흙이 파내질 때 공간이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광경을 보지 못했다, 그렇지 않느냐?”

부처님은 미소 지으며 물으셨습니다. “만약 굴착 때문에 허공이 나타난다면, 굴착은 흙이 아니라 허공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흙이 파헤쳐지는 것을 보고 있다. 그렇다면 허공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부처님은 친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너는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굴착은 인간의 행위이고, 흙은 땅에서 옮겨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허공은 어디에서 오는가? 굴착과 허공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완전히 합쳐질 수도 없고 완전히 분리될 수도 없다.”

만약 이 허공의 성품이 완벽하게 두루 하고 본래 움직이지 않는다면, 너는 마땅히 현재의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즉 5대(五大)라고 불리는 것들이 모두 참으로 완벽하고 성품이 서로 융합되어 있으며, 모두 불생불멸의 여래장임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너의 마음은 혼미하여 4대(四大)가 본래 여래장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너는 허공이 나오거나 들어가는지, 아니면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너는 단지 여래장 안에서 각성(覺性)이 진정한 허공이고 허공의 성품이 진정한 각성이며, 청정하고 본래 법계에 두루 하여 중생의 마음의 양(量)에 따라 나타난다는 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부처님은 계속하셨습니다. “사실, 아난아, 허공의 성품은 완벽하고 두루 하며, 본래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 너는 땅, 물, 불, 바람의 성품, 즉 우리가 지금 보는 이 5대 요소가 실제로는 모두 융합되어 있고, 모두 여래장으로부터 나오며, 본래 생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결론지으셨습니다. “아난아, 너의 마음은 여전히 미혹 속에 있어 4대 요소의 본질이 여래장임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너는 허공에 정말로 출입이 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사실, 여래장 안에서 깨달음의 성품은 진정한 허공이고, 허공의 성품은 진정한 깨달음이다. 이 이치는 청정하고 본래적이며, 전체 법계에 두루 하다. 단지 중생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이 이치에 대한 이해도 다른 것이다.”

아난아, 한 우물의 공간이 한 우물을 가져오는 것처럼, 시방의 허공도 또한 이와 같다. 어떻게 완벽한 시방에 고정된 장소가 있을 수 있겠는가? 업을 따라 세상의 무지한 자들이 그것을 발견하고 인연이나 자연성(자연적으로 생겨남)으로 오해한다. 이것들은 모두 의식하는 마음의 분별과 계탁이며, 단지 말일 뿐 실제 의미는 없다.

부처님은 미소 지으며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우물의 공간이 그 우물 안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시방의 허공도 또한 그와 같다. 허공은 시방에 두루 한데, 어디에 고정된 위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연이나 자연성으로 오해한다. 이것들은 단지 우리 의식하는 마음의 계탁일 뿐이며, 실제 의미가 없는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아난아, 봄(見)과 깨달음(覺)은 지각이 없다. 그것들은 색(色)과 허공 때문에 존재한다. 네가 지금 기원정사에 있어 아침에는 밝고 저녁에는 어두운 것과 같다. 한밤중이라면 백월(보름달)은 빛을 가져오고, 흑월(그믐달)은 어둠을 가져온다. 빛과 어둠은 봄(見) 때문에 분석된다. 이 봄은 빛, 어둠, 태허공과 일체인가, 일체가 아닌가? 그것들은 같은가 같지 않은가, 다른가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부처님은 낮과 밤의 변화를 사용하여 더 깊은 이치를 설명하셨습니다. “아난아, 우리의 시각적 지각은 빛과 어둠 때문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너는 지금 기원정사에 있다. 아침에는 밝고 밤에는 어둡다. 혹은 달의 중간에 달이 밝으면 빛이 있고, 달이 밝지 않으면 어둠이 있다. 빛과 어둠은 우리의 시각 때문에 구별된다.”

부처님은 이어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봄(見)‘은 빛, 어둠, 허공과 하나인가? 아니면 그것들과 하나가 아닌가? 아니면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가? 아니면 하나도 아니고 하나가 아닌 것도 아닌가?”

아난아, 만약 이 봄이 본래 빛, 어둠, 허공과 한 몸이라면, 빛과 어둠의 두 몸은 서로를 없앨 것이다. 어두울 때는 빛이 없고, 밝을 때는 어둡지 않다. 만약 어둠과 하나라면, 밝을 때 봄은 멸할 것이다. 반드시 빛과 하나여야 한다면, 어두울 때 그것(봄)은 멈춰야 한다. 만약 멈춘다면, 어떻게 빛을 보고 어둠을 볼 수 있겠는가? 만약 어둠과 빛이 다르고, 봄에는 생멸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들이 한 몸을 이룰 수 있겠는가?

부처님은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봄’이 빛, 어둠, 허공과 하나라면, 빛과 어둠은 서로를 제거해야 한다. 어둠 속에는 빛이 없고, 빛 속에는 어둠이 없다.”

만약 ‘봄’이 어둠과 하나라면, 빛 속에서 ‘봄’은 사라져야 한다.”

만약 ‘봄’이 빛과 하나라면, 어둠 속에서 ‘봄’은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빛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있고 또한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볼 수 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는가?”

부처님은 결론지으셨습니다. “만약 빛과 어둠이 다르지만 ‘봄’은 불생불멸이라면, 어떻게 그것들이 한 몸일 수 있겠는가?”

만약 이 견정(見精)이 어둠이나 빛과 한 몸이 아니라면, 빛, 어둠, 허공을 떠났을 때, 봄의 근원은 어떤 형상을 가지는가? 빛을 떠나고, 어둠을 떠나고, 허공을 떠나면, 봄의 근원은 거북이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다. 빛, 어둠, 허공은 세 가지 다른 것이다. 어디에서 봄이 성립하는가? 빛과 어둠은 서로 반대된다. 어떻게 그것들이 같을 수 있겠는가? 세 가지 근원에서 떠나면, 허공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떻게 그것들이 다를 수 있겠는가? 허공을 나누고 봄을 나누어도 본래 경계는 없다. 어떻게 그것들이 같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둠을 보고 빛을 보아도,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것들이 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처님은 친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만약 네가 우리의 시각적 지각이 빛, 어둠, 허공과 하나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빛, 어둠, 허공과 별개로 봄의 본질을 묘사할 수 있는가? 이것들을 떠나면, 봄은 거북이 털이나 토끼 뿔과 같아서, 단순히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이어서 물으셨습니다. “만약 빛, 어둠, 허공이 완전히 다르다면, 시각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빛과 어둠은 반대된다. 어떻게 그것들이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세 가지를 떠나서, 어떻게 시각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너는 더 자세히 살피고, 미세하게 살피고, 진실하게 살피고,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빛은 태양에서 오고, 어둠은 흑월을 따른다. 통(通)은 허공에 속하고, 색(塞)은 대지로 돌아간다. 이 견정(見精)은 어디에서 오는가? 봄은 지각이 있고, 허공은 완(頑, 지각이 없음)이다. 그것들은 섞이지도 합해지지도 않는다. 견정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나올 리가 없다.

부처님은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더 주의 깊게 생각하고 더 깊이 관찰해야 한다. 빛은 태양에서 오고, 어둠은 달에 따라 변하며, 허공은 어디에나 있고, 대지는 모든 것을 지탱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각적 지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다른 것들과 융합될 수도 없고 완전히 분리될 수도 없다. 시각의 본질이 허공에서 나타날 수는 없다.”

만약 봄, 들음, 앎의 성품이 완벽하고 두루 하며 본래 움직이지 않는다면, 너는 마땅히 무변하고 부동하는 허공과 움직이는 지, 수, 화, 풍이 모두 6대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들의 성품은 참으로 완벽하게 융합되어 있으며, 모두가 여래장이고 본래 생멸이 없다. 아난아, 너의 성품은 가라앉아 있어 너의 봄, 들음, 깨달음, 앎이 본래 여래장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너는 이 봄, 들음, 깨달음, 앎을 관찰해야 한다. 그것들은 생겨나는가 멸하는가? 같은가 다른가? 불생불멸인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가?

부처님은 계속해서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우리의 봄, 들음, 앎의 성품이 완벽하고 두루 하며 본래 움직이지 않는다면, 너는 마땅히 무변의 허공과 움직이는 땅, 물, 불, 바람, 이 6대 요소가 실제로는 모두 성품이 완벽하며, 모두 여래장으로부터 나오며, 본래 생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는 여래장 안에서 견성(見性)이 깨달음의 이해이고, 깨달음의 본질이 명확한 봄임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청정하고 본래적이며, 법계에 두루 하여 중생의 마음의 양에 따라 나타난다. 하나의 볼 수 있는 기관(眼根)이 법계를 보듯이, 들음, 냄새 맡음, 맛봄, 닿음, 앎 또한 묘한 덕(德)이며 밝게 법계에 두루 하다. 완벽한 시방의 허공에 어떻게 고정된 장소가 있을 수 있겠는가? 업을 따라 세상의 무지한 자들이 그것을 발견하고 인연이나 자연성으로 오해한다. 이것들은 모두 의식하는 마음의 분별과 계탁이며, 단지 말일 뿐 실제 의미는 없다.

부처님은 자비롭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너의 성품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어, 너의 봄, 들음, 느낌, 앎의 본질이 여래장임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너는 이 지각들이 생겨나는지 멸하는지, 같은지 다른지, 불생불멸인지, 혹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지를 관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부처님은 결론지으셨습니다. “아난아, 너는 여래장 안에서 견성이 밝고 각성의 본질이 명확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 이치는 청정하고 본래적이며, 전체 법계에 두루 하다. 단지 중생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이 이치에 대한 이해도 다른 것이다. 하나의 눈이 전 법계를 볼 수 있듯이, 우리의 들음, 냄새 맡음, 맛봄, 닿음, 앎 또한 이와 같아서, 그 묘한 작용은 전 법계에 두루 하다. 그것들은 시방에 가득 차 있다. 어디에 고정된 장소가 있겠는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연이나 자연성으로 오해한다. 이것들은 단지 우리 의식하는 마음의 계탁일 뿐이며, 실제 의미가 없는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아난아, 식성(識性, 의식의 성품)에는 근원이 없다. 그것은 여섯 종류의 뿌리(根)와 티끌(塵) 때문에 허망하게 생긴다. 너는 지금 이 성인들의 모임을 두루 보고 있다. 너의 눈은 그들을 차례로 훑어보지만, 마치 거울 속에 분석이 없는 것과 같다. 너의 의식(識)은 그들을 하나하나 식별한다. ‘이 분은 문수, 이 분은 부루나, 이 분은 목건련, 이 분은 수보리, 이 분은 사리불’이라고. 이 아는 의식은 봄에서 생기는가? 상(相)에서 생기는가? 허공에서 생기는가? 아니면 원인 없이 갑자기 나타나는가?

부처님은 설법을 계속하시며 이번에는 의식의 본질에 대해 논하셨습니다. 그는 친절하게 아난을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우리의 의식은 본래 근원이 없다. 그것은 6근과 6진의 잘못된 인식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작은 실험을 해보자.”

부처님은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주위의 성인들을 둘러보아라. 너의 눈은 거울처럼 상을 비추며 아무런 분별 없이 그들을 훑는다. 그러나 너의 의식은 그들을 식별할 수 있다. ‘이 분은 문수보살, 이 분은 부루나, 이 분은 목건련, 이 분은 수보리, 이 분은 사리불’이라고.”

부처님은 이어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의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너의 시각에서 생기는가? 네가 보는 상에서 생기는가? 허공에서 생기는가? 아니면 이유 없이 갑자기 나타나는가?”

아난아, 만약 너의 식성이 봄 안에서 생긴다면, 만약 빛, 어둠, 색, 허공이 없다면, 이 네 가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본래 너의 봄은 없게 된다. 견성이 없다면 어디에서 의식이 생기겠는가? 만약 너의 식성이 상에 생기고 봄에서가 아니라면, 빛도 어둠도 보지 못하게 된다. 빛과 어둠이 보이지 않으면 색도 허공도 없다. 그러한 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의식이 생기겠는가? 만약 허공에서 생긴다면, 그것은 상도 아니고 봄도 아니다. 봄이 아니라면 분별이 없어 스스로 빛, 어둠, 색, 허공을 알 수 없다. 상이 아니라면 인연은 멸하고, 봄, 들음, 깨달음, 앎은 성립할 곳이 없다. 이 두 가지 비존재에 위치하여, 허공은 무(無)와 같지 않고, 유(有)는 사물과 같지 않다. 설사 너의 의식이 생긴다 해도 무엇을 분별하고자 하겠는가?

부처님은 계속해서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의식이 시각에서 생긴다면, 빛, 어둠, 색, 공간이 없을 때 너의 시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만약 의식이 상에서 생기고 시각에서가 아니라면,”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빛도 어둠도 보지 못하게 된다. 빛과 어둠을 보지 못하면 색도 공간도 없다. 만약 그러한 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부처님은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의식이 허공에서 생기고 상에서도 봄에서도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빛, 어둠, 색, 공간을 분별하거나 알 수 없다. 그것은 상도 아니고 인연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봄, 들음, 느낌, 앎은 어떻게 성립되는가?”

마지막으로 부처님은 결론지으셨습니다. “아난아, 보아라. 의식은 허공도 아니고 실체가 있는 물건도 아니다. 설사 그것이 정말로 생긴다 해도 무엇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의식이 원인 없이 갑자기 생긴다면, 왜 대낮에 밝은 달을 구별하지 않는가? 너는 이것을 자세히 생각하고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봄은 너의 눈에 의지하고, 상은 너의 앞에 나타난다. 형상이 있는 것은 유(有)를 나타내고, 형상이 없는 것은 무(無)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의식은 어떻게 생기는가? 의식은 움직이고, 봄은 고요하다. 그것들은 같지도 않고 결합되지도 않았다. 들음, 느낌, 앎 또한 이와 같다. 의식은 원인 없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생길 리가 없다.

부처님은 친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만약 의식이 이유 없이 갑자기 생긴다고 말한다면, 엄밀히 말해서, 왜 우리는 대낮에 갑자기 달을 보지 않는가? 너는 더 주의 깊게 생각하고 더 깊이 관찰해야 한다.”

부처님은 설명하셨습니다. “우리의 시각은 눈에 의지하고, 보는 상은 외부 대상에 의지한다. 우리는 형상이 있는 것은 볼 수 있지만, 형상이 없는 것은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의식은 무엇에 의지하여 생기는가? 의식은 움직이고 있고, 시각은 정지해 있다. 그것들은 융합될 수도 없고 완전히 분리될 수도 없다. 우리의 청각, 감각, 지각도 마찬가지이다. 의식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나타날 수는 없다.”

만약 이 의식하는 마음이 본래 근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너는 마땅히 분별, 봄, 들음, 느낌, 앎이 완벽하고 명확하며, 그 성품이 어디에서도 오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허공, 지, 수, 화, 풍과 함께 그것들은 모두 7대라고 불린다. 그 성품은 참으로 완벽하게 융합되어 있으며, 모두 여래장에 속하고 본래 생멸이 없다. 아난아, 너의 마음은 거칠고 들떠 있어, 봄, 들음, 앎이 본래 여래장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너는 이 여섯 가지 의식하는 마음의 장소가 같은지 다른지, 공인지 유인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지,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닌지를 관찰해야 한다. 너는 단지 여래장 안에서 의식의 성품은 명확한 앎이고, 지각의 본질은 진정한 의식임을 알지 못할 뿐이다. 묘한 깨달음은 고요하고 법계에 두루 하다. 그것은 시방의 허공을 포함하고 토해낸다. 어떻게 고정된 장소가 있겠는가? 그것은 업을 따라 나타나지만, 세상은 무지하여 그것을 인연이나 자연성으로 오해한다. 이것들은 모두 의식하는 마음의 분별과 계탁이며, 단지 말일 뿐 실제 의미는 없다.

부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이 의식의 마음이 본래 근원이 없다면, 우리의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은 실제로는 원만하고 고요하며, 그 성품은 특정한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한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의 7대 요소는 모두 성품이 완벽하게 통합되어 있으며, 모두 여래장(如來藏)에서 왔고 본래 생멸이 없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자애롭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너의 마음은 여전히 거칠고 들떠 있어서, 너의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의 본질이 여래장임을 아직 깨닫지 못했구나. 너는 이 여섯 가지 의식의 마음이 같은지 다른지, 공한지 존재하는지,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지, 공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지 관찰해야 하느니라.”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아난아, 너는 여래장 안에서 의식의 성품은 밝은 앎이고, 지각의 본질은 밝고 참된 의식임을 알지 못했구나. 이 묘한 깨달음은 고요하여 온 법계에 두루 하느니라. 그것은 온 우주를 포함하고 있는데, 어디에 고정된 위치가 있겠느냐? 그러나 사람들은 이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연의 화합이나 자연 발생으로 오해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단지 우리 의식 마음의 분별 계탁일 뿐,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헛된 말들이니라.”

그때 아난과 대중들은 부처님의 미묘한 가르침을 받고 몸과 마음이 맑아져 장애가 없음을 느꼈습니다. 온 대중은 자신의 마음이 시방세계에 두루하고, 시방의 허공을 자신의 손바닥에 있는 나뭇잎을 보듯이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보리의 묘하고 밝은 본심이며, 마음의 본질은 시방을 완전히 두루하고 포함하고 있습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난 몸을 되돌아보니, 마치 시방의 허공에 흩날리는 먼지와 같아 존재하거나 소멸합니다. 그것은 넓고 맑은 바다에 떠 있는 거품과 같아서, 어디선가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들은 영원하고 파괴되지 않는 본래의 묘한 마음을 분명히 알고 얻었습니다. 그들은 합장하고 부처님께 절하며, 전에 없던 것을 얻었음에 기뻐하며 여래 앞에서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했습니다:

부처님의 깊고 아름다운 가르침이 있은 후, 아난과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마치 모든 번뇌와 구속이 사라진 듯 몸과 마음이 갑자기 열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두가 갑자기 자신의 마음이 시방세계에 두루 퍼져 온 우주의 공간을 손바닥의 나뭇잎을 보듯 분명하게 볼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실제로는 그 묘하고 밝은 본심에서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이 마음의 본질은 완벽하고 결함이 없으며 온 우주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몸을 되돌아보았을 때, 광대한 우주 속에서 몸은 먼지 티끌처럼 작아서 때로는 존재하고 때로는 사라짐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넓은 바다의 작은 거품과 같아서, 갑자기 일어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하고 파괴되지 않는 그 묘한 본심을 분명히 찾았음을 알았습니다. 이 발견은 그들을 끝없이 흥분시켰습니다. 그들은 차례로 부처님께 절하고 합장하여 찬탄하며 전례 없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부처님 앞에서 그들은 아름다운 게송으로 찬탄했습니다:

“묘하고 고요하며 모든 것을 머금은 부동의 세존이시여, 세상에서 보기 드문 수능엄왕이시여.” “저의 억겁의 뒤바뀐 생각을 녹여주시니, 무수한 겁을 거치지 않고 법신을 얻나이다.” “원컨대 이제 과보를 얻어 보왕이 되어, 다시 돌아와 갠지스강 모래와 같은 중생을 제도하게 하소서.”

“부처님, 당신은 고요하고 동요하지 않는 세존이시며, 묘하고 완벽한 지혜를 갖추셨습니다. 수능엄왕이시여, 당신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희유하신지요!

당신은 무량겁 동안의 우리의 뒤바뀐 망상을 제거해 주셔서, 우리가 오랜 수행 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법신을 얻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귀중한 과보를 성취하고, 다시 돌아와 갠지스강의 모래처럼 수많은 중생을 해탈시키기를 원합니다!”

“이 깊은 마음을 티끌 같은 세계에 바치오니, 이를 불은(佛恩)에 보답한다고 이름하나이다.” “엎드려 청하오니 세존께서는 저의 증명이 되어 주소서. 오탁악세에 맹세코 먼저 들어가리이다.” “만약 한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못한 자가 있다면, 끝내 여기서 열반을 취하지 않겠나이다.”

“우리는 이 깊은 깨달음을 무수한 세계에 바치기를 원하오니, 이것이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진정한 길입니다.”

“자비로우신 세존이시여, 부디 저희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저희는 각종 번뇌와 고통으로 가득 찬 오탁악세에 먼저 들어갈 것을 맹세합니다.”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중생이 한 명이라도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혼자만 해탈하거나 안락을 구하여 열반에 들지 않겠습니다.”

“대웅(大雄), 대력(大力), 대자비(大慈悲)시여, 바라건대 다시 살펴 저의 미세한 미혹을 제거해 주소서.” “저로 하여금 속히 무상각에 올라 시방세계의 도장에 앉게 하소서.” “설사 순야다(공)의 성품이 소멸할 수 있다 해도, 이 금강 같은 마음은 결코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으리이다.”

“위대하신 부처님, 당신은 용맹한 사자와 같고 비할 데 없는 힘과 끝없는 자비를 지니셨습니다. 저희를 위해 그 미세하고 감지하기 어려운 미혹들을 다시 한번 세심하게 제거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부디 저희가 속히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여, 시방세계의 보리도장에 앉아 당신과 같은 깨달은 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설사 허공의 성품이 사라질 수 있다 해도, 저희의 굳건한 마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순간, 기원정사 전체가 엄숙하고 신성한 분위기에 휩싸인 듯했습니다. 아난과 대중들의 눈은 굳건한 빛으로 빛났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무지한 구도자가 아니라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보살 수행자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자비롭게 바라보시며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제자들이 올바른 길에 들어섰고, 그들의 의지가 확고하며, 중생의 해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의향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날부터 아난과 대중들은 더 깊은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피상적인 이해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미혹을 철저히 제거하기를 바라며 법의 깊은 의미를 탐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는 한, 언젠가는 부처님처럼 모든 중생을 비추는 밝은 등불이 되어 세상에 끝없는 지혜와 자비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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