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엄경 제10권》 핵심 요약
- 행음진상: 수행자가 행음이 다했을 때의 상태 묘사, 꿈과 망상이 사라지고 각명이 허정해지는 등.
- 십종선나광해: 수행 중 마주칠 수 있는 10가지 잘못된 인식과 집착에 대한 상세 설명:
- 이무인론
- 사변상론
- 사전도견 (일분무상 일분상론)
- 사유변론
- 사종전도 (불사교란 변계허론)
- 사후유상발심전도
- 사후무상발심전도
- 사후구비기전도론
- 칠단멸론
- 오열반론
- 식음구우: 식음의 특징과 수행자가 이 경지에 도달했을 때의 표현을 해설.
- 십종식음 중의 오류: 식음 단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10가지 잘못된 견해와 집착을 상세히 설명.
- 오음의 본질: 부처님께서 오음이 모두 망상으로 이루어졌음을 해설하고, 각 음의 특성을 상세히 설명.
- 수행차제: 오음의 생기(生起)와 멸제(滅除) 순서, 그리고 이론과 실천상의 차이를 설명.
- 수경송주의 공덕: 《능엄경》과 주문 독송의 수승한 공덕을 강조하며, 죄업을 소멸하고 보리를 성취함에 이르기까지를 설함.
- 교훈전승: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 법문을 후세에 전하여 중생들이 마구니의 일을 간파하고 삿된 견해를 멀리하도록 당부하심.
- 오음의 변제: 각 음의 경계를 해설하여 수행자가 각 음의 범위를 이해하도록 도움.
- 맺음말: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것의 중요성과 이 경의 수승한 공덕을 강조.
이러한 핵심 요점들은 《능엄경》 제10권의 주요 내용을 포괄하며, 수행 과정 중의 다양한 경계, 마주칠 수 있는 장애, 그리고 오음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을 포함하여 수행자에게 중요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능엄경 제10권》 완전 경문
아난아, 저 선남자가 삼마제(三摩提)를 닦아 상음(想陰)이 다한 자는, 평소의 꿈과 망상이 사라져 깨어있을 때나 잠잘 때나 항상 한결같다. 각명(覺明)이 허정(虛靜)하여 마치 맑은 하늘과 같고, 다시는 거칠고 무거운 전진(前塵)의 그림자 같은 일이 없다. 세간의 대지와 산하를 관찰하면 거울에 비친 듯 분명하여, 다가와도 달라붙는 바가 없고 지나가도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헛되이 비춤을 받아 묵은 습관을 알고, 오직 하나의 정진(精真)만이 있다. 생멸의 근원(根元)이 이로부터 드러난다. 시방의 십이류 중생을 보면 그 종류를 다 알 수 있다. 비록 각 생명의 유래를 통달하지는 못했으나, 공통된 생의 기반을 보는 것이 마치 아지랑이가 반짝이며 어지러운 것과 같아, 부근(浮根)과 진경(塵境)의 구경(究竟)의 추혈(樞穴)이 된다. 이것을 행음구우(行陰區宇)라고 한다. 만약 이 맑고 어지럽게 반짝이는 원성(元性)이 본래의 맑음으로 돌아가고, 그 습기(習氣)가 맑아져 물결이 사라지고 맑은 물이 되는 것과 같으면, 행음이 다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중생의 탁함을 초월할 수 있으며, 그 유래를 관찰하면 그윽이 숨은 망상을 그 근본으로 삼고 있다.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정지(正知)를 얻은 사마타(奢摩他)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正心)이 응명(凝明)하여, 열 가지 종류의 천마(天魔)도 그 틈을 얻지 못한다. 바야흐로 생류(生類)의 근본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본래 종류 중에서 생의 근원이 드러난 자는, 저 그윽하고 맑으며 둥글게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한다. 그 원원(圓元) 중에서 계탁(計度)을 일으키는 자는 두 가지 무인론(無因論)에 떨어진다.
첫째는 이 사람이 본래 원인이 없음을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이미 생기(生機)를 완전히 타파하고, 안근(眼根)의 800공덕에 의지하여 8만 겁의 모든 중생이 업의 흐름에 따라 굽이돌며 여기서 죽고 저기서 태어나는 것을 본다. 단지 중생이 그곳에서 윤회하는 것만 볼 뿐, 8만 겁 밖은 깜깜하여 볼 수 있는 바가 없다. 그래서 이러한 해석을 짓는다: “이들 세간 시방의 중생은 8만 겁 이래로 원인 없이 스스로 있다.” 이러한 계탁으로 인해 정변지(正遍知)를 잃고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둘째는 이 사람이 끝에도 원인이 없음을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생에 있어 이미 그 뿌리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낳고 새가 새를 낳음을 안다. 까마귀는 본래 검고 고니는 본래 희다. 사람과 천인은 본래 서서 다니고 축생은 본래 옆으로 기어 다린다. 흰 것은 씻어서 된 것이 아니고 검은 것은 물들여서 만든 것이 아니다. 8만 겁으로부터 다시 고치거나 옮김이 없다. 지금 이 형상이 다하여도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본래 보리를 보지 못했으니, 어떻게 다시 보리를 이루는 일이 있겠는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오늘날의 일체 물상(物象)은 다 본래 원인이 없다. 이러한 계탁으로 인해 정변지를 잃고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첫 번째 외도인 무인론(無因論)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아난아, 이 삼마(三摩)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이 응명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하여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한다. 그 원상(圓常) 중에서 계탁을 일으키는 자는 네 가지 변상론(遍常論)에 떨어진다.
첫째는 이 사람이 마음과 경계(대상) 성품의 두 곳이 원인이 없음을 궁구하고, 닦아 익혀서 능히 2만 겁 중 시방 중생의 모든 생멸이 다 순환하여 일찍이 흩어져 없어지지 않음을 알고, 헤아려 상(常)이라 한다.
둘째는 이 사람이 4대(四大)의 근원인 네 가지 성질이 상주(常住)함을 궁구하고, 닦아 익혀서 능히 4만 겁 중 시방 중생의 모든 생멸이 다 그 바탕이 항상하여 일찍이 흩어져 없어지지 않음을 알고, 헤아려 상(常)이라 한다.
셋째는 이 사람이 6근(六根)과 말나(末那)의 집수(執受), 심의식(心意識) 중의 본원 유처(由處)의 성품이 항상함을 궁구하여 다하고, 닦아 익혀서 능히 8만 겁 중 일체 중생이 순환하여 잃지 않고 본래 상주함을 알고, 잃지 않는 성품을 궁구하여, 헤아려 상(常)이라 한다.
넷째는 이 사람이 이미 상원(想元)을 다하여 생리(生理)에 다시는 흐르고 멈추고 운전함이 없다. 생멸하는 상심(想心)이 지금 이미 영원히 멸하였으므로, 이치 가운데 자연히 불생불멸을 이루니, 마음으로 헤아리는 바에 의해 상(常)이라 한다. 이로써 상(常)을 계탁하여 정변지를 잃고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두 번째 외도인 원상론(圓常論)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또 삼마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을 굳게 응시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한다.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자타(自他) 중에서 계탁을 일으키는 자는 네 가지 전도견(顛倒見)인 일분무상 일분상론(一分無常一分常論)에 떨어진다.
첫째는 이 사람이 묘명(妙明)한 마음이 시방세계에 두루함을 관찰하고, 담연(湛然)하여 구경의 신아(神我)로 삼는다. 이로부터 곧 나는 시방에 두루하고 응명하여 움직이지 않으며, 일체 중생은 나의 마음 가운데서 스스로 나고 스스로 죽는다고 헤아린다. 즉 나의 심성은 이를 이름하여 상(常)이라 하고, 저 생멸하는 자는 참으로 무상(無常)한 성품이라 한다.
둘째는 이 사람이 그 마음을 관찰하지 않고, 두루 시방의 항하사 국토를 관찰한다. 겁(劫)이 무너지는 곳을 보면 구경무상종성(究竟無常種性)이라 하고, 겁이 무너지지 않는 곳은 구경상(究竟常)이라 한다.
셋째는 이 사람이 따로 내 마음을 관찰하니 정세하고 미밀하기가 미진과 같다. 시방에 유전(流轉)하여도 성품은 옮기거나 바뀌지 않고, 능히 이 몸으로 하여금 즉시 나고 즉시 멸하게 한다. 그 무너지지 않는 성품을 나의 성품이 항상함[我性常]이라 이름하고, 일체의 사생(死生)이 나로부터 유출되는 것을 무상한 성품이라고 한다.
넷째는 이 사람이 상음(想陰)이 다한 것을 알고 행음(行陰)이 흐르는 것을 본다. 행음이 항상 흐르는 것을 상성(常性)이라 헤아리고, 색·수·상 등은 지금 이미 다 멸했으므로 무상(無常)이라 한다. 이로써 일분무상 일분상을 계탁하기 때문에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세 번째 외도인 일분상론(一分常論)이라고 한다.
또 삼마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을 굳게 응시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한다.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분위(分位) 중에서 계탁을 내는 자는 네 가지 유변론(有邊論)에 떨어진다.
첫째는 이 사람이 마음으로 생원(生元)이 흘러 작용하여 쉬지 않음을 헤아려, 과거와 미래를 헤아리는 것을 유변(有邊)이라 하고, 상속하는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무변(無邊)이라 한다.
둘째는 이 사람이 8만 겁을 관찰하면, 곧 중생의 8만 겁 전은 고요하여 듣고 보는 것이 없음을 본다. 듣고 봄이 없는 곳을 무변이라 하고, 중생이 있는 곳을 유변이라 한다.
셋째는 이 사람이 나의 변지(遍知)를 헤아려 무변성을 얻는다. 저 일체 사람이 현재 나의 앎 속에 있는데, 나는 일찍이 저들의 지성(知性)을 알지 못하니, 저들은 무변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단지 유변성(有邊性)만 있을 뿐이라 한다.
넷째는 이 사람이 행음이 공함을 궁구하고, 그 보는 바 마음 길로써 헤아린다. 일체 중생의 한 몸 가운데서, 그 모두가 반은 생이고 반은 멸이라고 헤아린다. 그 세계의 일체 있는 바를 밝히되, 절반은 유변이고 절반은 무변이라 한다. 이로써 유변과 무변을 계탁하여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네 번째 외도인 유변론(有邊論)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또 삼마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을 굳게 응시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한다.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지견(知見) 중에서 계탁을 내는 자는 네 가지 전도(顛倒)인 불사교란 변계허론(不死矯亂遍計虛論)에 떨어진다.
첫째는 이 사람이 변화의 근원을 관찰하여, 변천하고 흐르는 곳을 보아 이를 변(變)이라 하고, 서로 상속하는 곳을 보아 이를 항(恒)이라 하며, 보이는 곳을 보아 이를 생(生)이라 하고, 보이지 않는 곳을 보아 이를 멸(滅)이라 하며, 상속하는 인(因)의 성품이 끊어지지 않는 곳을 증(增)이라 하고, 정스런 상속 가운데서 떠난 곳을 감(減)이라 하며, 각각 태어나는 곳을 유(有)라 하고, 서로서로 없어지는 곳을 무(無)라 한다. 이치로써 모두 관찰하고 마음을 써서 따로 보아, 법을 구하는 사람이 와서 그 뜻을 물으면 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지금 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한다"고 한다. 어느 때나 다 그 말을 어지럽혀서, 저 앞사람으로 하여금 문구를 잃어버리게 한다.
둘째는 이 사람이 자세히 그 마음을 관찰하여, 서로서로 없는 곳에 인하여 무(無)를 증득한다.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오직 한 글자로 답하여 단지 ‘무(無)‘라고만 말하고, 무(無) 이외에는 말하는 바가 없다.
셋째는 이 사람이 자세히 그 마음을 관찰하여, 각각 있는 곳에 인하여 유(有)를 증득한다.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오직 한 글자로 답하여 단지 ‘시(是, 그렇다/있다)‘라고만 말하고, 시(是) 이외에는 말하는 바가 없다.
넷째는 이 사람이 유와 무를 함께 보고, 그 경계가 갈라지므로 그 마음 또한 어지럽다.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답하여 말하기를 “있다는 것은 곧 없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 가운데는 또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일체를 교란하여 끝까지 따져 묻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로써 교란과 허무를 계탁하여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다섯 번째 외도인 사전도성(四顛倒性)의 불사교란 변계허론(不死矯亂遍計虛論)이라 한다.
또 삼마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을 굳게 응시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한다.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무진류(無盡流)에서 계탁을 내는 자는 사후유상발심전도(死後有相發心顛倒)에 떨어진다. 혹은 스스로 몸을 굳혀 색(色)이 나라고 하거나, 혹은 내가 둥글어 국토를 두루 함유함을 보고 내가 색을 가졌다고 하거나, 혹은 저 전연(前緣)이 나를 따라 회복함을 보고 색이 나에게 속한다고 하거나, 혹은 또 내가 의지하는 행(行) 중의 상속을 보고 나는 색 안에 있다고 한다. 모두 계탁하여 말하기를 “죽은 뒤에 상(相)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순환하여 16가지 상이 있다. 이로부터 미혹하여 필경 번뇌와 필경 보리를 계탁하고, 양 성품이 나란히 구동하여 서로 닿지 않는다고 한다. 이로써 사후에 있음을 계탁하기 때문에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여섯 번째 외도인 오음 중 사후유상심전도론(死後有相心顛倒論)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또 삼마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을 굳게 응시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한다.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먼저 색·수·상을 제거한 가운데서 계탁을 내는 자는 사후무상발심전도(死後無相發心顛倒)에 떨어진다. 그 색이 멸함에 형체는 인(因)할 바가 없음을 보고, 그 상(想)이 멸함에 마음은 매일 곳이 없음을 관찰하며, 그 수(受)가 멸함을 알고 뒤에 연결됨이 없어 음(陰)의 성품이 소산된다. 비록 생리(生理)가 있다 해도 수와 상이 없어 초목과 같으니, 이 바탕이 현전함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죽은 뒤에 어찌 다시 여러 상이 있겠는가? 이에 기인하여 비교 헤아리니 죽은 뒤에 상이 없다. 이와 같이 순환하여 8가지 무상이 있다. 이로부터 혹 열반과 인과가 일체 모두 공(空)하여, 헛되이 이름만 있을 뿐 구경에는 단멸한다고 헤아린다. 이로써 사후에 없음을 계탁하기 때문에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일곱 번째 외도인 오음 중 사후무상심전도론(死後無相心顛倒論)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또 삼마(三摩)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을 굳게 응시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한다.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행음(行陰)이존재하는 가운데 수음(受陰)과 상음(想陰)의 멸무(滅無)를 겸해 받고, 유(有)와 무(無)를 쌍으로 계탁하여 자체상이 깨어지니, 이 사람은 사후구비기전도론(死後俱非起顛倒論)에 떨어진다. 색·수·상 가운데서 유(有)이면서 비유(非有)임을 보고, 행음의 천류(遷流) 안에서 무(無)이면서 불무(不無)임을 본다. 이와 같이 순환하여 오음의 세계를 궁구해 다하고, 8가지 구비상(俱非相)에 따라 한 인연을 얻으면, 모두 사후에 유상(有相)이면서 무상(無相)이라고 말한다. 또 모든 행의 성품이 옮기고 바뀌기 때문에, 마음이 통오(通悟)를 발하여 유무(有無)가 다 아니니[俱非] 허실(虛實)을 둘 곳을 잃는다고 계탁한다. 이로써 사후에 다 아니[俱非]라고 계탁하여, 후제가 어둡고 말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여덟 번째 외도인 오음 중 사후구비심전도론(死後俱非心顛倒論)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또 삼마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을 굳게 응시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한다.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뒤에 다시 태어남[後後無生]이 없다고 계탁하는 자는 칠단멸론(七斷滅論)에 떨어진다. 혹은 육신이 멸함을 계탁하거나, 혹은 욕(欲)이 다하여 멸함을 계탁하거나, 고(苦)가 다하여 멸함을 계탁하거나, 극락이 멸함을 계탁하거나, 극사가 멸함을 계탁한다. 이와 같이 순환하여 7제(際)를 궁구해 다하고, 현전에서 소멸하여 멸하면 다시는 없다고 한다. 이로써 사후에 단멸함을 계탁하기 때문에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아홉 번째 외도인 오음 중 사후단멸심전도론(死後斷滅心顛倒論)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또 삼마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을 굳게 응시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한다.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뒤에 다시 태어남이 있다[後後有生]고 계탁하는 자는 오열반론(五涅槃論)에 떨어진다. 혹은 욕계를 바른 전의(轉依)라 하는데, 원명(圓明)함을 관견하여 애모심을 내기 때문이다. 혹은 초선(初禪)을 (열반이라 하는데) 성품에 근심이 없기 때문이며, 혹은 이선(二禪)을 마음이 괴로움이 없기 때문이며, 혹은 삼선(三禪)을 기쁨이 지극하여 따르기 때문이며, 혹은 사선(四禪)을 괴로움과 즐거움 둘 다 없어 윤회의 생멸하는 성품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유루(有漏)의 하늘[天]에 미혹하여 무위(無為)의 해(解)를 짓고, 다섯 곳의 안온함을 수승하고 청정한 의지처로 삼는다. 이와 같이 순환하여 다섯 곳을 구경(究竟)이라 하고, 이로써 오현열반(五現涅槃)을 계탁하여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열 번째 외도인 오음 중 오현열반심전도론(五現涅槃心顛倒論)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아난아, 이와 같은 열 가지 선나(禪那)의 미친 견해는 다 행음의 용심(用心)이 교호(交互)하기 때문에 이러한 깨달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중생은 완고하고 미혹하여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이러한 현전(現前)을 만나 미혹함을 깨달음이라 하여 스스로 성인에 올랐다고 말하며, 대망어(大妄語)를 이루어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너희들은 반드시 여래의 마음을 가지고 내가 멸도한 뒤 말법세상에 전하여 보이며, 두루 중생들로 하여금 이 뜻을 깨닫게 하라. 심마(心魔)로 하여금 스스로 깊은 재앙을 일으키지 않게 하고, 잘 보호하여 삿된 견해를 없애며, 그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진정한 뜻을 열어 깨닫게 하라. 무상도(無上道)에서 갈림길을 만나지 않게 하고, 마음이 조금 얻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게 하여, 대각왕(大覺王)의 청정한 표지(標指)가 되게 하라.
아난아, 저 선남자가 삼마제를 닦아 행음이 다한 자는, 모든 세간의 성품인 그윽하고 맑으며 요동하는 것과, 같은 분상 생기(生機)가 갑자기 끊어진다. 침세(沈細)한 벼리[綱紐]인 보특가라(補特伽羅: 중생)의 업보를 갚는 깊은 맥, 감응이 끊어진다. 열반천(涅槃天)에서 장차 크게 밝게 깨달으려 함이, 마치 닭이 울기 뒤에 동방을 돌아보면 이미 정색(精色)이 있는 것과 같다. 육근(六根)은 허정(虛靜)하여 다시는 치달리지 않고, 안팎이 맑고 밝아 들어와도 들어온 바가 없다. 시방의 열두 종류가 생명을 받는 근원을 깊이 통달하고, 유래를 관찰하고 근원을 잡되 모든 부류가 부르지 않는다. 시방계에서 이미 그 동질성을 얻어 정색(精色)이 침몰하지 않고 그윽한 비밀을 발현하니, 이것을 식음구우(識陰區宇)라고 한다. 만약 중생들의 얽힘에 이미 동(同)함을 얻은 가운데, 육문(六門)을 소마(銷磨)하여 합하고 열림[合開]을 성취하고, 보고 듣는 것이 이웃하여 통하며 서로 작용함이 청정해질 것이다. 시방세계와 몸과 마음이 마치 유리와 같아 안팎이 명철해지면 식음(識陰)이 다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능히 명탁(命濁)을 초월하며, 그 유래를 관찰하면 망상(罔象)하고 허무하며, 뒤바뀐 망상을 근본으로 삼는다.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식(識)에서 근원으로 돌아가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능히 자신의 몸의 근(根)이 막힘을 합하고 열게 하고, 또한 시방의 모든 종류와 통하여 깨달으며, 각지(覺知)가 통하여 흐려져 능히 원원(圓元)에 들어간다. 만약 돌아갈 바에 진상(真常)의 원인을 세워 승해(勝解)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인소인집(因所因執)에 떨어진다. 사비가라(娑毘迦羅)가 귀의하는 바인 명체(冥諦)가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첫 번째인 소득심(所得心)을 세워 소귀(所歸)의 과를 이루어, 원통(圓通)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외도의 종자를 낳는다고 한다.
아난아,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만약 돌아갈 바에 자신을 그 자체로 보고, 온 허공계 십이류 내의 모든 중생이 다 내 몸 안의 한 부류에서 유출된다고 하여 승해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능비능집(能非能執)에 떨어진다. 마혜수라(摩醯首羅)가 무변신(無邊身)을 나타내는 것이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두 번째로 능위심(能為心)을 세워 능사(能事)의 과를 이루어,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대만천(大慢天)의 아변원종(我遍圓種)을 낳는다고 한다.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만약 돌아갈 바에 귀의할 바가 있다고 하여, 스스로 몸과 마음이 그로부터 유출되었다고 의심하고, 시방 허공도 다 그로부터 일어났다고 한다. 즉 모든 일어나는 바가 선류(宣流)하는 땅에서 진상(真常)의 몸이 생멸이 없다는 이해를 짓는다. 생멸 가운데 있으면서 일찍이 상주(常住)한다고 계탁하여, 이미 불생(不生)에 미혹하고 또한 생멸에도 미혹하여, 침미(沈迷)에 안주하여 승해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상비상집(常非常執)에 떨어진다. 자재천(自在天)을 계탁함이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세 번째인 인의심(因依心)을 세워 망계(妄計)의 과를 이루어,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도원종(倒圓種)을 낳는다고 한다.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만약 아는 바[所知]에 앎[知]이 두루 원만하다고 하여 앎에 인(因)하여 이해를 세워, 시방의 초목도 다 유정(有情)이라 칭하여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초목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죽으면 다시 시방의 초목이 된다고 하여, 가림 없이 두루 안다고 하여 승해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지무지집(知無知執)에 떨어진다. 바타(婆吒)와 산니(霰尼)가 일체각(一切覺)을 집착하는 것이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네 번째인 계원지심(計圓知心)을 세워 허류(虛謬)의 과를 이루어,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도지종(倒知種)을 낳는다고 한다.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만약 원융하여 근(根)이 서로 작용하는 가운데 이미 수순함을 얻어, 문득 원화(圓化)함에서 일체를 발생한다. 불의 광명을 구하고 물의 청정함을 즐기며, 바람의 두루 흐름을 사랑하고 티끌의 성취를 관찰하여, 각각 숭상하고 섬겨서 이 뭇 티끌로써 한다. 본인을 발작하여 상주한다는 이해를 세우는 이는, 이 사람은 생무생집(生無生執)에 떨어진다. 모든 가섭파(迦葉波)와 바라문들이 마음을 쓰고 몸을 부려 불을 섬기고 물을 숭상하며, 생사를 벗어나기를 구하는 자가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다섯 번째인 숭사(崇事)를 계탁하고 집착하여, 마음에 미혹하여 물(物)을 따르며, 망되이 인(因)을 구하고 과(果)를 바라,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전화종(顛化種)을 낳는다고 한다.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만약 원명(圓明)한 데서 밝음 가운데가 비었다고 계탁하여, 뭇 변화를 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멸(滅)로써 의지처를 삼고, 귀의할 바를 삼아 승해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귀무귀집(歸無歸執)에 떨어진다. 무상천(無想天) 중의 모든 순약다(舜若多)가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여섯 번째인 원허무심(圓虛無心)을 세워 공망(空亡)의 과를 이루어,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단멸종(斷滅種)을 낳는다고 한다.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만약 원상(圓常)한 데서 몸을 굳게 하여 상주하게 하고, 정원(精圓)한 것과 같이 길이 기울어 없어지지 않게 한다고 승해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탐비탐집(貪非貪執)에 떨어진다. 모든 아시다(阿斯陀)로서 장수(長命)를 구하는 자가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일곱 번째인 명원(命元)에 집착하여 고망인(固妄因)을 세우고, 장로(長勞)의 과로 나아가,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망연종(妄延種)을 낳는다고 한다.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생명의 서로 통함을 관찰하고 도리어 진로(塵勞)를 머물게 하여 그것이 다 없어질까 두려워하니, 문득 이때 연화궁에 앉아 널리 7진(七珍)을 변화하고 많은 보배 미녀를 더하여, 그 마음을 방종하게 하여 승해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진무진집(眞無眞執)에 떨어진다. 타지가라(吒抧迦羅)가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여덟 번째인 사심(邪思)의 인을 발하여 치진(熾塵)의 과를 세워,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천마종(天魔種)을 낳는다고 한다.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명명(命明) 가운데서 정(精)과 추(麁)를 분별하고, 진위를 소결(疏決)하여 인과가 서로 갚음을 알아, 오직 감응만을 구하고 청정한 도를 등진다. 이른바 고(苦)를 보고 집(集)을 끊고 멸(滅)을 증득하고 도(道)를 닦아, 멸에 거하여 이미 쉬고 다시 더 나아가지 않으며 승해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정성성문(定性聲聞)에 떨어진다. 모든 무문승(無聞僧)과 증상만(增上慢)의 자가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아홉 번째인 원정응심(圓精應心)을 세워 취적(趣寂)의 과를 이루어,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천공종(纏空種)을 낳는다고 한다.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만약 원융하고 청정한 각명(覺明)에서 깊고 묘함을 연구하여 곧 열반을 세우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승해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정성벽지(定性辟支)에 떨어진다. 모든 연독륜(緣獨倫)으로서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자가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열 번째인 원각몰심(圓覺[淴-心+目]心)을 세워 담명(湛明)의 과를 이루어,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각원명불화원종(覺圓明不化圓種)을 낳는다고 한다.
아난아, 이와 같은 열 가지 선나(禪那)는 중도에 미친 것이 되어 인(因)에 의지하거나, 혹은 족하지 못한 가운데 만족하다는 증득을 낸다. 다 이것은 식음(識陰)의 용심이 교호하기 때문에 이러한 지위를 낸다. 중생은 완고하고 미혹하여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이러한 현전을 만나 각기 사랑하는 바를 따라, 먼저 익힌 미혹한 마음에 스스로 휴식하고, 장차 필경에 돌아갈 안온한 땅으로 삼으려 한다. 스스로 무상보리를 만족했다고 말하며 대망어를 지어 외도와 사마(邪魔)를 이루니, 감응하는 바의 업이 끝나면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성문과 연각은 증진을 이루지 못한다. 너희들은 마음을 두어 여래의 도를 잡아, 이 법문을 내가 멸도한 후 말세에 전하여 보여, 두루 중생들로 하여금 이 뜻을 깨닫게 하라. 견마(見魔)로 하여금 스스로 침륜(沈溺)을 짓지 않게 하고, 잘 보호하고 가엾이 여겨 구하여 삿된 인연을 없애며, 그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가게 하라. 처음부터 성취에 이르기까지 갈림길을 만나지 않게 하라. 이와 같은 법문은 지난 과거세 항하사 겁 중의 미진수 여래께서, 이 마음이 열림에 승(乘)하여 무상도를 얻으셨다. 식음이 만약 다하면 너의 현전하는 모든 근(根)이 서로 작용하여,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서 능히 보살의 금강건혜(金剛乾慧)에 들어간다. 원명(圓明)한 정신(精心)이 그 가운데서 발화(發化)함이, 마치 청정한 유리 안에 보배 달을 머금은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迴向)·사가행심(四加行心)을 초월한다. 보살이 행하는 금강십지(金剛十地)와 등각(等覺)의 원명(圓明)함으로, 여래의 묘장엄해(妙莊嚴海)에 들어가, 보리를 원만하여 얻을 바가 없음[無所得]에 돌아간다. 이것은 과거의 선불(先佛) 세존께서 사마타 중의 비바사나(毘婆舍那)로 각명(覺明)하여 미세한 마구니의 일을 분석하신 것이다. 마구니의 경계가 현전하면 네가 능히 잘 알아, 마음의 때를 씻어 없애고 사견에 떨어지지 말라. 음마(陰魔)가 소멸하면 천마(天魔)가 부서지고, 대력귀신은 넋을 잃고 도망가며, 이매망량은 다시 출생하지 않는다. 곧바로 보리에 이르러 조금도 모자람이 없고 하열(下劣)한 증진이 없으며, 대열반에서 마음이 미혹하거나 번민하지 않는다. 만약 모든 말세의 우둔한 중생이 아직 선나를 알지 못하고 설법을 알지 못하며, 삼매 닦기를 좋아하면 네가 아마도 사됨과 같아질까 두렵다. 일심으로 권하여 나의 불정다라니주(佛頂陀羅尼呪)를 가지게 하고, 만약 능히 외우지 못하면 선당(禪堂)에 쓰거나 혹은 몸에 지니게 하면, 일체 제마(諸魔)가 능히 움직이지 못한다. 너는 마땅히 시방 여래의 구경(究竟)으로 닦아 나아가신 마지막 표본[垂範]을 공경하여 받들지니라.
아난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정례하고 공경히 받들어 기억하여 잃지 않았다. 대중들 가운데서 거듭 부처님께 사루었다. “부처님 말씀과 같이 오음의 상(相) 가운데 다섯 가지 허망함이 본래 망상 심(心)입이다. 저희들은 평소에 여래의 미세한 개시(開示)를 입지 못했습니다. 또 이 오음은 아울러 소멸해야 합니까, 차례로 다해야 합니까? 이와 같은 다섯 겹[五重]은 어디에 이르러 경계를 삼습니까? 오직 원하옵건대 여래께서는 대자비심을 펴시어, 이 대중들을 위하여 심목(心目)을 맑고 밝게 하시며, 말세의 일체 중생을 위 하여 미래의 눈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정진(精真)하고 묘명(妙明)한 본각(本覺)은 원만하고 청정하여, 죽고 사는 것과 모든 티끌 번뇌를 머물지 않는다. 나아가 허공까지도 다 망상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다. 이 원래의 본각 묘명한 정진(精真)이 망령되이 모든 기세간(器世間)을 발생시켰다. 마치 연약다(演若多)가 머리를 미혹하여 그림자를 인식한 것과 같이, 망상의 근원은 원인이 없다. 망상 가운데 인연의 성품을 세우고, 인연에 미혹한 자는 자연(自然)이라고 칭한다. 저 허공의 성품도 오히려 실로 환(幻)으로 생겨난 것이니, 인연과 자연은 다 이 중생 망심의 계탁이다. 아난아, 망(妄)이 일어난 곳을 알면 망의 인연을 말하지만, 만약 망의 근원이 없다면 망의 인연을 말함도 원래 있는 바가 아니다. 하물며 자연이라고 미루어 짐작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이겠는가. 그러므로 여래가 너에게 오음의 본인(本因)이 다 같이 망상이라고 밝히는 것이다.
너의 몸은 먼저 부모의 생각[想]에 인하여 생겨났으니, 너의 마음이 생각이 아니라면 능히 생각 가운데 와서 생명을 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먼저 말한 것과 같이, 마음으로 식초 맛을 생각하면 입안에 침이 고이고, 마음으로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생각하면 발바닥이 시큰거리는 것과 같다. 절벽이 있지 않고 식초가 오지 않았는데도, 너의 몸이 반드시 허망함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면, 침이 어찌 식초 이야기를 인하여 나오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너의 현재 색신(色身)은 견고한 제1망상(第一妄想)이라고 한다. 즉 여기서 말한 높은 곳에 임한 생각하는 마음이, 능히 너의 형체로 하여금 참으로 시큰거림을 받게 한다. 생각[受]으로 인하여 생을 받아 능히 색체(色體)를 움직이고, 너에게 지금 현전하는 순익(順益)과 위손(違損) 두 가지가馳달리게 나타나니, 이를 허명(虛明)한 제2망상(第二妄想)이라고 한다. 너의 염려(念慮)로 말미암아 너의 색신을 부리니, 몸이 생각[念]의 부류가 아니라면 너의 몸이 무슨 까닭으로, 생각[念]이 부리는 바에 따라 갖가지 형상을 취하겠는가? 마음이 생겨 형상을 취함이 생각[念]과 더불어 상응하고, 깨면 곧 생각하는 마음이 되고 잠들면 모든 꿈이 된다. 즉 너의 생각[想念]이 망정(妄情)을 흔들어 움직이니, 이를 융통(融通)한 제3망상(第三妄想)이라고 한다. 화(化)하는 이치가 머물지 않고 운운(運運)히 은밀히 옮겨, 손톱이 자라고 머리카락이 나며 기운이 사라지고 얼굴이 주름진다. 밤낮으로 서로 바뀌되 일찍이 깨닫지 못한다. 아난아, 이것이 만약 네가 아니라면 몸이 어떻게 옮기겠느냐? 만약 반드시 참된 너라면 어찌하여 깨달음이 없느냐? 즉 너의 모든 행(行)이 생각마다 멈추지 않으니, 이를 유은(幽隱)한 제4망상(第四妄想)이라고 한다. 또 너의 정명(精明)하고 담연(湛然)하여 요동하지 않는 곳을 늘 항상한 것[恒常]이라고 이름하나, 몸에 있어서는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실로 정진(精真)하여 습망(習妄)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무슨 까닭으로 너희들은 일찍이 옛적에 한 기이한 물건을 보고, 해를 지나 기억과 잊음이 다 없다가, 나중에 홀연히 전의 기이함을 다시 보면, 기억이 완연하여 일찍이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즉 이 정료(精了)하고 담연하여 요동하지 않는 가운데, 생각마다 훈습을 받음을 어찌 헤아리겠는가? 아난아, 마땅히 알라. 이 담연함은 참된 것이 아니니, 마치 급히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고요한 것과 같아서, 흐름이 급하여 보이지 않는 것이지 흐름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생각[想]의 근원이 아니라면 어찌 망상을 익힘[想習]을 받겠느냐? 너의 육근이 서로 작용하여 합하고 열림[合開]이 아닌 이 망상은, 어느 때나 멸함을 얻겠느냐? 그러므로 네가 현재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가운데 익혀진 몇 가지는, 즉 담료(湛了) 내의 망상(罔象)하고 허무한, 다섯 번째 전도된 미세한 정상(精想)이니라.
아난아, 이 오수음(五受陰)은 다섯 가지 망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네가 지금 인(因)과 계(界)의 얕고 깊음을 알고자 한다면, 오직 색(色)과 공(空)은 색음(色陰)의 변제(邊際)이고, 오직 촉(觸)과 이(離)는 수음(受陰)의 변제이며, 오직 기억[記]과 망각[忘]은 상음(想陰)의 변제이고, 오직 멸(滅)과 생(生)은 행음(行陰)의 변제이며, 담입합담(湛入合湛)하여 식(識)으로 돌아감은 식음(識陰)의 변제이다. 이 오음의 근원은 중첩되어 생겨나니, 생(生)은 식(識)으로 인하여 있고 멸(滅)은 색(色)으로부터 제거된다. 이치는 곧 돈오(頓悟)하여 깨달음에 승(乘)하여 아울러 소멸하나, 사(事)는 단박에 제거되지 않고 차第에 인하여 다하는 것이다. 내가 이미 너에게 겁파(劫波)의 수건 매듭을 보여주었는데, 무엇을 밝히지 못하여 다시 여기서 묻느냐? 너는 마땅히 이 망상의 근원과 마음으로 하여금 열려 통하게 하고, 장래의 말법 가운데 모든 수행자에게 전하여 보여, 허망함을 알고 깊이 싫어함이 스스로 생겨나게 하며, 열반이 있음을 알아 삼계를 그리워하지 않게 하라.”
아난아,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시방에 두루 가득하여, 모든 허공에 칠보를 가득 채우고, 이것을 가지고 미진수 제불께 받들어 올리고,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여 마음이 헛되이 보냄이 없다고 하자. 너의 뜻에 어떠하냐? 이 사람이 이 보시한 인연으로 부처님께 얻는 복이 많겠느냐?”
아난이 답하여 말하였다. “허공이 다함이 없고 진귀한 보배도 끝이 없습니다. 옛적에 어떤 중생이 부처님께 일곱 푼의 돈을 보시하고도 몸을 버려 전륜왕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하물며 다시 현전의 허공이 이미 다하고, 불국토에 충만하도록 다 진귀한 보배로 보시함이겠습니까? 겁(劫)이다하도록 생각하고 의논하여도 오히려 능히 미치지 못할 텐데, 이 복에 어찌 다시 끝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제불 여래는 말씀에 허망함이 없다.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사중죄(四重罪)와 십바라이(十波羅夷)를 몸에 갖추고, 순식간에 시방과 타방의 아비지옥을 다 거치고 나아가 궁진하여, 시방의 무간지옥을 겪지 않음이 없다고 하자. 능히 일념(一念)으로써 이 법문을 가지고, 말겁(末劫) 중에서 배우지 못한 이에게 개시(開示)하면, 이 사람의 죄업과 장애는 생각에 응하여 소멸하고, 그 받는 바 지옥의 괴로움의 원인이 변하여 안락국(安樂國)을 이룰 것이다. 얻는 복이 앞의 보시한 사람보다 백 배, 천 배, 천만 억 배 더하여, 이와 같이 나아가 산수와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아난아, 만약 어떤 중생이 능히 이 경을 외우고 능히 이 주문을 지니면, 내가 널리 말한 것과 같이 겁(劫)이 다하도록 하여도 다하지 못한다. 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가르침대로 도를 행하면, 곧바로 보리를 이루어 다시는 마구니의 업이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기를 마치시니,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일체 세간의 천인, 아수라, 그리고 모든 타방의 보살, 이승(二乘), 성선(聖仙), 동자, 아울러 초발심한 대력귀신들이 다 크게 환희하여 예를 올리고 물러갔다.
《능엄경 제10권》 백화문 번역
아난아, 저 선남자가 삼마제를 닦아 상음이 다한 자는, 평소의 꿈과 망상이 사라져 깨어있을 때나 잠잘 때나 항상 한결같다. 각명(覺明)이 허정(虛靜)하여 마치 맑은 하늘과 같고, 다시는 거칠고 무거운 전진(前塵)의 그림자 같은 일이 없다. 세간의 대지와 산하를 관찰하면 거울에 비친 듯 분명하여, 다가와도 달라붙는 바가 없고 지나가도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헛되이 비춤을 받아 묵은 습관을 알고, 오직 하나의 정진(精真)만이 있다. 생멸의 근원(根元)이 이로부터 드러난다. 시방의 십이류 중생을 보면 그 종류를 다 알 수 있다. 비록 각 생명의 유래를 통달하지는 못했으나, 공통된 생의 기반을 보는 것이 마치 아지랑이가 반짝이며 어지러운 것과 같아, 부근(浮根)과 진경(塵境)의 구경(究竟)의 추혈(樞穴)이 된다. 이것을 행음구우(行陰區宇)라고 한다. 만약 이 맑고 어지럽게 반짝이는 원성(元性)이 본래의 맑음으로 돌아가고, 그 습기(習氣)가 맑아져 물결이 사라지고 맑은 물이 되는 것과 같으면, 행음이 다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중생의 탁함을 초월할 수 있으며, 그 유래를 관찰하면 그윽이 숨은 망상을 그 근본으로 삼고 있다.
아난아,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겠다. 옛날에 한 착한 수행자가 있었는데, 그는 열심히 삼마지를 닦았다. 그의 상음(想陰)이 사라지자 몇 가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보통 사람들은 꿈꿀 때 온갖 기이한 상상을 하지만, 이 수행자는 달랐다. 그의 꿈과 망상이 사라져, 자나 깨나 마음의 경지가 한결같았다. 그의 의식은 맑고 고요해져 마치 맑은 하늘과 같았고, 다시는 거칠고 무거운 번뇌가 없었다. 그가 세상의 산과 강, 대지를 관찰할 때면 모든 것이 거울 속의 그림자처럼 선명했다. 모든 풍경은 그의 마음속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니, 마치 수면 위를 스치는 바람이 자취 없이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
이 수행자의 마음은 이토록 순수해져 오직 가장 진실한 정신만이 남았다. 그는 생명의 근원을 보기 시작했으니, 마치 신비한 베일을 벗겨낸 것과 같았다. 그는 시방세계의 모든 생명을 볼 수 있었고, 비록 각 생명의 유래를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모든 생명의 공통된 근원을 보았다. 이 근원은 마치 아른거리는 아지랑이처럼 맑고 미세하게 요동치며, 모든 생명의 근본이 되었다.
수행자는 계속해서 깊이 수행하여, 마침내 그의 마음은 잔물결 하나 없는 호수처럼 평온해졌다. 이때 그는 드디어 중생의 혼탁함을 초월하여 모든 허망의 본질을 꿰뚫어 보게 되었다.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정지(正知)를 얻은 사마타(奢摩他)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正心)이 응명(凝明)하여, 열 가지 종류의 천마(天魔)도 그 틈을 얻지 못한다. 바야흐로 생류(生類)의 근본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본래 종류 중에서 생의 근원이 드러난 자는, 저 그윽하고 맑으며 둥글게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한다. 그 원원(圓元) 중에서 계탁(計度)을 일으키는 자는 두 가지 무인론(無因論)에 떨어진다.
아난아, 너는 알아야 한다. 선한 수행자들이 올바르게 사마타를 닦을 때, 그들의 마음은 견고하고 밝아진다. 이때는 10가지 종류의 천마라도 그들을 어지럽힐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생명의 근원을 깊이 탐구하기 시작할 때, 어떤 이들은 이 과정에서 잘못된 생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들은 청정하고 미세하게 요동하는 생명의 본원을 오해하여, 온갖 추측과 계산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이무인론(二無因論)‘이라는 잘못된 관념에 빠지게 된다.
첫째는 이 사람이 본래 원인이 없음을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이미 생기(生機)를 완전히 타파하고, 안근(眼根)의 800공덕에 의지하여 8만 겁의 모든 중생이 업의 흐름에 따라 굽이돌며 여기서 죽고 저기서 태어나는 것을 본다. 단지 중생이 그곳에서 윤회하는 것만 볼 뿐, 8만 겁 밖은 깜깜하여 볼 수 있는 바가 없다. 그래서 이러한 해석을 짓는다: “이들 세간 시방의 중생은 8만 겁 이래로 원인 없이 스스로 있다.” 이러한 계탁으로 인해 정변지(正遍知)를 잃고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부처님은 계속해서 ‘이무인론’을 설명하셨다. 이는 두 가지 잘못된 견해이다. 첫 번째 잘못된 견해: ‘본무인론(本無因論)’. 어떤 수행자들은 생명의 근원을 보고 8만 겁 이래 중생의 윤회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중생이 다른 세계에서 나고 죽는 것을 보지만, 8만 겁 이전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된 생각을 일으킨다. “이 중생들은 8만 겁 이래로 자연적으로 존재했으며, 아무런 원인도 없다.” 이런 잘못된 추측 때문에 그들은 바른 지혜를 잃고 외도가 되어 보리의 본성을 잃게 된다.
둘째는 이 사람이 끝에도 원인이 없음을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생에 있어 이미 그 뿌리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낳고 새가 새를 낳음을 안다. 까마귀는 본래 검고 고니는 본래 희다. 사람과 천인은 본래 서서 다니고 축생은 본래 옆으로 기어 다린다. 흰 것은 씻어서 된 것이 아니고 검은 것은 물들여서 만든 것이 아니다. 8만 겁으로부터 다시 고치거나 옮김이 없다. 지금 이 형상이 다하여도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본래 보리를 보지 못했으니, 어떻게 다시 보리를 이루는 일이 있겠는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오늘날의 일체 물상(物象)은 다 본래 원인이 없다. 이러한 계탁으로 인해 정변지를 잃고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첫 번째 외도인 무인론(無因論)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두 번째 잘못된 견해: ‘말무인론(末無因論)’. 또 다른 수행자들은 생명의 근원을 본 후 몇 가지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한다. 사람은 사람을 낳고 새는 새를 낳는다. 까마귀는 항상 검고 백학은 항상 희다. 사람과 천인은 직립하고 동물은 횡으로 기어 다린다. 이러한 특징들은 8만 겁 이래로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한다. “이런 것들이 결코 변하지 않았다면, 성불(成佛)하는 일도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들은 이런 결론을 내린다. “지금 모든 사물은 원인이 없으며, 모든 것은 자연적으로 그러하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모두 틀렸다. 이런 잘못된 추측 때문에 이 수행자들은 바른 지혜를 잃고 외도가 되어 보리의 본성을 잃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첫 번째 외도의 무인론이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보라, 수행의 길에는 많은 함정이 있다. 우리는 반드시 경계해야 하며, 표면적인 현상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지혜는 이런 현상 배후의 진리를 꿰뚫어 보는 것이다.”
아난아, 이 삼마(三摩)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이 응명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하여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한다. 그 원상(圓常) 중에서 계탁을 일으키는 자는 네 가지 변상론(遍常論)에 떨어진다.
부처님은 수행자가 마주칠 수 있는 함정에 대해 계속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수행자들은 삼마지 중에서 마음이 견고하여 마구니에게 미혹되지 않는다. 그들은 생명의 근원을 깊이 탐구하고, 그 미묘하고 청정하며 항상 요동하는 본원을 관찰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원만하고 상항(常恒)한 본원을 관찰할 때 헛된 생각을 일으켜, 결국 ‘사변상론(四遍常論)‘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무엇이 사변상론입니까?” 아난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첫째는 이 사람이 마음과 경계(대상) 성품의 두 곳이 원인이 없음을 궁구하고, 닦아 익혀서 능히 2만 겁 중 시방 중생의 모든 생멸이 다 순환하여 일찍이 흩어져 없어지지 않음을 알고, 헤아려 상(常)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며 설명하셨다. “초번째 잘못된 견해는, 어떤 수행자가 2만 겁의 시간 동안 모든 중생의 생사 윤회가 끊임없이 순환하며 결코 사라지지 않음을 관찰하고는, 이러한 순환이 영원불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이 사람이 4대(四大)의 근원인 네 가지 성질이 상주(常住)함을 궁구하고, 닦아 익혀서 능히 4만 겁 중 시방 중생의 모든 생멸이 다 그 바탕이 항상하여 일찍이 흩어져 없어지지 않음을 알고, 헤아려 상(常)이라 한다.
“두 번째 잘못된 견해는, 또 다른 수행자들이 4만 겁의 시간 동안, 중생을 이루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 원소가 항상 존재하며 결코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관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대 원소가 영원불변하다고 생각했다.”
셋째는 이 사람이 6근(六根)과 말나(末那)의 집수(執受), 심의식(心意識) 중의 본원 유처(由處)의 성품이 항상함을 궁구하여 다하고, 닦아 익혀서 능히 8만 겁 중 일체 중생이 순환하여 잃지 않고 본래 상주함을 알고, 잃지 않는 성품을 궁구하여, 헤아려 상(常)이라 한다.
“세 번째 잘못된 견해는, 어떤 수행자들이 8만 겁의 시간 동안 중생의 육근(안, 이, 비, 설, 신, 의), 말나식(제7식), 아赖야식(제8식)이 계속 존재하며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관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의식들이 영원불변하다고 생각했다.”
부처님은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 수행자들은 단지 오랜 시간 동안 변하지 않아 보이는 현상을 보았기 때문에, 이 현상들이 영원하다고 잘못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했다. 아무리 긴 시간이라 해도 그것이 곧 영원은 아니라는 점이다.”
부처님께서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기억해 두어라. 진정한 지혜는 단순히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 뒤에 숨겨진 진리를 꿰뚫어 보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어떤 것이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영원하다고 단정해선 안 된다. 그런 생각은 우리를 길 잃게 하고, 세계의 본질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넷째는 이 사람이 이미 상원(想元)을 다하여 생리(生理)에 다시는 흐르고 멈추고 운전함이 없다. 생멸하는 상심(想心)이 지금 이미 영원히 멸하였으므로, 이치 가운데 자연히 불생불멸을 이루니, 마음으로 헤아리는 바에 의해 상(常)이라 한다. 이로써 상(常)을 계탁하여 정변지를 잃고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두 번째 외도인 원상론(圓常論)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네 번째 잘못된 견해를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또 어떤 수행자들은 자신의 상상력이 완전히 멈추고, 생명의 운전 또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관찰한다. 그들은 생멸하는 마음의 작용이 이미 영원히 사라졌으므로, 남은 것은 불생불멸의 본질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상태를 영원한 것이라고 여긴다.”
부처님께서 한숨을 쉬며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은 이러한 잘못된 추측 때문에 바른 지혜를 잃고 외도가 되어 보리의 본성을 잃게 된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외도의 원상론이다.”
또 삼마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을 굳게 응시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한다.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자타(自他) 중에서 계탁을 일으키는 자는 네 가지 전도견(顛倒見)인 일분무상 일분상론(一分無常一分常論)에 떨어진다.
이어서 부처님은 또 다른 잘못된 견해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수행자들은 삼마지 중에서 마음이 견고하여 마구니에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생명의 근원을 깊이 탐구하여 그 미묘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본원을 관찰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기 시작할 때, ‘사전도견(四顛倒見)‘의 함정에 빠져 어떤 것은 영원하고 어떤 것은 무상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첫째는 이 사람이 묘명(妙明)한 마음이 시방세계에 두루함을 관찰하고, 담연(湛然)하여 구경의 신아(神我)로 삼는다. 이로부터 곧 나는 시방에 두루하고 응명하여 움직이지 않으며, 일체 중생은 나의 마음 가운데서 스스로 나고 스스로 죽는다고 헤아린다. 즉 나의 심성은 이를 이름하여 상(常)이라 하고, 저 생멸하는 자는 참으로 무상(無常)한 성품이라 한다.
첫 번째 전도된 견해:
“어떤 수행자들은 자신의 마음이 시방세계에 두루 퍼져 맑고 고요함을 관찰한다. 그들은 이것을 구경의 신아(神我)라고 여긴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이 영원불변하며, 다른 중생들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나고 죽으므로 무상하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이 사람이 그 마음을 관찰하지 않고, 두루 시방의 항하사 국토를 관찰한다. 겁(劫)이 무너지는 곳을 보면 구경무상종성(究竟無常種性)이라 하고, 겁이 무너지지 않는 곳은 구경상(究竟常)이라 한다.
두 번째 전도된 견해:
“어떤 수행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지 않고, 오히려 시방의 무수한 세계를 관찰한다. 그들은 어떤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그것을 무상하다고 여기고, 어떤 세계가 무너지지 않는 것을 보고 그것을 영원하다고 여긴다.”
부처님은 잠시 멈추시고 온화한 눈빛으로 아난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보라, 아난아. 이 수행자들은 모두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진실의 일부분만을 보고 전체를 이해했다고 착각한다. 그들은 이 세상에 진정으로 영원불변한 것도, 완전히 무상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참된 지혜란 모든 사물의 상호 연관성과 변화하는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셋째는 이 사람이 따로 내 마음을 관찰하니 정세하고 미밀하기가 미진과 같다. 시방에 유전(流轉)하여도 성품은 옮기거나 바뀌지 않고, 능히 이 몸으로 하여금 즉시 나고 즉시 멸하게 한다. 그 무너지지 않는 성품을 나의 성품이 항상함[我性常]이라 이름하고, 일체의 사생(死生)이 나로부터 유출되는 것을 무상한 성품이라고 한다.
세 번째 전도된 견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수행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다가 그것이 미진처럼 정세하고 미묘함을 발견한다. 그들은 이 마음이 시방세계를 유전하더라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 마음이 몸을 나게 하고 멸하게 할 수 있다고 여겨, 마음은 영원하고 생사는 무상하다고 생각한다.”
넷째는 이 사람이 상음(想陰)이 다한 것을 알고 행음(行陰)이 흐르는 것을 본다. 행음이 항상 흐르는 것을 상성(常性)이라 헤아리고, 색·수·상 등은 지금 이미 다 멸했으므로 무상(無常)이라 한다. 이로써 일분무상 일분상을 계탁하기 때문에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세 번째 외도인 일분상론(一分常論)이라고 한다.
네 번째 전도된 견해:
부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또 어떤 수행자들은 자신의 상상력이 이미 사라졌음을 알지만, 행위의 흐름은 계속됨을 본다. 그들은 이 지속적인 행위의 흐름을 영원한 성품이라고 생각하고, 이미 사라진 색, 수, 상 등은 무상하다고 여긴다.”
부처님께서 한숨을 쉬며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은 이러한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어떤 것은 영원하고 어떤 것은 무상하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그들은 방향을 잃고 바른 지혜를 상실하여 외도가 된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외도의 일분상론이다.”
또 삼마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을 굳게 응시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한다.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분위(分位) 중에서 계탁을 내는 자는 네 가지 유변론(有邊論)에 떨어진다.
이어서 부처님은 또 다른 잘못된 견해에 대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수행자들은 삼마지 중에서 마음이 견고하여 마구니에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생명의 근원을 깊이 탐구하여 그 미묘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본원을 관찰한다. 그러나 그들이 세계의 범위를 생각하기 시작할 때, ‘사유변론(四有邊論)‘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무엇이 사유변론입니까?” 아난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이것은 일부 수행자들이 세계의 범위에 대해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들은 세계가 유한한지 무한한지 확정하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진실의 전체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다.”
부처님은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하셨다. “아난아, 기억해라. 진리는 종종 흑 아니면 백이 아니다. 세계의 본질은 복잡하며, 우리는 단순히 그것이 유한하다거나 무한하다고 말할 수 없다. 참된 지혜는 세계의 상호 연관성을 이해하는 것이지, 그것에 정의를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첫째는 이 사람이 마음으로 생원(生元)이 흘러 작용하여 쉬지 않음을 헤아려, 과거와 미래를 헤아리는 것을 유변(有邊)이라 하고, 상속하는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무변(無邊)이라 한다.
부처님은 계속해서 ‘사유변론’을 설명하셨다. 첫 번째 유변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수행자들은 생명의 근원이 끊임없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과거와 미래를 유한[有邊]하다고 보고, 지속되는 마음(상속심)을 무한[無邊]하다고 본다.”
둘째는 이 사람이 8만 겁을 관찰하면, 곧 중생의 8만 겁 전은 고요하여 듣고 보는 것이 없음을 본다. 듣고 봄이 없는 곳을 무변이라 하고, 중생이 있는 곳을 유변이라 한다.
두 번째 유변론:
“어떤 수행자들은 8만 겁 이전을 관찰한다.” 부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그들은 그 이전에 어떤 생명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임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들은 생명이 없는 곳을 무한[無邊]이라 하고, 생명이 있는 곳을 유한[有邊]이라 여긴다.”
셋째는 이 사람이 나의 변지(遍知)를 헤아려 무변성을 얻는다. 저 일체 사람이 현재 나의 앎 속에 있는데, 나는 일찍이 저들의 지성(知性)을 알지 못하니, 저들은 무변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단지 유변성(有邊性)만 있을 뿐이라 한다.
세 번째 유변론:
부처님께서 설명하셨다. “어떤 수행자들은 자신의 지식이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의 지식이 자신의 인지 범위 안에 있다고 느끼지만, 정작 다른 사람의 지식의 본질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의 지식은 유한하고, 오직 자신의 지식만이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넷째는 이 사람이 행음이 공함을 궁구하고, 그 보는 바 마음 길로써 헤아린다. 일체 중생의 한 몸 가운데서, 그 모두가 반은 생이고 반은 멸이라고 헤아린다. 그 세계의 일체 있는 바를 밝히되, 절반은 유변이고 절반은 무변이라 한다. 이로써 유변과 무변을 계탁하여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네 번째 외도인 유변론(有邊論)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네 번째 유변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또 어떤 수행자들은 행음의 공성을 깊이 관찰한 뒤, 자신의 이해로 추측한다. 그들은 모든 중생의 몸속에 반은 생이고 반은 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 생각을 온 세계로 확장하여, 세계의 절반은 유한하고 절반은 무한하다고 여긴다.”
부처님께서 한숨을 쉬며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은 이러한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세계가 유한하거나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그들은 방향을 잃고 바른 지혜를 상실하여 외도가 된다. 이것이 바로 네 번째 외도의 유변론이다.”
부처님께서 잠시 멈추시고 온화한 눈빛으로 아난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아난아, 보라. 이 수행자들은 모두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유한한 지식으로 무한한 우주를 이해하려 한다. 그들은 세계의 본질이 유한과 무한이라는 개념을 초월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다. “진정한 지혜는 우리의 인지가 유한하며, 세계의 본질은 단순한 개념으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끊임없이 배우고 탐구해야 하며, 섣불리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또 삼마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을 굳게 응시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한다.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지견(知見) 중에서 계탁을 내는 자는 네 가지 전도(顛倒)인 불사교란 변계허론(不死矯亂遍計虛論)에 떨어진다.
부처님께서 수행자가 마주칠 수 있는 함정에 대해 계속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수행자들은 삼마지 중에서 마음이 견고하여 마구니에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생명의 근원을 깊이 탐구하여 그 미묘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본원을 관찰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지견에 대해 추측하기 시작할 때, ‘사종전도(四種顛倒)‘의 함정에 빠져 기이하고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일으키게 된다.”
첫째는 이 사람이 변화의 근원을 관찰하여, 변천하고 흐르는 곳을 보아 이를 변(變)이라 하고, 서로 상속하는 곳을 보아 이를 항(恒)이라 하며, 보이는 곳을 보아 이를 생(生)이라 하고, 보이지 않는 곳을 보아 이를 멸(滅)이라 하며, 상속하는 인(因)의 성품이 끊어지지 않는 곳을 증(增)이라 하고, 정스런 상속 가운데서 떠난 곳을 감(減)이라 하며, 각각 태어나는 곳을 유(有)라 하고, 서로서로 없어지는 곳을 무(無)라 한다. 이치로써 모두 관찰하고 마음을 써서 따로 보아, 법을 구하는 사람이 와서 그 뜻을 물으면 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지금 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한다"고 한다. 어느 때나 다 그 말을 어지럽혀서, 저 앞사람으로 하여금 문구를 잃어버리게 한다.
첫 번째 전도된 견해:
부처님께서 설명하셨다. “어떤 수행자들은 사물의 변화를 관찰하면서 흐르는 것을 ‘변(變)’, 지속되는 것을 ‘항(恒)‘이라 부른다. 보이는 것을 ‘생(生)’, 보이지 않는 것을 ‘멸(滅)‘이라 한다. 그들은 또한 ‘증(增)’, ‘감(減)’, ‘유(有)’, ‘무(無)’ 등의 개념을 만들었다. 누군가 그들에게 질문을 하면, 그들의 대답은 언제나 혼란스럽다. ‘태어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한다’는 식으로 말하여 질문한 사람을 혼란에 빠뜨린다.”
둘째는 이 사람이 자세히 그 마음을 관찰하여, 서로서로 없는 곳에 인하여 무(無)를 증득한다.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오직 한 글자로 답하여 단지 ‘무(無)‘라고만 말하고, 무(無) 이외에는 말하는 바가 없다.
두 번째 전도된 견해:
부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어떤 수행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깊이 관찰한 후 많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누군가 질문을 하면, 그들은 오직 ‘무(無)‘라는 한 글자로만 대답하고,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셋째는 이 사람이 자세히 그 마음을 관찰하여, 각각 있는 곳에 인하여 유(有)를 증득한다.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오직 한 글자로 답하여 단지 ‘시(是, 그렇다/있다)‘라고만 말하고, 시(是) 이외에는 말하는 바가 없다.
세 번째 전도된 견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또 어떤 수행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여 많은 것들이 존재함을 발견한다. 그래서 누군가 질문하면, 그들은 오직 ‘유(有, 있다)‘라고만 대답하고,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넷째는 이 사람이 유와 무를 함께 보고, 그 경계가 갈라지므로 그 마음 또한 어지럽다.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답하여 말하기를 “있다는 것은 곧 없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 가운데는 또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일체를 교란하여 끝까지 따져 묻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로써 교란과 허무를 계탁하여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다섯 번째 외도인 사전도성(四顛倒性)의 불사교란 변계허론(不死矯亂遍計虛論)이라 한다.
네 번째 전도된 견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지막으로, 어떤 수행자들은 ‘유’와 ‘무’를 동시에 보고 더 큰 혼란에 빠진다. 누군가 질문을 하면, 그들의 대답은 매우 혼란스럽다.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부처님께서 한숨을 쉬며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은 이러한 잘못된 추측으로 인해 혼란스럽고 허망한 생각을 일으킨다. 그 결과 그들은 방향을 잃고 바른 지혜를 상실하여 외도가 된다. 이것이 바로 다섯 번째 외도의 사전도성(四顛倒性)으로, 그들은 기이하고 혼란스러운 이론을 만들어낸다.”
부처님께서 멈추시고 온화한 눈빛으로 아난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아난아, 보라. 이 수행자들은 모두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추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진실한 체험을 무시한다. 진정한 지혜는 복잡한 개념이나 극단적인 관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와 체험에서 온다. 우리는 열린 마음을 유지해야 하며, 자신의 생각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또 삼마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을 굳게 응시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한다.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무진류(無盡流)에서 계탁을 내는 자는 사후유상발심전도(死後有相發心顛倒)에 떨어진다. 혹은 스스로 몸을 굳혀 색(色)이 나라고 하거나, 혹은 내가 둥글어 국토를 두루 함유함을 보고 내가 색을 가졌다고 하거나, 혹은 저 전연(前緣)이 나를 따라 회복함을 보고 색이 나에게 속한다고 하거나, 혹은 또 내가 의지하는 행(行) 중의 상속을 보고 나는 색 안에 있다고 한다. 모두 계탁하여 말하기를 “죽은 뒤에 상(相)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순환하여 16가지 상이 있다. 이로부터 미혹하여 필경 번뇌와 필경 보리를 계탁하고, 양 성품이 나란히 구동하여 서로 닿지 않는다고 한다. 이로써 사후에 있음을 계탁하기 때문에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여섯 번째 외도인 오음 중 사후유상심전도론(死後有相心顛倒論)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가 마주칠 수 있는 함정에 대해 계속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수행자들은 삼마지 중에서 마음이 견고하여 마구니에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생명의 근원을 깊이 탐구하여 그 미묘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본원을 관찰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명의 끝없는 흐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때, 몇 가지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
“여섯 번째 외도: 사후유상론(死後有相論)”
부처님께서 설명하셨다. “어떤 수행자들은 죽은 뒤에도 어떤 형태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 ‘내 몸이 곧 나다’
- ‘나의 존재가 온 국토를 포함한다’
- ‘외부의 모든 인연이 나를 따른다’
- ‘나는 몸 안에 존재한다’
“이런 생각들은 총 16가지의 다른 변화를 가진다. 그들은 번뇌와 보리가 함께 존재하며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그들은 바른 지혜를 잃고 외도가 된다.”
또 삼마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을 굳게 응시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한다.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먼저 색·수·상을 제거한 가운데서 계탁을 내는 자는 사후무상발심전도(死後無相發心顛倒)에 떨어진다. 그 색이 멸함에 형체는 인(因)할 바가 없음을 보고, 그 상(想)이 멸함에 마음은 매일 곳이 없음을 관찰하며, 그 수(受)가 멸함을 알고 뒤에 연결됨이 없어 음(陰)의 성품이 소산된다. 비록 생리(生理)가 있다 해도 수와 상이 없어 초목과 같으니, 이 바탕이 현전함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죽은 뒤에 어찌 다시 여러 상이 있겠는가? 이에 기인하여 비교 헤아리니 죽은 뒤에 상이 없다. 이와 같이 순환하여 8가지 무상이 있다. 이로부터 혹 열반과 인과가 일체 모두 공(空)하여, 헛되이 이름만 있을 뿐 구경에는 단멸한다고 헤아린다. 이로써 사후에 없음을 계탁하기 때문에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일곱 번째 외도인 오음 중 사후무상심전도론(死後無相心顛倒論)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일곱 번째 외도: 사후무상론(死後無相論)”
부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또 어떤 수행자들은 색, 수, 상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은 이렇다.”
- 몸이 사라지면 존재할 근거가 없고
- 생각이 사라지면 마음이 의지할 곳이 없으며
- 감정이 사라지면 연속성이 없어진다
“그들은 생명이 있더라도 감정과 생각이 없다면 초목과 같다고 생각한다. 현재도 이런 것들을 볼 수 없는데 죽은 뒤에는 더더욱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8가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그들은 심지어 열반과 인과도 모두 공(空)하며, 이름뿐이고 결국은 완전히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그들도 바른 지혜를 잃고 외도가 된다.”
부처님께서 멈추시고 온화한 눈빛으로 아난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아난아, 보라. 이 수행자들은 모두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죽은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너무 집착하여 현재의 수행을 소홀히 한다. 어떤 이들은 사후에 무언가 존재한다고 믿고, 어떤 이들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진정한 지혜는 미지의 것에 대한 추측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와 체험에서 온다.”
부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다. “기억해라. 생명의 진실은 ‘유’와 ‘무’, 존재와 비존재 같은 개념을 초월한다. 우리는 이런 개념에 얽매이지 말고 생명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현재 어떻게 살고 어떻게 수행하느냐이지, 죽은 뒤의 일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또 삼마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을 굳게 응시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한다.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행음(行陰)이존재하는 가운데 수음(受陰)과 상음(想陰)의 멸무(滅無)를 겸해 받고, 유(有)와 무(無)를 쌍으로 계탁하여 자체상이 깨어지니, 이 사람은 사후구비기전도론(死後俱非起顛倒論)에 떨어진다. 색·수·상 가운데서 유(有)이면서 비유(非有)임을 보고, 행음의 천류(遷流) 안에서 무(無)이면서 불무(不無)임을 본다. 이와 같이 순환하여 오음의 세계를 궁구해 다하고, 8가지 구비상(俱非相)에 따라 한 인연을 얻으면, 모두 사후에 유상(有相)이면서 무상(無相)이라고 말한다. 또 모든 행의 성품이 옮기고 바뀌기 때문에, 마음이 통오(通悟)를 발하여 유무(有無)가 다 아니니[俱非] 허실(虛實)을 둘 곳을 잃는다고 계탁한다. 이로써 사후에 다 아니[俱非]라고 계탁하여, 후제가 어둡고 말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여덟 번째 외도인 오음 중 사후구비심전도론(死後俱非心顛倒論)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가 마주칠 수 있는 함정에 대해 계속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계속해서 수행 중에 길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여덟 번째 외도: 사후구비론(死後俱非論)”
부처님께서 설명하셨다. “어떤 수행자들은 행음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수음과 상음은 사라진 것을 관찰한다. 그들은 존재와 비존재를 동시에 생각하다가 결국 혼란에 빠진다. 그들의 생각은 이렇다.”
- 색, 수, 상 속에서 그들은 있음과 없음을 동시에 보고
- 행의 흐름 속에서도 없음과 없지 않음을 본다
“이런 모순된 생각은 8가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그들은 사후가 유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을 보고,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허구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후의 상태를 확정할 수 없어서 그들은 바른 지혜를 잃고 외도가 된다.”
또 삼마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을 굳게 응시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한다.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뒤에 다시 태어남[後後無生]이 없다고 계탁하는 자는 칠단멸론(七斷滅論)에 떨어진다. 혹은 육신이 멸함을 계탁하거나, 혹은 욕(欲)이 다하여 멸함을 계탁하거나, 고(苦)가 다하여 멸함을 계탁하거나, 극락이 멸함을 계탁하거나, 극사가 멸함을 계탁한다. 이와 같이 순환하여 7제(際)를 궁구해 다하고, 현전에서 소멸하여 멸하면 다시는 없다고 한다. 이로써 사후에 단멸함을 계탁하기 때문에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아홉 번째 외도인 오음 중 사후단멸심전도론(死後斷滅心顛倒論)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아홉 번째 외도: 사후단멸론(死後斷滅論)”
부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또 어떤 수행자들은 죽은 뒤에 모든 것이 끊어지고 멸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7가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 몸이 멸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 욕망이 다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 고통이 다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 극락이 다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 극도의 버림[捨]마저 다하면 사라진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들이 사라지면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그들도 바른 지혜를 잃고 외도가 된다.”
부처님께서 멈추시고 온화한 눈빛으로 아난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아난아, 보라. 이 수행자들은 모두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죽은 뒤에 일어날 일에 너무 집착하여 현재의 수행을 등한시한다. 어떤 이들은 사후가 존재와 비존재가 아니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이 단절된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지혜는 미지에 대한 추측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와 체험에서 온다.”
부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다. “기억해라. 생명의 진실은 이러한 개념들을 초월한다. 우리는 이런 생각들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의 수행에 집중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현재를 살고, 생명의 본질을 이해하고 체험하느냐이지, 죽은 뒤의 일에 과도하게 관심을 쏟는 것이 아니다.”
또 삼마 중의 모든 선남자들은 정심을 굳게 응시하여 마구니가 틈을 얻지 못하고 생류의 근본을 궁구한다. 저 그윽하고 맑으며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고, 뒤에 다시 태어남이 있다[後後有生]고 계탁하는 자는 오열반론(五涅槃論)에 떨어진다. 혹은 욕계를 바른 전의(轉依)라 하는데, 원명(圓明)함을 관견하여 애모심을 내기 때문이다. 혹은 초선(初禪)을 (열반이라 하는데) 성품에 근심이 없기 때문이며, 혹은 이선(二禪)을 마음이 괴로움이 없기 때문이며, 혹은 삼선(三禪)을 기쁨이 지극하여 따르기 때문이며, 혹은 사선(四禪)을 괴로움과 즐거움 둘 다 없어 윤회의 생멸하는 성품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유루(有漏)의 하늘[天]에 미혹하여 무위(無為)의 해(解)를 짓고, 다섯 곳의 안온함을 수승하고 청정한 의지처로 삼는다. 이와 같이 순환하여 다섯 곳을 구경(究竟)이라 하고, 이로써 오현열반(五現涅槃)을 계탁하여 외도에 떨어져 보리 성품을 미혹하게 된다. 이것을 열 번째 외도인 오음 중 오현열반심전도론(五現涅槃心顛倒論)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수행자가 마주칠 수 있는 함정에 대해 계속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제 열 번째 외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열 번째 외도: 오현열반론(五現涅槃論)”
부처님께서 설명하셨다. “어떤 수행자들은 현세에서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5가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 어떤 이들은 욕계(欲界)를 열반이라 생각한다. 그곳의 아름다움을 보고 애모심을 내기 때문이다.
- 어떤 이들은 초선(初禪)을 열반이라 생각한다. 근심이 없기 때문이다.
- 어떤 이들은 이선(二禪)을 열반이라 생각한다.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 어떤 이들은 삼선(三禪)을 열반이라 생각한다. 즐거움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 어떤 이들은 사선(四禪)을 열반이라 생각한다. 고통도 즐거움도 없고 생사윤회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유루(有漏)의 천국을 무위법(無為法)으로 오해하고, 이 다섯 곳을 청정한 의지처로 삼는다. 그들은 현세에서 열반을 얻었다고 착각하여 바른 지혜를 잃고 외도가 된다.”
아난아, 이와 같은 열 가지 선나(禪那)의 미친 견해는 다 행음의 용심(用心)이 교호(交互)하기 때문에 이러한 깨달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중생은 완고하고 미혹하여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이러한 현전(現前)을 만나 미혹함을 깨달음이라 하여 스스로 성인에 올랐다고 말하며, 대망어(大妄語)를 이루어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너희들은 반드시 여래의 마음을 가지고 내가 멸도한 뒤 말법세상에 전하여 보이며, 두루 중생들로 하여금 이 뜻을 깨닫게 하라. 심마(心魔)로 하여금 스스로 깊은 재앙을 일으키지 않게 하고, 잘 보호하여 삿된 견해를 없애며, 그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진정한 뜻을 열어 깨닫게 하라. 무상도(無上道)에서 갈림길을 만나지 않게 하고, 마음이 조금 얻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게 하여, 대각왕(大覺王)의 청정한 표지(標指)가 되게 하라.
부처님께서 멈추시고 엄숙하게 아난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 열 가지 선나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모두 행음의 작용으로 인한 환각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이를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이런 경계를 만나면 깨달았다고 착각하며 심지어 성인이 되었다고까지 말한다. 이는 큰 거짓말(대망어)이며, 그들을 무간지옥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부처님께서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열반에 든 후, 너희는 반드시 여래의 뜻을 말법 시대의 중생들에게 전해야 한다. 모든 중생이 이 이치를 깨닫게 하여, 심마(心魔)가 깊은 죄업을 짓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들을 보호하고 삿된 견해를 없애주며, 진정한 이치를 깨닫도록 가르쳐라. 그들이 무상도를 구하는 과정에서 곁길로 빠지지 않게 하고, 작은 성취에 만족하지 않게 하라. 그들이 대각왕(大覺王)의 청정한 표본이 되게 하라.”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다. “기억해라, 아난아. 진정한 열반은 특정한 경계나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이 모든 개념을 초월한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특정한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본질을 철저히 이해하고 모든 집착과 환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해탈의 길이다.”
아난아, 저 선남자가 삼마제를 닦아 행음이 다한 자는, 모든 세간의 성품인 그윽하고 맑으며 요동하는 것과, 같은 분상 생기(生機)가 갑자기 끊어진다. 침세(沈細)한 벼리[綱紐]인 보특가라(補特伽羅: 중생)의 업보를 갚는 깊은 맥, 감응이 끊어진다. 열반천(涅槃天)에서 장차 크게 밝게 깨달으려 함이, 마치 닭이 울기 뒤에 동방을 돌아보면 이미 정색(精色)이 있는 것과 같다. 육근(六根)은 허정(虛靜)하여 다시는 치달리지 않고, 안팎이 맑고 밝아 들어와도 들어온 바가 없다. 시방의 열두 종류가 생명을 받는 근원을 깊이 통달하고, 유래를 관찰하고 근원을 잡되 모든 부류가 부르지 않는다. 시방계에서 이미 그 동질성을 얻어 정색(精色)이 침몰하지 않고 그윽한 비밀을 발현하니, 이것을 식음구우(識陰區宇)라고 한다. 만약 중생들의 얽힘에 이미 동(同)함을 얻은 가운데, 육문(六門)을 소마(銷磨)하여 합하고 열림[合開]을 성취하고, 보고 듣는 것이 이웃하여 통하며 서로 작용함이 청정해질 것이다. 시방세계와 몸과 마음이 마치 유리와 같아 안팎이 명철해지면 식음(識陰)이 다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능히 명탁(命濁)을 초월하며, 그 유래를 관찰하면 망상(罔象)하고 허무하며, 뒤바뀐 망상을 근본으로 삼는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의 더 깊은 단계에 대해 계속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제 행음이 다한 선남자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수행자의 행음이 다하면, 세간의 미세하고 맑으면서도 요동치던 성질이 갑자기 실 끊어지듯 사라진다. 깊고 미세한 생명의 끈, 인과업보의 깊은 맥락이 갑자기 끊어진다.”
부처님의 눈이 지혜의 빛으로 반짝였다. “이때 수행자는 마치 닭이 울고 난 뒤 동쪽 하늘이 밝아오는 것처럼, 열반의 참뜻을 크게 깨닫기 직전의 상태가 된다.”
“그의 육근은 고요해져 더 이상 밖으로 치달리지 않는다. 안팎이 맑고 투명해져 들어와도 들어온 바가 없는 경지에 이른다. 그는 시방세계 열두 종류 중생의 생명 근원을 깊이 통달하여, 모든 종류의 중생이 더 이상 소환되지 않음을 관찰한다.”
부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그는 시방세계에서 이미 동일성을 얻어, 정묘한 색상이 가라앉지 않고 그윽한 비밀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식음(識陰)의 영역이다.”
“만약 그가 이 동일성 속에서 육근을 녹여 서로 통하게 하고 청정하게 한다면, 시방세계와 자신의 몸과 마음이 마치 유리처럼 안팎으로 투명해질 것이다. 이것이 식음이 다한 상태이다. 이때 그는 명탁(命濁)을 초월하여, 모든 허망하고 뒤바뀐 망상의 본질을 보게 된다.”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식(識)에서 근원으로 돌아가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능히 자신의 몸의 근(根)이 막힘을 합하고 열게 하고, 또한 시방의 모든 종류와 통하여 깨달으며, 각지(覺知)가 통하여 흐려져 능히 원원(圓元)에 들어간다. 만약 돌아갈 바에 진상(真常)의 원인을 세워 승해(勝解)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인소인집(因所因執)에 떨어진다. 사비가라(娑毘迦羅)가 귀의하는 바인 명체(冥諦)가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첫 번째인 소득심(所得心)을 세워 소귀(所歸)의 과를 이루어, 원통(圓通)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외도의 종자를 낳는다고 한다.
부처님은 잠시 멈추시고 심각하게 아난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하지만 아난아, 알아두어야 한다. 이 단계에 이르러 생멸을 멸했다 해도, 적멸의 미묘한 경지에는 아직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다.”
“이때 수행자는 자신의 몸을 외부 세계와 통하게 하고, 시방의 모든 중생과 감각을 공유하며 원융한 본원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이 단계에서 어떤 영원불변한 원인을 고집하고 그것을 구경의 진리라고 여긴다면, 그는 ‘인소인집(因所因執)‘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부처님께서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사비가라처럼 명체(冥諦)에 빠져,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멀어지고 바른 지견을 잃게 된다. 이것이 첫 번째 집착으로, 원통의 이치를 어기고 열반의 성을 등지며 외도의 종자를 낳게 된다.”
부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다. “그러므로 아난아, 수행의 길에는 아무리 높은 경지라 해도 함정이 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어떤 경계나 견해에도 집착하지 말고 끊임없이 초월하여 궁극적인 원만함에 이르러야 한다.”
아난아,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만약 돌아갈 바에 자신을 그 자체로 보고, 온 허공계 십이류 내의 모든 중생이 다 내 몸 안의 한 부류에서 유출된다고 하여 승해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능비능집(能非能執)에 떨어진다. 마혜수라(摩醯首羅)가 무변신(無邊身)을 나타내는 것이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두 번째로 능위심(能為心)을 세워 능사(能事)의 과를 이루어,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대만천(大慢天)의 아변원종(我遍圓種)을 낳는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가 마주칠 수 있는 더 많은 함정에 대해 계속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계속해서 행음을 초월하고 생멸을 멸했지만 아직 적멸의 정묘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수행자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두 번째 함정: 능비능집(能非能執)”
부처님께서 설명하셨다. “어떤 수행자들은 우주와 모든 중생이 자신의 몸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내가 모든 것의 근원이며, 내가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능비능집의 함정이다.”
부처님께서 한숨을 쉬며 말씀하셨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마혜수라처럼 무변신(無邊身)을 나타낸다. 그들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잃고 바른 지견을 상실한다. 이것이 두 번째 잘못으로, 자신의 능력에 집착하여 원통의 이치를 어기고 열반의 성을 등지며, 자신이 모든 곳에 편만하다는 대만천(大慢天)의 종자를 낳게 된다.”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만약 돌아갈 바에 귀의할 바가 있다고 하여, 스스로 몸과 마음이 그로부터 유출되었다고 의심하고, 시방 허공도 다 그로부터 일어났다고 한다. 즉 모든 일어나는 바가 선류(宣流)하는 땅에서 진상(真常)의 몸이 생멸이 없다는 이해를 짓는다. 생멸 가운데 있으면서 일찍이 상주(常住)한다고 계탁하여, 이미 불생(不生)에 미혹하고 또한 생멸에도 미혹하여, 침미(沈迷)에 안주하여 승해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상비상집(常非常執)에 떨어진다. 자재천(自在天)을 계탁함이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세 번째인 인의심(因依心)을 세워 망계(妄計)의 과를 이루어,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도원종(倒圓種)을 낳는다고 한다.
“세 번째 함정: 상비상집(常非常執)”
부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또 어떤 수행자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 어떤 근원에서 나왔다고 의심하며, 온 우주도 그곳에서 생겨났다고 믿는다. 그들은 이 근원을 영원불변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은 이미 생사를 초월했다고 생각한다.”
부처님의 눈에 연민이 서렸다. “이 사람들은 생멸 속에서 영원을 찾았다고 착각하며, 불생(不生)도 이해하지 못하고 생멸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이런 미혹 속에 안주하며 잘못된 이해를 낳는다. 이것이 바로 상비상집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재천(自在天)을 믿는 이들과 같다. 그들은 불보리를 미혹하여 바른 지견을 잃었다. 이것이 세 번째 잘못이다. 그들은 어떤 영원한 근원에 집착하여 원통의 이치를 어기고 열반성을 등지며 전도된 종자를 낳는다.”
부처님께서 멈추시고 온화한 눈빛으로 아난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아난아, 보라. 이처럼 높은 경지에 이른 수행자조차도 여전히 많은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꾾임없이 경계하고 어떤 경계나 견해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부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다. “진정한 수행은 어떤 특별한 능력을 얻거나 영원불변한 것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의 본질을 명확히 보고, 집착하지 않고 미혹되지 않으며, 열려 있고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해탈로 가는 길이다.”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만약 아는 바[所知]에 앎[知]이 두루 원만하다고 하여 앎에 인(因)하여 이해를 세워, 시방의 초목도 다 유정(有情)이라 칭하여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초목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죽으면 다시 시방의 초목이 된다고 하여, 가림 없이 두루 안다고 하여 승해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지무지집(知無知執)에 떨어진다. 바타(婆吒)와 산니(霰尼)가 일체각(一切覺)을 집착하는 것이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네 번째인 계원지심(計圓知心)을 세워 허류(虛謬)의 과를 이루어,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도지종(倒知種)을 낳는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가 마주칠 수 있는 더 많은 함정에 대해 계속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계속해서 행음을 초월하고 생멸을 멸했지만 아직 적멸의 정묘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수행자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네 번째 함정: 지무지집(知無知執)”
부처님께서 설명하셨다. “어떤 수행자들은 자신의 지식이 이미 모든 것에 미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시방의 초목도 사람과 같이 감정이 있어, 사람이 죽으면 초목이 되고 초목도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착각한다.”
부처님께서 고개를 저으셨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바타와 산니처럼 모든 것에 지각이 있다고 고집한다. 그들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잃고 바른 지견을 상실한다. 이것이 네 번째 잘못으로, 자신의 지식에 집착하여 허망한 결과를 낳고, 원통의 이치를 어기고 열반의 성을 등지며 전도된 지식의 종자를 낳게 된다.”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만약 원융하여 근(根)이 서로 작용하는 가운데 이미 수순함을 얻어, 문득 원화(圓化)함에서 일체를 발생한다. 불의 광명을 구하고 물의 청정함을 즐기며, 바람의 두루 흐름을 사랑하고 티끌의 성취를 관찰하여, 각각 숭상하고 섬겨서 이 뭇 티끌로써 한다. 본인을 발작하여 상주한다는 이해를 세우는 이는, 이 사람은 생무생집(生無生執)에 떨어진다. 모든 가섭파(迦葉波)와 바라문들이 마음을 쓰고 몸을 부려 불을 섬기고 물을 숭상하며, 생사를 벗어나기를 구하는 자가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다섯 번째인 숭사(崇事)를 계탁하고 집착하여, 마음에 미혹하여 물(物)을 따르며, 망되이 인(因)을 구하고 과(果)를 바라,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전화종(顛化種)을 낳는다고 한다.
“다섯 번째 함정: 생무생집(生無生執)”
부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또 어떤 수행자들은 육근이 서로 통용되는 경지에서 어떤 체험을 얻으면, 자연계의 여러 요소들을 숭배하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불을, 어떤 이는 물을, 어떤 이는 바람을, 어떤 이는 흙을 숭배하며, 이 요소들을 영원한 근원으로 여긴다.”
부처님의 눈에 연민이 서렸다. “이 사람들은 마치 가섭파나 일부 바라문들처럼 불이나 물을 열심히 섬기며 생사를 벗어나려 한다. 그들은 생무생집의 함정에 빠져 부처님의 깨달음을 잃고 바른 지견을 상실한다.”
부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다. “이것이 다섯 번째 잘못이다. 그들은 외물을 숭배하는 데 집착하여 마음을 물질 속에 잃어버리고, 잘못된 원인을 세워 허망한 결과를 바란다. 이는 원통의 이치를 어기고 열반의 성을 등지며 전도된 변화의 종자를 낳게 된다.”
부처님께서 멈추시고 온화한 눈빛으로 아난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아난아, 보라. 수행의 길에는 이렇게 많은 함정이 있다. 어떤 이는 지식에 집착하고, 어떤 이는 자연 현상에 집착한다. 그러나 진정한 지혜는 지식의 축적이나 외물에 대한 숭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본질을 직접 이해하는 데서 온다.”
부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다. “진정한 수행은 이 모든 집착과 편견을 초월하여 열려 있고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계나 견해에도 미혹되지 말고 생명의 진실을 직접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해탈로 가는 길이다.”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만약 원명(圓明)한 데서 밝음 가운데가 비었다고 계탁하여, 뭇 변화를 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멸(滅)로써 의지처를 삼고, 귀의할 바를 삼아 승해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귀무귀집(歸無歸執)에 떨어진다. 무상천(無想天) 중의 모든 순약다(舜若多)가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여섯 번째인 원허무심(圓虛無心)을 세워 공망(空亡)의 과를 이루어,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단멸종(斷滅種)을 낳는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가 마주칠 수 있는 더 많은 함정에 대해 계속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계속해서 행음을 초월하고 생멸을 멸했지만 아직 적멸의 정묘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수행자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여섯 번째 함정: 귀무귀집(歸無歸執)”
부처님께서 설명하셨다. “어떤 수행자들은 원명한 경지 속에서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모든 현상을 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소멸을 의지처로 삼는다.”
부처님께서 고개를 저으셨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무상천의 천인들처럼 부처님의 깨달음을 잃고 바른 지견을 상실한다. 이것이 여섯 번째 잘못으로, 허무에 집착하여 공망(空亡)의 결과를 낳고, 원통의 이치를 어기고 열반의 성을 등지며 단멸의 종자를 낳게 된다.”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만약 원상(圓常)한 데서 몸을 굳게 하여 상주하게 하고, 정원(精圓)한 것과 같이 길이 기울어 없어지지 않게 한다고 승해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탐비탐집(貪非貪執)에 떨어진다. 모든 아시다(阿斯陀)로서 장수(長命)를 구하는 자가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일곱 번째인 명원(命元)에 집착하여 고망인(固妄因)을 세우고, 장로(長勞)의 과로 나아가,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망연종(妄延種)을 낳는다고 한다.
“일곱 번째 함정: 탐비탐집(貪非貪執)”
부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또 어떤 수행자들은 몸을 영원히 유지하려 하며, 정묘하고 원만한 경지와 같이 영원 불멸하기를 원한다.”
부처님의 눈에 연민이 서렸다. “이 사람들은 마치 장생불사를 추구하는 아시다 수행자들과 같다. 그들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잃고 바른 지견을 상실한다. 이것이 일곱 번째 잘못으로, 생명의 근원에 집착하여 잘못된 원인을 세우고, 결국 긴 고생의 결과를 낳는다. 이는 원통의 이치를 어기고 열반의 성을 등지며 망령된 연장의 종자를 낳게 된다.”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생명의 서로 통함을 관찰하고 도리어 진로(塵勞)를 머물게 하여 그것이 다 없어질까 두려워하니, 문득 이때 연화궁에 앉아 널리 7진(七珍)을 변화하고 많은 보배 미녀를 더하여, 그 마음을 방종하게 하여 승해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진무진집(眞無眞執)에 떨어진다. 타지가라(吒抧迦羅)가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여덟 번째인 사심(邪思)의 인을 발하여 치진(熾塵)의 과를 세워,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천마종(天魔種)을 낳는다고 한다.
“여덟 번째 함정: 진무진집(眞無眞執)”
부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또 어떤 수행자들은 생명이 서로 통함을 관찰하면서도, 세속적 욕망이 사라질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연꽃 궁전에 앉아 칠보를 변화시키고 보배로운 미녀들을 늘려 마음껏 즐기는 상상을 한다.”
부처님께서 한숨을 쉬며 말씀하셨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타지가라 같은 천마와 같다. 그들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잃고 바른 지견을 상실한다. 이것이 여덟 번째 잘못으로, 삿된 생각을 일으켜 치성한 욕망의 결과를 낳는다. 이는 원통의 이치를 어기고 열반의 성을 등지며 천마의 종자를 낳게 된다.”
부처님께서 멈추시고 온화한 눈빛으로 아난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아난아, 보라. 수행의 길에는 이렇게 많은 함정이 있다. 어떤 이는 허무에 집착하고, 어떤 이는 영생에 집착하며, 어떤 이는 감각적 쾌락에 집착한다. 그러나 진정한 수행은 이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집착을 초월하여 생명의 진실을 직접 깨닫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다. “진정한 수행은 어떤 경계나 견해에도 미혹되지 않는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진실을 직면하고, 도피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해탈로 가는 길이다.”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명명(命明) 가운데서 정(精)과 추(麁)를 분별하고, 진위를 소결(疏決)하여 인과가 서로 갚음을 알아, 오직 감응만을 구하고 청정한 도를 등진다. 이른바 고(苦)를 보고 집(集)을 끊고 멸(滅)을 증득하고 도(道)를 닦아, 멸에 거하여 이미 쉬고 다시 더 나아가지 않으며 승해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정성성문(定性聲聞)에 떨어진다. 모든 무문승(無聞僧)과 증상만(增上慢)의 자가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아홉 번째인 원정응심(圓精應心)을 세워 취적(趣寂)의 과를 이루어,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천공종(纏空種)을 낳는다고 한다.
“아홉 번째 함정: 정성성문(定性聲聞)”
부처님께서 대중을 둘러보시며 계속 말씀하셨다. “또 어떤 수행자들은 생명의 본질을 관찰할 때 정세함과 거칠음을 분별하고, 진위를 가리며 인과의 상호 작용을 탐구한다. 그들은 오직 감응만을 구하고 청정한 도를 등진다.”
“이것이 소위 ‘고통을 보고(견고), 원인을 끊고(단집), 소멸을 증득하고(증멸), 도를 닦는다(수도)‘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명하셨다. “그들은 적멸에 머물며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정성성문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그들은 무문승이나 증상만자와 짝이 되어 부처님의 깨달음을 잃고 바른 지견을 상실한다.”
부처님의 어조가 부드러워졌다. “이것이 아홉 번째 잘못이다. 그들은 정밀한 감응의 마음을 원만히 했으나 적멸의 결과로 나아간다. 이는 원통의 이치를 어기고 열반의 성을 등지며 공(空)에 얽매이는 종자를 낳게 된다.”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의 공함을 궁구하여 이미 생멸을 멸하였으나, 적멸의 정묘함에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만약 원융하고 청정한 각명(覺明)에서 깊고 묘함을 연구하여 곧 열반을 세우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승해를 내는 자는, 이 사람은 정성벽지(定性辟支)에 떨어진다. 모든 연독륜(緣獨倫)으로서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자가 그 반려가 되어, 불보리를 미혹하고 지견을 잃게 한다. 이를 이름하여 열 번째인 원각몰심(圓覺[淴-心+目]心)을 세워 담명(湛明)의 과를 이루어, 원통에 위배되고 멀어지며 열반성을 등지고 각원명불화원종(覺圓明不化圓種)을 낳는다고 한다.
“열 번째 함정: 정성벽지(定性辟支)”
부처님께서 천천히 입을 여셨다. “또 어떤 수행자들은 원융하고 청정한 깨달음의 빛 속에서 깊고 묘한 이치를 연구한다. 그들은 즉시 열반을 세우고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자리에 앉은 모든 이들을 둘러보셨다. “이런 사람들은 독각(緣覺) 수행자나 홀로 수행하는 이들과 짝이 되어 큰 수레(大乘)로 마음을 돌리지 않는, 정성벽지불(定性辟支佛)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부처님의 어조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잃고 바른 지견을 상실했다.”
부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다. “이것이 열 번째 잘못이다. 그들은 원만한 깨달음의 마음을 이루었으나, 담연하고 맑은 과위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는 원통의 이치를 어기고 열반의 성을 등진 것이다.”
부처님의 목소리가 무한한 자비로 부드러워졌다. “그들은 비록 원명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다시는 변화하지 않고 원융하지 않은 종자를 낳았다.”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잠시 멈추어 모든 이가 그 뜻을 깊이 생각하게 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등불처럼 수행의 길에 있는 함정들을 비추어, 중생들을 진정한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셨다.
아난아, 이와 같은 열 가지 선나(禪那)는 중도에 미친[狂] 인(因)을 이루어 의지하거나, 족하지 못한 가운데 만족하다는 증득을 낸다. 모두 식음(識陰)의 용심(用心)이 교호하기 때문에 이러한 지위가 생긴다. 중생은 완고하고 미혹하여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이러한 현전(現前)을 만나 각기 사랑하는 바에 따라, 먼저 미혹한 마음을 익혀 스스로 휴식하고, 이를 구경의 안녕한 지위(歸寧地)로 삼는다. 스스로 무상보리를 만족했다고 말하면, 대망어가 되어 외도와 사마(邪魔)를 이루고, 감응하는 업이 마침내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성문과 연각도 증진을 이루지 못한다. 너희들은 마음에 여래의 도를 품고, 이 법문을 내가 멸한 뒤 말법 세상에 전하여 보여, 널리 중생들로 하여금 이 뜻을 깨닫게 하라. 견마(見魔)로 하여금 스스로 침얼(沈[卄/(阿-可+辛)/女])을 짓지 않게 하고, 편안하게 하고 가여이 여겨 구원하여 삿된 인연을 소멸하며, 그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불지견(佛知見)에 들게 하라. 처음부터 성취하여 갈림길을 만나지 않게 하라. 이와 같은 법문은 지난 과거 항하사 겁의 미진수 여래들이 이 마음이 열림을 타고 무상도를 얻었다. 식음이 만약 다하면 너의 현전하는 모든 근(根)이 서로 작용하여,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능히 보살의 금강건혜(金剛乾慧)에 들어간다. 원만하고 밝은 정심(精心)이 그 가운데서 변화를 일으키니, 마치 깨끗한 유리가 내면에 보배 달을 머금은 것과 같다. 이와 같으면 곧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迴向), 사가행심(四加行心)을 초월한다. 보살이 행하는 금강십지(金剛十地)와 등각(等覺)의 원명(圓明)함이, 여래의 묘장엄해(妙莊嚴海)에 들어가, 보리를 원만히 하여 얻을 바 없는 데로 돌아간다. 이것은 과거 선불(先佛) 세존께서 사마타 중에서 비바사나로 각명(覺明)하여 미세한 마의 일을 분석한 것이다. 마의 경계가 현전함에 네가 능히 알고 식별하여, 마음의 때를 씻어 없애면 삿된 견해에 떨어지지 않는다. 음마(陰魔)가 소멸하고 천마(天魔)가 부수어지며, 대력 귀신이 넋을 잃고 도망가며, 이매망량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다. 바로 보리에 이르러 조금도 모자람이나 하열함이 없이 증진하여, 대열반에 마음이 미혹하거나 답답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모든 말세의 우둔한 중생이 선나를 알지 못하고 설법을 알지 못하면서 삼매 닦기를 좋아하면 네가 삿된 데와 같아질까 두렵다. 일심으로 권하여 나의 불정다라니주(佛頂陀羅尼呪)를 가지게 하라. 만약 능히 외우지 못하면 선당에 쓰거나 몸에 지니면, 일체 모든 마가 능히 움직이지 못한다. 너는 마땅히 시방의 여래를 공경하고 흠모하여, 구경의 수행 정진으로 최후의 모범을 드리워라.
부처님의 눈은 끝없는 지혜와 자비로 빛나고 있었다. 그분은 주위를 둘러보시며 아난과 대중에게 시선을 두셨다. 온화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가르침을 이어가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방금 말한 이 열 가지 선나는 수행 도중에 나타날 수 있는 광란의 원인이다. 어떤 이들은 진정한 원만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다 이루었다고 착각한다.”
부처님의 어조가 엄숙해졌다. “이것은 모두 식음(識陰)의 작용으로 마음이 서로 교차하여 생기는 경계이다. 안타깝게도 우매한 중생들은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고 이런 경계를 만나면 그것을 궁극적인 귀의처로 삼는다.”
부처님은 고개를 저으며 연민의 눈빛을 보네셨다. “그들은 스스로 무상보리를 증득했다고 말하지만, 이는 큰 거짓말(대망어)이다. 그들은 결국 외도와 사마가 되어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성문과 연각조차도 여기서 멈춰 서고 만다.”
부처님의 목소리가 부드럽지만 단호해졌다. “너희는 여래의 도를 마음에 새겨라. 내가 멸도한 후에는 이 법문을 말법 시대의 중생들에게 전하여, 그들이 이 이치를 깨닫게 하라.”
부처님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들이 마장에 휩쓸려 타락하지 않게 하라. 그들을 보호하고 구원하며 사악한 인연을 없애, 그들의 몸과 마음이 부처님의 지견에 들게 하라. 처음부터 바른 길을 걷게 하여 곁길로 빠지지 않게 하라.”
부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이 법문은 과거 무수한 세월 동안 수많은 여래께서 무상도를 얻게 한 길이다. 식음이 다하면 너의 모든 감각 기관(제근)이 서로 통용되어, 보살의 금강건혜(金剛乾慧) 경지에 들게 될 것이다.”
부처님의 목소리에 희망이 넘쳤다. “너의 원명(圓明)한 정심(精心)이 그 안에서 변화를 일으켜, 마치 맑은 유리가 보배로운 달을 품은 것과 같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사가행심을 초월하여 보살의 금강십지와 등각의 원명함에 들고, 마침내 여래의 묘장엄해에 들어가 보리를 원만히 하여 얻을 바 없는 경지에 귀의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의 눈이 지혜의 빛으로 반짝였다. “이것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선정 중에 관찰하신 미세한 마의 일들이다. 마의 경계가 나타날 때 너는 그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마음의 때를 씻어내고 삿된 견해에 빠지지 말라. 그러면 음마는 사라지고 천마는 부서지며, 강력한 귀신들도 넋을 잃고 도망쳐 다시는 요괴들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의 목소리가 굳건하고 힘찼다. “너는 보리를 증득할 때까지 어떤 부족함도 퇴보도 없을 것이다. 대열반 속에서 너의 마음은 결코 미혹되거나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 자애롭게 아난을 바라보셨다. “말법 시대에 선정을 모르고 설법을 모르면서 삼매를 닦다 삿된 길에 빠지는 우둔한 중생들이 있다면, 너는 그들을 위해 염려해야 한다. 그들에게 일심으로 나의 불정다라니주를 외우게 권하라. 외우지 못한다면 써서 선당에 두거나 몸에 지니게 하라. 그러면 어떤 마도 그들을 흔들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에는 끝없는 자비가 가득했다. “너희는 시방의 모든 여래를 공경하고 우러러보며, 끝까지 수행하고 정진하여 마지막 모범이 되도록 하라.”
아난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정수리로 받들어 공경하며 기억하여 잃어버리지 않았다. 대중 가운데서 거듭 부처님께 사뢰었다. “부처님 말씀과 같이 오음의 상(相) 가운데 다섯 가지 허망함이 본래 생각하는 마음(想心)이 됩니다. 저희들은 평소에 여래의 미세한 개시(開示)를 입지 못하였습니다. 또 이 오음은 아울러 제거해야 합니까, 차례로 다해야 합니까? 이와 같은 다섯 겹은 무엇을 경계로 삼습니까? 오직 원하옵건대 여래께서 대자비를 베푸셔서, 이 대중의 청명한 심목(心目)을 위하시고, 말세의 일체 중생을 위하여 장래의 안목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난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경외심과 감사함으로 가득 찼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부처님께 절을 올린 뒤 다시 여쭈었다.
아난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존경하는 세존이시여, 오음 속에 있는 다섯 가지 허망함이 모두 본래의 생각(想心)에서 비롯된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평소에 이런 미세한 가르침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난은 잠시 멉췄다가 계속 질문했다. “이 오음은 한꺼번에 제거해야 합니까, 아니면 순서대로 하나씩 없애야 합니까? 그리고 이 다섯 단계의 경계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의 눈은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빛났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의 미혹을 씻어주시고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십시오. 이는 저희뿐만 아니라 말법 시대의 중생들에게 미래의 눈이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정진(精真)하고 묘명(妙明)한 본각(本覺)은 원만하고 청정하여, 생사와 모든 때[塵垢]를 머물지 않는다. 나아가 허공까지도 다 망상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다. 이 으뜸가는 본각의 묘하고 밝은 참된 정기(真精)가 망령되이 모든 기세간(器世間)을 발생시킨다. 마치 연야다타(演若達多)가 머리를 잃어버리고 그림자를 인식한 것과 같으니, 망(妄)은 본래 원인이 없다. 망상 가운데서 인연의 성품을 세우고, 인연을 미혹한 자는 자연이라 칭한다. 저 허공의 성품도 오히려 허망하게 환(幻)으로 생겨난 것인데, 인연과 자연은 다 중생의 망령된 마음이 계탁한 것이다. 아난아, 망(妄)이 일어난 바를 알면 망의 인연을 말하겠지만, 만약 망이 본래 없다면 망의 인연을 말함도 본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자연을 추측하는 것을 알지 못함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여래가 너에게 오음의 본인이 다 망상임을 밝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자애롭게 아난을 바라보시며 천천히 입을 여셨다.
부처님의 목소리는 온화하면서도 확신에 차 있었다. “아난아, 그 정밀하고 참되며 묘하게 밝은 본각은 본래 원만하고 청정하여 생사나 번뇌가 머물 곳이 아니다. 심지어 허공조차도 망상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부처님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 본각의 묘하고 밝은 진정(真精)이 망상으로 인해 우리가 보는 세상을 만들어냈다. 마치 연야다타가 자신의 머리를 두고 그림자를 쫓는 것과 같이, 이 망상은 본래 원인 없이 생긴 것이다.”
부처님께서 계속 설명하셨다. “망상 속에서 사람들은 인연이라는 개념을 세웠다. 인연을 모르는 자들은 자연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허공조차 환상에서 태어난 것이니, 인연이니 자연이니 하는 것은 모두 중생의 망심이 지어낸 추측일 뿐이다.”
부처님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아난아, 망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안다면 인연을 말할 수 있겠지만, 망상이 본래 없는 것이라면 인연 또한 본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자연을 논하는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느냐?”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다. “그러므로 5음의 근본 원인이 모두 망상이라는 것을 너에게 밝히는 것이다.”
너의 몸은 먼저 부모의 생각(想)에 인하여 생겨났으니, 너의 마음이 생각이 아니면 생각 가운데서 명(命)을 전할 수 없다. 내가 먼저 말한 것과 같이, 마음으로 신맛을 생각하면 입안에 침이 생기고, 마음으로 높은 데 오르는 것을 생각하면 발바닥이 시큰거린다. 벼랑이 있지 않고 신 물건이 오지 않았는데, 너의 몸이 반드시 허망한 통륜(通倫)이 아니라면, 입의 침이 어찌 신 것을 이야기함으로 인하여 나오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너의 현재 색신은 견고(堅固)라는 이름의 첫 번째 망상이다. 곧 이 말한 바 높은 데 임하는 생각하는 마음이 능히 너의 형체로 하여금 참으로 시큰거림을 받게 한다. 이(생각)로 인하여 생을 받아 능히 색체(色體)를 움직이니, 네가 지금 현전하여 순하면 유익하고 거스르면 손해되는 두 가지가 현재 구치(驅馳)하는 것을, 허명(虛明)이라는 이름의 두 번째 망상이라 한다. 너의 생각[念慮]으로 말미암아 너의 색신을 부리니, 몸이 생각의 무리가 아니라면 너의 몸이 무슨 까닭으로, 생각을 따라 부리는 바가 되어 갖가지 형상을 취하겠느냐? 마음이 생기면 형체가 취하여 생각과 더불어 상응하여, 깨면 생각하는 마음이 되고 잠들면 꿈이 된다. 즉 너의 생각함이 망정을 요동시키는 것을, 융통(融通)이라는 이름의 세 번째 망상이라 한다. 변화의 이치가 머물지 않고 운운(運運)히 은밀하게 옮겨, 손톱이 자라고 머리카락이 생기며 기운이 사라지고 얼굴이 주름진다. 밤낮으로 서로 바뀌어도 일찍이 깨닫지 못한다. 아난아, 이것이 만약 네가 아니라면 어찌 몸이 천이하며, 만약 반드시 참으로 너라면 어째서 깨닫지 못하느냐? 즉 너의 모든 행(行)이 생각생각 멈추지 않는 것을, 유은(幽隱)이라는 이름의 네 번째 망상이라 한다. 또 너의 정밀하고 밝아 맑고 요동하지 않는 곳을 항상함(恒常)이라 하는 것은, 몸에서 견문각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참으로 정진(精真)하여 훈습된 망(妄)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무슨 까닭으로 너희들이 일찍이 지난 해에 하나의 기이한 물건을 보고, 해를 지나 기억과 잊음이 다 없다가, 뒤에 홀연히 다시 앞의 기이한 것을 보면, 기억이 완연하여 일찍이 잃어버리지 않았느냐? 즉 이 정밀하고 밝아 맑고 요동하지 않는 가운데, 생각생각 훈습을 받음을 어찌 헤아리겠느냐? 아난아, 마땅히 알라. 이 맑음은 참된 것이 아니다. 마치 급히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고요한 것 같으나, 흐름이 급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지 흐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생각(想)의 근원이 아니라면 어찌 망상의 훈습을 받겠느냐? 너의 육근이 서로 작용하여 합하고 열리는 이 망상은 어느 때나 멸함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너의 현재의 견문각지 가운데 습기를 익힘이 몇이나 되느냐? 이 맑고 밝은 안의罔象하고 허무한 것을, 전도(顛倒)라는 이름의 다섯 번째 미세한 정상(精想)이라 한다.
부처님은 온화한 눈길로 대중을 둘러보시며 계속해서 가르침을 펴셨다.
부처님께서 천천히 입을 여셨다. “아난아, 너의 몸은 처음에 부모님의 망상으로 인해 태어났다. 만약 네 마음에 망상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 와서 망상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부처님은 생생한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내가 앞서 말했듯이, 신 맛을 생각하면 입안에 침이 고이고, 높은 곳에 서 있는 상상을 하면 발바닥이 저려오는 것과 같다.”
그분의 목소리에는 지혜의 빛이 서려 있었다. “절벽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신 음식도 없지만, 너의 몸은 실제로 반응했다. 만약 너의 몸이 망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신 맛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침이 나오겠느냐?”
부처님의 어조가 진지해졌다. “그러므로 너는 알아야 한다. 너의 현재 육신(色身)은 ‘견고(堅固)‘라는 이름의 첫 번째 망상이다.”
계속해서 설명하셨다. “앞서 말한 높은 곳에 있는 상상이 너의 몸에 실제 저림을 느끼게 하는 것처럼, 느낌으로 인해 육신을 움직이는 이 현상이 바로 ‘허명(虛明)‘이라는 두 번째 망상이다.”
부처님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너의 생각(念慮)이 너의 육신을 지배하지만, 몸 자체가 생각은 아니다. 그런데 왜 너의 몸은 생각의 지시대로 온갖 형상을 취하는가? 이것이 바로 ‘융통(融通)‘이라는 세 번째 망상이다.”
그분의 눈빛이 깊어졌다. “생명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손톱과 머리카락이 자라고, 기력이 쇠하고, 얼굴에 주름이 진다. 밤낮으로 바뀌지만 너는 전혀 깨닫지 못한다. 아난아, 이것이 네가 아니라면 왜 몸이 변하겠느냐? 이것이 정말 너라면 왜 너는 전혀 느끼지 못하느냐? 이것이 바로 ‘유은(幽隱)‘이라는 네 번째 망상이다.”
부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너는 맑고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참된 정기라면 어찌 망상의 영향을 받겠느냐? 왜 수년 전의 기이한 일을 잊고 있다가 갑자기 생생하게 기억해내겠느냐? 흔들림 없어 보이는 이 정명함도 사실 끊임없이 훈습되고 있다. 아난아, 알아라. 이 고요함은 진실이 아니다. 마치 급류가 너무 빨라 고요해 보이는 것과 같으니, 흐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다. “망상의 근원이 아니라면 어찌 망상의 훈습을 받겠느냐? 이 망상은 육근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육근이 서로 작용하여 생긴 것이다. 망상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의 현재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속에 이 습기가 가득 차 있으니, 이것이 바로 ‘전도(顛倒)‘라는 이름의 다섯 번째 미세한 망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원한 감로수처럼 대중의 마음을 적셔주었고, 생명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었다.
“아난아, 이 오수음(五受陰)은 다섯 가지 망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네가 지금 그 인(因)과 계(界)의 깊고 얕음을 알고자 한다면, 오직 색(色)과 공(空)은 색음의 변제(邊際)이고, 촉(觸)과 이(離)는 수음의 변제이며, 기억[記]과 망각[忘]은 상음의 변제이고, 멸(滅)과 생(生)은 행음의 변제이며, 맑은 데 들어가 맑음과 합하는 것[湛入合湛]은 식음의 변제이다. 이 오음의 근원은 중첩되어 생겨난 것이니, 생겨날 때는 식(識)으로 인하여 있고 멸할 때는 색(色)으로부터 없어진다. 이치는 곧 돈오(頓悟)하여 깨달음을 타고 아울러 소멸하나, 사(事)는 단박에 제거되지 않고 차례를 따라 다하는 것이다. 내가 이미 너에게 겁파(劫波)의 수건 매듭으로 보여 주었는데, 무엇이 불명확하여 다시 묻느냐? 너는 마땅히 이 망상의 근원과 마음을 열어 통달하고, 장래 말법 가운데 모든 수행자에게 전하여 보여서, 허망함을 알고 스스로 태어남을 깊이 싫어하여, 열반이 있음을 알고 삼계를 그리워하지 않게 하라.”
부처님의 자애로운 눈길이 대중을 훑고 지나가며 가르침을 이어가셨다.
부처님께서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 오음은 다섯 가지 망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깊고 얕은 경계를 알고 싶다면 내가 설명해주마.”
부처님은 인내심 있게 설명하셨다. “색음의 경계는 색과 공 사이, 수음의 경계는 접촉과 여윔 사이, 상음의 경계는 기억과 망각 사이, 행음의 경계는 생과 멸 사이, 식음의 경계는 맑음으로 들어가 맑음과 합해지는 곳에 있다.”
그분의 목소리가 깊어졌다. “이 오음은 본래 겹겹이 생겨난 것이다. 생겨날 때는 식(識) 때문에 생기고, 사라질 때는 색(色)부터 없어진다.”
부처님의 눈에 지혜의 빛이 반짝였다. “이치로는 단번에 깨달아 모두 없앨 수 있지만(돈오), 현실의 현상(사)은 단번에 제거되지 않고 순서대로 사라진다(차제진).”
그분은 부드럽게 상기시키셨다. “내가 이미 매듭 묶인 수건의 비유로 보여주지 않았느냐. 무엇이 명확하지 않아 다시 묻느냐?”
부처님의 어조가 엄숙하면서도 자비롭게 변했다. “너는 이 망상의 근원을 철저히 깨닫고, 미래 말법 시대의 수행자들에게 전해야 한다. 그들이 허망함의 본질을 알고 깊은 염리심을 내어, 열반이 있음을 알고 삼계에 연연하지 않게 하라.”
“아난아,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시방에 가득 차서, 모든 허공에 칠보를 가득 채워, 가지고 미진수 제불께 봉올려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여 마음이 헛되이 보냄이 없다고 하자. 너의 생각에는 어떠하냐? 이 사람이 이로써 부처님께 보시한 인연으로 얻는 복이 많겠느냐?”
이 말씀을 마치고 부처님은 잠시 멈추신 뒤 질문을 던지셨다. “아난아, 만약 누군가 온 우주를 칠보로 가득 채워 무수한 부처님께 진심으로 공양한다면, 그가 얻을 복이 많겠느냐?”
아난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허공이 다함이 없고 진보(珍寶)도 끝이 없습니다. 옛날 어떤 중생은 부처님께 동전 일곱 닢을 보시하고도 몸을 버린 뒤 전륜왕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하물며 다시 현전의 허공이 이미 다하고, 불토에 충만하도록 다 진보를 보시함에 있어서리까. 겁(劫)이 다하도록 생각하고 의논하여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 것인데, 이 복이 어찌 다시 끝이 있겠습니까?”
아난은 부처님의 질문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공손히 대답했다.
아난의 목소리에는 경외심이 가득했다. “세존이시여, 허공은 끝이 없고 보물도 무한합니다. 옛날에 일곱 개의 동전을 보시하고도 전륜성왕이 된 이가 있었습니다. 하물며 끝없는 허공을 보물로 채워 부처님께 공양한다면 오죽하겠습니까?”
아난의 눈이 빛났다. “오랜 세월을 생각해도 헤아릴 수 없을 터인데, 그 복에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제불 여래의 말씀은 허망함이 없다.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몸에 사중죄(四重罪)와 십바라이(十波羅夷)를 갖추고, 순식간에 곧 이쪽과 저쪽의 아비지옥을 지나, 나아가 다하도록 시방의 무간지옥을 겪지 않음이 없다고 하자. 능히 일념(一念)으로 이 법문을 가지고, 말겁(末劫) 가운데서 배우지 못한 이에게 열어 보이면, 이 사람의 죄업과 장애가 응념(應念)에 소멸하여, 그가 받을 지옥의 고통 원인이 변하여 안락국을 이룰 것이다. 얻는 복이 앞의 보시한 사람보다 초월하여, 백 배 천 배 천만 억 배로, 이와 같이 나아가 산수와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아난아, 만약 어떤 중생이 능히 이 경을 외우고 이 주문을 가지면, 내가 널리 말한 것과 같아서 겁이 다하여도 다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가르침과 같이 도를 행하면, 바로 보리를 이루어 다시는 마업(魔業)이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아난의 대답을 듣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목소리는 온화하고 단호했다. “아난아, 여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더 놀라운 사실을 말해주겠다.”
부처님의 눈빛이 깊어졌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가장 무거운 죄를 지어 시방세계의 모든 무간지옥에 떨어질 운명이라 하자.”
부처님의 어조가 밝아졌다. “하지만 그가 찰나의 순간이라도 이 법문을 말법 시대의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 전해준다면, 그의 모든 죄업은 즉시 사라지고 지옥의 고통이 안락한 국토로 변할 것이다.”
부처님의 눈에 지혜의 빛이 번득였다. “그가 얻을 복은 앞서 말한 칠보로 공양한 사람보다 백 배, 천 배, 천만 억 배, 아니 산수나 비유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클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 자비롭게 대중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아난아, 누구든 이 경을 읽고 이 주문을 지니며 내 가르침대로 수행한다면, 그 공덕은 영원히 다하지 않을 것이다. 내 가르침을 따르면 곧바로 깨달음을 이루고 다시는 마라의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심을 마치시니,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와 일체 세간의 천, 인, 아수라와 및 모든 타방의 보살, 이승(二乘), 성선(聖仙), 동자와 아울러 초발심한 대력 귀신들이, 다 크게 환희하여 예를 올리고 물러갔다.
부처님께서 설법을 마치시자 회장에는 장엄하고 환희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지혜에 감동하여 감사와 존경으로 가득 찼다. 비구들은 엄숙했고, 비구니들은 합장했으며, 우바새와 우바이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쳤다.
인간뿐만 아니라 천인들도 귀를 기울였고, 아수라들의 얼굴마저 부드러워졌다. 다른 세계에서 온 보살들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성자와 신선들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린 동자들조차 호기심과 경외심으로 경청했다.
초발심한 수행자들의 눈은 결의로 빛났고, 평소 사납던 대력 귀신들조차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이 끝나자 환희가 터져 나왔다. 종족과 경계를 초월하여 모든 중생이 진심으로 부처님께 예배했다. 몸을 굽혀 합장하고 이마를 땅에 대어 최고의 존경을 표했다.
그 순간 모든 분별심은 사라지고, 진리에 대한 갈망과 부처님에 대한 무한한 감사만이 남았다.
예를 마치고 중생들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기쁨과 희망을 안고 일어섰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알기에. 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품고 각자의 세계로 돌아가 실천하며, 자신과 중생을 위한 해탈과 지혜의 빛을 밝힐 준비를 했다.